출처 :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65451

깊은 인상 준 <남한산성> 김상헌, 사료에선 좀 실망스러워
[사극으로 역사읽기] 영화 속 김상헌과 사료속 김상헌 비교해보니
김종성(qqqkim2000) 17.10.05 14:01 최종업데이트 17.10.05 14:01 


▲영화 <남한산성>. 서울시 강동구의 어느 극장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영화 <남한산성>은 1637년 병자호란 때의 주화파 대 척화파 논쟁을 다룬다. 영화 초반 자막에서는 병자호란이 1636년 12월에 발발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1637년 1월에 발생했다. 전쟁이 발발한 날인 인조 14년 12월 9일이란 음력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637년 1월 4일이다. 

<남한산성>에서 보여준 주화 대 척화 논쟁은 최명길(이병헌 분)과 김상헌(김윤석 분)에 의해 전개됐고, 결국엔 최명길의 주장대로 끝이 났다. 인조 임금(박해일 분)은 9층 계단 위에 앉은 청나라 태종을 올려다보며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거행했다. 의식이 거행된 삼전도는 지금의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쪽이다. 123층짜리 롯데월드타워 바로 옆이다. 

김상헌은 대의명분을 내세워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하지만,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영화 속의 김상헌은 아무도 없는 쓸쓸한 방에서 칼로 복부를 찔렀다. 그러고 쓰러졌다. 영화 속 김상헌은 그랬다. 

그런데 실제의 김상헌(1570~1652년)은 조금 달랐다. 우선, 자결 시도 장면이 그렇다. 인조 다음 왕인 효종시대 역사서인 <효종실록>에 김상헌의 자결 시도를 담은 글이 수록돼 있다. 음력으로 효종 3년 6월 25일자, 양력으로 1652년 7월 30일자 <효종실록>에 수록된 <김상헌 졸기>(김상헌의 일대기를 정리한 글)를 보자.   

"성(남한산성)을 나가는 쪽으로 논의가 결정되자, 최명길이 항복 문서를 지었다. 김상헌은 울면서 찢어버리고, 안에 들어가 주상께 '군주와 신하가 맹세한 뒤 죽음을 각오하고 성을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만에 하나 이루지 못하더라도, 죽어서 선왕을 뵙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의견이 수용되지 않자, 68세 된 김상헌은 단식에 들어갔다. 6일간 음식을 들지 않았다. 자결 시도는 그 직후에 있었다. 영화에서처럼 칼을 쓰지는 않았지만, 끈을 이용해 자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아무도 자결을 말릴 수 없는 쓸쓸한 방에서 시도한 건 아니었다. 옆에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자결은 성공할 수 없었다. <김상헌 졸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목을 매었지만, 옆에 있는 사람이 구해서 죽지 않았다."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는 <산성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병자호란을 정리한 조선 후기 문헌 <산성일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조참의 이경여와 공의 자제들이 붙들고 지켜서 자결하지 못하게 하였다." 


▲김상헌 묘소 입구.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에 있다.ⓒ 김종성

영화 속 김상헌과 사료 속 김상헌

영화 속의 자결 장면에 이어, 살펴볼 게 더 있다. 김상헌이 열렬한 척화파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모든 순간에 자신의 신념을 철저히 지키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병자호란 후에 정권에 대한 협조를 거부한 김상헌은 계속해서 청나라에 대한 저항을 외쳤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함께 치자"며 파병을 요청하자, 이때는 파병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로 인해 청나라에 끌려가게 되었다. 이때 남긴 시조가 유명하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라먀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귀국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예감을 시조에 담았다. 그처럼 비장했다. 그런 심정으로 청나라 수도 심양(션양)에 끌려간 72세의 김상헌은 형부(법무부)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받은 날은 인조 19년 1월 8일(음력) 즉 1641년 2월 17일(양력)이다. 1641년이면, 청나라가 중국 본토를 차지하기 전이다. 이때는 만주 땅 심양에 청나라 수도가 있었다. 그래서 북경(베이징)으로 가지 않고 심양으로 간 것이다. 

병자호란 뒤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가 본국에 발송한 보고서 모음인 <심양장계>에 따르면, 그날 재판에서는 파병 반대뿐 아니라 병자호란 당시의 일까지 다루어졌다. 소현세자는 이 공판을 직접 참관했다. 형부 정문 앞에서 열린 공판에서 오고간 질의·응답은 이렇다. 원문 문장을 간추렸다. 

