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bbs_id=BBSMSTR_000000000200&ntt_writ_date=20111215&parent_no=1

<33>발해의 멸망
야율아보기 `대제국 건설' 시도
2011. 12. 15 00:00 입력 | 2013. 01. 05 07:29 수정
 


발해의 상비군이 주둔했던 부여부의 농안고성 일대.


농안고성에서 필자가 채취한 기왓조각.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부여부 지역인 농안에 세운 요탑.
 
9세기 후반부터 발해를 둘러싼 동아시아 각국은 동요하기 시작한다. 당과 신라는 지방세력의 할거로 인해 각각 5대 10국과 후삼국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특히 당은 8세기 중반 안사의 난으로 말미암아 중앙세력이 크게 약화됐고, 이를 틈타 지방에서는 진번 세력들이 난립했다. 당의 내부적·사회적 모순은 점차 가속됐고, 만주 지역 및 한반도 지역 등에 대한 간섭은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있었다. 한편 한반도에서도 신라에 대한 고려, 후백제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후삼국 시대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때 새로운 강자 거란이 발흥했다. 그 중심은 요 태조인 야율아보기였다. 결국, 발해는 거란의 성장으로 말미암아 해동성국의 빛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야율아보기, 거란 통합하고 황제 즉위

거란 부족들은 서요하 상류인 시라무렌강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했다. 혜성처럼 등장한 야율아보기는 916년 거란의 각 부족을 통일했다. 황제에 등극한 야율아보기는 수도를 임황(臨潢) 지역으로 옮기고, 한인 지식인을 적극 임용해 제도와 관직을 제정했다. 

또한, 거란 문자를 만들며 새로운 대제국 건설을 시도했다. 거란은 국가적 체제를 정비하면서 한편으로 주변 국가들에 대한 대규모 정복 활동을 펼쳤다. 거란의 궁극적인 목적은 경제·문화적 중심지인 중원지방으로의 진출이었다. 초창기에 중원을 침범한 것은 말에게 먹일 목초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국가적 기틀이 만들어진 상황에서는 제국 유지에 필요한 물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거란의 제국 건설

야율아보기는 901년 중원 지방을 침공한 데 이어 916년 황제로 등극한 이후 삭주·신주 등 대북(代北)에서 하곡(河曲)에 이르는 지역, 음산(陰山)을 넘는 광대한 지역을 정복했다. 921년에는 중원의 10여 성을 함락시키고, 한인들을 포로로 잡아 거란의 내지로 이주시켰다.

거란은 중원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배후의 안전확보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서쪽의 당항 등과 동쪽의 발해를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야율아보기는 원정 때마다 배후의 허점을 걱정했고, 이를 위해 배후세력과 일시적으로 연대하거나, 군사를 보내 무력행동을 펼치는 등 양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당시 거란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발해였다. 거란은 서쪽변방에 대한 불안감으로 서방정벌을 마친 후에야 발해를 공격하고자 했다. 경략 경로는 요컨대 서방 정벌, 동방(발해) 정벌, 중원 정벌의 순으로 계획적이고 치밀한 구상 속에 행해졌다.

거란의 요동 침략과 발해의 대응

거란은 908년 진동에 성을 축조해 발해와 중원지방의 연결을 차단했다. 909년에는 야율아보기가 직접 요동지방을 방문했고, 915년에는 압록강에서 낚시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거란의 요동진출이 본격화되자 발해는 중원의 양(梁)과 연계를 모색했고, 918년에는 거란과 화친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렇듯 발해는 교류와 견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면서 외교적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발해의 영토였던 요양성이 거란의 수중에 들어가고, 919년 2월에는 그곳에 옛 성을 수리해 한민(漢民)과 발해호(渤海戶)를 이주시키며 동평군(東平郡)이라는 거란의 행정구역으로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어 거란은 921년 12월에 단주와 순주의 주민을 동평군과 심주(瀋州)로 옮기고, 923년 3월에는 해(奚)를 복속했다. 이에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려는 자구책으로 고려 및 신라와 결원협정을 맺기도 했다.

