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23084&CMPT_CD=P0001


30년만에 이걸? '영토확장 종결자' 대조영의 비법
[사극으로 역사읽기] 특집 '한국 고대사의 속속들이', 열한 번째 이야기
11.02.14 11:49 ㅣ최종 업데이트 11.02.14 11:49 김종성 (qqqkim2000)


▲ KBS1 드라마 <대조영> ⓒ KBS
 

우리 머릿속에 있는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 그만한 크기의 영토를 확보하는 데 고구려인들은 600년 이상의 세월을 소요했다.

 

고구려 영토가 가장 넓었던 장수왕(재위 413~491년) 시대는 고구려 건국으로부터 600년이 훨씬 지난 때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건국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기원전 3세기에 건국되었다는 점이 광개토대왕비문이나 <한서>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건국부터 장수왕 때까지 600년 이상이 소요됐다고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대조영은 고구려 멸망(668년)한 지 불과 30년 만에 고구려를 부활시켰다. 698년에 '고구려2' 즉 발해를 건국하고 '초대 프레지던트'에 취임한 것이다.

 

물론 건국 당시 발해 영토가 고구려 최전성기의 영토와 똑같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출범 당시의 발해는 제3자들의 눈에 고구려의 후계자로 비쳐졌다. 이는 대조영 즉위 당시의 발해가 고구려 최전성기에 비견될 만한 영토를 어느 정도 확보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조영은 고구려인들이 600년 넘게 고생해서 이룩한 대업을 불과 30년 만에 성취해낸 것이다. 게다가 고구려인들이 중국의 분열상태(3~6세기)를 활용해서 이룩한 업적을, 그는 통일 중국(당나라)의 집중 견제 속에서 단숨에 성취해냈다. 이런 점을 보면 그는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에 결코 뒤지지 않는 대단한 능력자다.

 

30년 만에 '고구려2' 세운 능력자 대조영... 비결은 5가지


▲ 발해의 영토. 그림 출처는 고등학교 <국사> ⓒ 교육인적자원부

대조영이 그만한 대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그가 비상한 두뇌와 무예, 충실한 부하들에 힘입어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식의 느낌을 주었다. 이런 관점은 틀리지는 않지만 구체적이지는 않다. 이보다 더 구체적인 대조영의 성공비결을 다섯 가지로 압축해볼 수 있다.

 

우선, 대조영의 선천적 유산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이 쓴 <발해고>에서는 대조영의 아버지인 대걸걸중상이 요동(만주) 송화강 유역의 부족장이라 했다. 대걸걸중상이 실제로는 고구려 최후의 왕인 보장왕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어느 견해를 따르든 간에 대조영이 높은 신분을 타고났음에는 틀림이 없다.

 

남들 앞에서 자신의 성공비결을 설명할 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가르침·기질·신체·재산·명예·지위 등을 쏙 빼놓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아무리 못 배우고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부모의 도움을 받기 마련이다.

 

하물며 대조영처럼 고위 신분을 타고난 사람의 성공비결을 다룰 때는 부모의 영향을 가장 먼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들보다 유리한 지점에서 인생을 시작했다는 점은 대조영의 성공비결을 논의할 때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요소다.

 

둘째, 대조영은 높은 신분에 만족하지 않고 지도자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조선 같은 문인사회에서는 문장에 능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지만 고구려 같은 무인사회에서는 무예에 능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게 이치적이다. <발해고>에서는 대조영이 용감하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그가 자기 사회에서 요구되는 지도자의 자격을 구비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쌓은 무예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20세 전후에 고구려 장수가 되었고, 그 덕분에 고구려 멸망 후에는 잠재적인 대권주자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그가 무예보다는 작문을 더 좋아했거나 '아버지 백'만 믿고 허송세월했다면, 당시 같은 혼란한 세상에서 영웅으로 떠오르기 힘들었을 것이다. 



▲ <대조영>에서 대조영 역할을 맡은 탤런트 최수종. ⓒ KBS

셋째, 대조영은 주류 질서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7세기 초반부터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당나라를 지지하는 쪽과 당나라를 반대하는 쪽의 대결로 재편되었다. '친당이냐 반당이냐'가 주류 쟁점이었던 것이다.

 

대조영은 주류 질서에 용감히 뛰어들었다. 그는 고래들의 싸움을 구경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고래의 한쪽이 되었다. '어느 쪽이 강해지는지 일단 지켜보자'며 대세를 관망한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대세의 흐름을 열어나간 것이다.

 

그가 만약 이도저도 아닌 쪽, 즉 친당도 반당도 아닌 쪽에서 활로를 모색했다면, 설령 나라를 세웠다 해도 그는 발해보다 훨씬 작은 나라를 세우는 데 그쳤을 것이다. 큰 시장에 뛰어들었기에 큰 것을 움켜쥘 수 있었던 것이다.

 

넷째, 대조영은 초심을 지켰다. 고구려가 망하고 당나라의 기세가 등등해지자 반당세력 쪽에서 초심을 포기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거란족 장군 이해고였다.