문: 국왕이 남한산성에서 내려올 때, 함께 내려오지 않은 이유는 뭡니까? 
답: 신하의 정으로 어찌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병이 위중해서 모시고 갈 수 없었습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항복의식을 거행할 때 동참하지 않은 이유가 뭐냐는 물음이었다. 김상헌은 화친을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답하지 않았다. 척화에 대한 평소의 신념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도리어, 자신도 삼전도에 가고 싶었지만, 몸이 아파서 갈 수 없었다고 답변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화친을 찬성했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는 모호한 답변이었다. 


▲김상헌 묘소.ⓒ 김종성

문: 병이 위중했다면 가까운 데 있으면 되지, 먼 데로 간 이유는 뭡니까? 
답: 몸조리한 다음에는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문: 몸이 나아졌으면 한성으로 가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끝내 임금에게 가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린 까닭은 뭡니까? 
답: 나이 칠십이면 벼슬을 그만두는 게 예로부터 상례입니다. 늙고 병들어 벼슬살이를 감당할 수 없어 그렇게 한 것뿐입니다. 

병자호란 뒤에 정부 일을 하지 않은 게 척화파이기 때문이 아니냐는 취지의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김상헌은 척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나이와 건강 때문에 정부 일을 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오랑캐와 화친한 조정에 몸을 담을 수 없었다는 말은 하지 않은 것이다. 뒤이어, 청나라의 파병 요청에 대해 반대 상소를 올린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이어진다. 

문: 수군을 징발할 때, 이치에 어긋난 의견을 상소한 이유는 뭡니까? 
답: 군신관계는 부자관계 같은 겁니다. 마음에 품은 생각이 있다면, 말하지 않을 수 없죠. 내 비록 늙고 병들었어도 어찌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파병을 반대한 것은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였고, 임금은 아버지 같으므로 속생각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상소문을 올렸노라고 답했다. 청나라가 싫어서 반청(反淸)의 신념으로 파병을 반대했다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문: 늙고 병들어 벼슬살이도 할 수 없었다면서, 상소는 어떻게 할 수 있었습니까? 
답: 벼슬살이 할 근력이 없다고, 마음속 생각도 말하지 못하겠습니까? 또 내가 그런 말을 했지만, 임금께서 내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다. 또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당신들 일이 안 된 게 있습니까? 

자기 때문에 청나라가 손해 본 게 있느냐고 말했다. 자신이 청나라한테 손해를 끼치지 않았음을 은연중에 강조한 것이다. 


▲남한산성 남문인 지화문.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다.ⓒ 김종성

조선에선 척화론, 청 앞에선...

공판이 끝난 뒤 형부는 김상헌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청나라 제3대 황제 순치제는 따르지 않았다. 순치제는 청나라 태종의 아홉째 아들이다. 황제 즉위 후에 순치(順治)란 연호를 썼다 해서 순치제로 불린다. 

인조 20년 1월 6일자 즉 1642년 2월 4일자 <인조실록>에 따르면, 순치제는 "김상헌을 조선 의주에 감금하라"고 선고했다. 그러면서 청나라 사신들이 의주에 들를 때마다 김상헌의 상태를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김상헌의 신병을 조선에 넘겨준 것이다. 처벌의 강도를 낮춘 것이다. 

같은 해 1월 9일자 <인조실록>에는 김상헌이 자신의 의주 도착 사실을 인조에게 보고하는 내용이 나온다. 나중에 반청 활동으로 청나라에 다시 끌려가기는 했지만, 김상헌에 대한 최초의 재판은 그렇게 결말을 맺었다. 조선 의주에서 금고형을 사는 쪽으로 종결된 것이다. 김상헌이 청나라 형부에서도 척화파의 소신을 보여주었다면, 형량과 처벌 방법은 분명히 세졌을 것이다. 

당시에는 김상헌을 포함한 척화파 인사들이 매우 많았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도 김상헌을 척화파의 대명사로 평가하는 것은 그가 자기 신념을 철저히 지켰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데 김상헌은 조선에서는 철저하게 척화파로 살았지만, 청나라 사법부 앞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모든 순간에 신념을 지킨 건 아니었던 것이다. 

몽골이 중국 왕조인 남송을 침략했을 때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고 끝까지 충절을 지킨 문천상(1236~1282년)이란 인물이 있다. 문천상은 칭기즈칸의 손자인 황제 쿠빌라이칸의 전향 권유를 거절하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김상헌으로 분한 김윤석.ⓒ CJ 엔터테인먼트

조선 정부가 채택한 <김상헌 졸기>에서는 "세상의 논객들은 문천상 이후로 동방에서는 오직 김상헌 한 사람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며 김상헌을 높게 평가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에 기초해 김상헌을 평가한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김상헌의 조선 행적만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의 청나라 행적까지 종합해서 김상헌을 좀 더 면밀히 평가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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