한편, 거란은 924년 5월 계주의 주민을 요주로 옮기고 서방정벌을 다시 시작했다. 발해는 이 틈을 기회로 삼아 종래의 소극적 자세가 아닌 적극적 행동을 개시했다. 거란의 통치권역인 요주를 공격해 요주자사 장수실(張秀實)을 죽이고, 그곳에 있던 주민들을 탈취했다. 2개월 뒤 거란의 반격이 이어져 또다시 무력충돌이 일어났으나, 거란은 아무런 소득 없이 퇴각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거란은 발해에 대한 전면침공을 감행하게 된다.

발해의 멸망

925년 서방 정벌에 성공한 야율아보기는 12월 발해에 대한 총공격에 나서며 조서를 발표했다. “이른바 두 가지 일 가운데 한 가지 일은 이미 완수했으나, 발해와의 대대로 내려온 원수는 갚지 못했다. 어찌 편안히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말한 두 가지 현안은 바로 서방정벌과 발해정벌이었다. 서방정벌을 완수했으니 친히 발해를 정벌하겠다는 이야기다.

한편, 발해에서는 거란과의 접경지대인 부여부에 경병(勁兵)인 상비군을 배치해 거란에 방비하고 있었다.(신당서 발해전) 특히 부여부 아래에는 ‘강한 군대’라는 이름의 강사현(强師縣)이 있는데, 그 명칭으로 보아 이곳을 군사적 요충지로 생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의 성체제를 계승했다. 

이것을 인식한 거란은 발해 침공로를 전통적인 거란도로 하지 않고 수도로 직공(直功)하는 방법을 택했다. 단 보급로 차단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먼저 부여부를 공격해 확보하는 방법을 택했다.

거란은 출정한 지 9일 만에 발해의 서쪽 방어선인 부여부를 포위했고 3일 만에 함락시켰다. 당황한 발해는 구원병 3만을 급파해 이를 막도록 했으나 실패했다. 거란은 다시 6일 후인 926년 1월 9일 수도 상경성을 포위했다. 발해의 서쪽 변방에서 수도인 상경성까지 도달한 시간은 일주일에 불과했다. 발해가 군사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도록 우회적인 기습공격으로 발해의 수도인 상경성을 포위했던 것이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은 5일 후에 항복하기에 이른다.

갑작스러운 발해 멸망의 이유 

그렇다면 왜 발해는 순식간에 멸망의 길로 접어든 것일까. 먼저 거란군의 수적 우세, 우회로를 통한 기습작전과 같은 거란의 직접적인 공세에 의한 요인을 들 수 있다.

아울러 발해 통치체제의 와해를 들 수 있다. 보로국, 흑수, 달고 등의 족속들은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신라, 후당 등과 따로 교섭을 시도하거나 고려로 망명하는 등 독자적인 행동을 취했다. 이와 함께 지배층의 망명도 발생했다. 920년 일본에 파견된 발해 사신 4명이 귀국하지 않았으며, 특히 925년 9월과 12월에는 장군과 예부경·공부경 등 발해의 지배층들이 백성을 이끌고 집단적으로 고려로 망명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요사에는 야율아보기가 발해의 내분을 틈타 공격했기 때문에 싸우지 않고 이겼다고 전하고 있다. 발해는 통치체제의 이완과 거란과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지배층 간에 내분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소수의 고구려 유민과 다수의 말갈족으로 이뤄진 인적 구성의 요소가 단결된 공동체 의식을 도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 밖에 백두산 화산 폭발설이 최근 대두되기도 한다. 이들 견해 중에서 어느 것이 정설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다양하게 작용했을 것으로는 생각된다. 

<강성봉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수료)>


발해 멸망 관련글  https://tadream.tistory.com/13813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