 

이해고는 본래 반당투쟁을 하던 사람이었다. 한때 당나라에 커다란 패배를 안겨준 적도 있었다. 그러던 그가 당나라와 돌궐족이 연합하고 거란족이 약해지자 당나라에 투항하여 대조영을 쫓는 추격자로 돌변했다. 그에 비해 대조영은 반당투쟁이라는 기조에서 한시도 이탈하지 않았다. 이 점은 대조영에 대한 고구려 유민들의 신뢰를 두텁게 해준 요인이었고 이는 그의 조직을 견고하게 만들어주었다.

 

초심을 지킨 대조영과 초심을 버린 이해고가 맞붙은 것은 698년 천문령 전투에서였다. 이 대결은 초심을 지킨 자의 승리로 종결됐다. 이해고는 겨우 자기 한 몸만 건진 채 말을 타고 도망쳤다. 천문령 전투를 계기로 당나라는 대조영과의 대결을 사실상 포기했다. 이 전투는 발해 건국의 결정적 계기였다. 초심을 지킨 자가 역사로부터 큰 선물을 받은 것이다.

 

시대적 변화 잘 수용했던 '발해 초대 프레지던트' 대조영



▲ 대조영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이해고(정보석 분). ⓒ KBS

마지막으로, 대조영은 시대적 변화를 잘 수용했다. 고구려 멸망의 원인 중 하나는, 정치 시스템이 경제변화를 지탱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요동(만주)에서는 기존의 산업인 수렵·유목에 비해 새로운 산업인 농경의 비중이 현저히 증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 정치 시스템은 이런 경제변화를 제대로 따라잡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점은 고구려의 지방체제에서 확인된다. 고구려는 지방을 5부로 나누고 부(部) 아래에 성(城)과 진(鎭)을 두었다. 이는 국가 형성에 참여한 부족들인 소노부·계루부·절노부·관노부·순노부의 기득권을 인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나타난 특징은 사람을 단위로 지방을 구획했다는 점이다. 사람을 단위로 지방을 구획하는 것은 수렵민이나 유목민 사회에 보다 더 가까운 것이다.

 

농경의 비중이 증대되는 시기에 이 같은 시스템을 고수했으니, 고구려의 정치가 경제를 충분히 따라잡지 못했다고 평가해도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경제변화를 따라가지 못할 경우, 정치 시스템은 외부의 충격이나 내부의 저항에 취약해지기 마련이다.

 

그에 비해, 발해의 지방체제는 15부 62주였다. 주(州) 아래에는 현(縣)이 있었다. 주목할 것은, 상층부에서는 고구려 식인 5부 체제를 채택하고 하층부에서는 중국식인 주·현 제도를 채택했다는 점이다. 주·현 체제의 특징은 토지를 단위로 지방을 구획한다는 점이다. 토지를 단위로 지방을 구획하는 것은 농경민 사회에 보다 더 가까운 것이다.

 

발해가 고구려식과 중국식을 병용한 것은 수렵·유목에서 농경으로 중심축이 이동하는 당시의 경제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농경민 사회의 지방체제를 도입했다는 것은 발해가 경제변화를 정치 시스템에 반영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초대 프레지던트 대조영이 시대적 변화를 잘 수용하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러시아산 인삼주 ‘발해의 별’. 러시아 연해주가 발해 영토였다는 이유로 러시아인들도 발해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다. 사진 출처는 <한국생활사박물관> 6권. ⓒ 사계절

그런 노력들에 힘입어 발해시대에는 이전에 비해 농업이 크게 발달했다. 경쟁력 있는 농산물이 많이 개발된 사실로부터 그 점을 알 수 있다. 북한 학계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해란강 유역의 벼가 발해의 특산품이 되고 두만강 부근의 콩으로 만든 메주가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발해시대에 농업이 크게 발달했다는 사실은 또 다른 방법으로도 입증된다. 예컨대, 발해 전기에 매장된 소 뼈 중에는 어린 소의 것이 많은 데 비해 후기에 매장된 소 뼈 중에는 늙은 소의 것이 많아진 사실은, 후기로 갈수록 소를 농경에 '실컷' 이용하다가 소의 이용가치가 없어진 뒤에 도살하는 일이 많아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제정치적 측면에서도 발해의 농업경제 발달을 추론할 수 있다. 고구려(만리장성 동북쪽) 때만 해도 중국의 최대 주적은 만리장성 서북쪽의 나라들이었다. 고구려가 강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막강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발해 멸망 후인 10세기부터는 중국의 최대 주적이 만리장성 동북쪽의 나라들(요나라·금나라 등)로 바뀌었다.

 

이것은 과도기인 발해 시대에 만리장성 동북쪽의 역량이 크게 성장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이 지역의 경제 특히 농업경제가 크게 발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경제 분야에서 나타난 시대적 변화를 정치 시스템에 잘 반영한 대조영 이래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발해 시조 대조영의 성공비결을 살펴보았다. 그는 타고난 신분에 만족하지 않고 지도자의 조건인 무예를 열심히 연마했고, 친당이냐 반당이냐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주류 싸움터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또 반당투쟁에서 초심을 버리지 않는 한편 시대적 변화를 잘 수용한 덕분에 고구려 멸망 30년 만인 698년에 '고구려2'를 세울 수 있었다.

 

주류가 되는 데 필요한 기능을 연마하라, 겁내지 말고 주류 질서에 과감히 뛰어들라, 초심을 지키라, 시대적 변화를 포착하라. 발해의 1대 프레지던트, 대조영이 우리에게 귀띔해주는 성공비결은 그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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