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408299.html

광개토왕비·삼족오는 살아있는 ‘시대정신’
등록 : 2010.03.05 10:39수정 : 2012.10.15 17:27 

[한민족 시원, 만주]고구려, 생각의 지도를 넓혀라 (2)
정치-경제-문화 인터체인지로 ‘조정자’ 우뚝
동아시아 질서 재편기에 살아있는 성공 모델

[한민족 시원, 만주]고구려, 생각의 지도를 넓혀라 
    (1) 광개토대왕 첫 인천상륙작전, 지중해국 우뚝 - 한겨레  http://tadream.tistory.com/10160 
    (2) 광개토왕비·삼족오는 살아있는 ‘시대정신’ - 한겨레  http://tadream.tistory.com/10161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중국 정부가 추진한 동북공정(東北工程)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2002년 2월 사회과학원 산하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에서 동북공정이란 명칭의 학술 연구를 시작했다. 동북공정은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 아래 고구려는 물론, 고조선, 부여, 발해, 현재의 한국을 연구하는 작업이다.
 
▶중국의 동국공정이 되레 고마운 까닭


동북공정의 뼈대 가운데 하나는 고구려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고구려 전체 역사를 현재와 미래의 국가발전 전략에 맞게 논리적이고 효율적으로 포장해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중국학자들은 고구려의 건국 과정과 귀속 문제 등 다양한 주장을 내놨는데, 핵심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동북공정은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로 끌어들이고 있다. 만리장성이 한반도까지 뻗어나간 것으로 그린 중국사회과학원의 진·한시대 역사지도(오른쪽). 역사의 아침 제공.
 
첫째, 고구려 영토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토라는 논리이다.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통일적 다민족인 중앙집권국가가 요동의 군현을 수복하려고 벌인 전쟁이다. 본국 통치계급이 영토확장을 위한 침략 전쟁은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고구려 정권은 서한시기 변강 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고,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 것은 고구려 땅이 자기 조상의 통치 지역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국학자들이 삼고 있는 역사적인 근거는 중국의 사료들과 함께 이를 수용한 삼국사기의 내용이다.
 
둘째, 고구려는 대대로 중국의 조공을 받치는 등 신속관계에 있었다는 논리다. “고구려가 대를 이어 중국 정권의 번국이었다”고 주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고구려가 처음부터 끝까지 중국에 예속하였고, 한나라부터 당나라까지 역대 중원왕조가 관할한 소수 지방정권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몰역사적이고, 비현실적인 동북공정의 주장은 결국 동북아 역사전쟁으로 비화하였다. 그 전쟁은 누구에게 이득을 안겨 주었을까? 동북공정으로 한국인들은 고구려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중국이 얼마나 위험한 나라인지를 알게 되었다. 우리 민족에게는 천운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중국의 ‘동북공정’ 저지를 위한 기자회견이 국학원, 국학운동시민연합 등의 주최로 2006년 9월6일 오전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중국은 동북공정을 중단하고, 모든 역사왜곡을 중단하라, 남북한 및 해외동포에게 공식 사과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신중화제국을 꿈꾸며 그 끝은 아시아 맹주
 
중국 정부는 고구려가 한국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랐을까? 중국 정부는 왜 고구려라는 아킬레스건을 건드렸을까?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 동북공정은 신중화제국주의와 동아시아 질서 재편을 추진하기 위한 국가전략의 일환이다.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마오저뚱은 철저한 중화주의자였다. 공산 중국에 이르러 중국은 더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주변의 국가와 소수 민족을 억압하고 독립을 빼앗았다. 대표적인 것이 몽골, 티베트, 위구르족 영토 탈취와 압박이다. 중국이 공북공정에서 고구려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동북공정의 궁극적인 결말이 신중화제국주의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둘째, 만주지역에 대한 한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다. 중국과 한국 사이에는 간도 문제가 있다. 그리고 만주는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땅이다. 구한말 조선이 국권을 상실하자 많은 사람이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이 아닌 독립전쟁을 벌였다.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독립전쟁을 벌였나? 고조선 이후 우리 민족이 출발한 곳, 만주에서 조선의 회복이 아니라 원조선의 회복과 옛질서를 회복하는 그런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옛 고구려의 땅에서, 발해의 땅에서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쟁을 벌였고, 우리 역사를 가르쳤다.
 
중국은 결속이 강화된 남북한 또는 통일한국이 만주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거나 영향력을 강화시킬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셋째, 앞으로 중화중심의 동아시아 혹은 아시아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전단계의 정지작업일 수 있다. 동아시아 공동체가 실현되면 정치, 군사적인 영토보다는 문화 영토, 그리고 경제 영토 개념이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 동아시아가 새로운 질서로 재편될 경우 만주와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입지를 보다 강화하려는 의도다.
 
넷째, 연해주 문제다. 이 문제는 아직 쟁점으로 부상하지는 않고 있다. 지금 러시아 영토인 핫산,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등 연해주는 1860년도까지 청나라의 땅이었다. 물론 옛 발해, 옛 고구려의 땅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연해주는 1860년 북경조약을 통해 빼앗긴 땅이기 때문에 수복의 대상이다. 또 중국이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과 패권을 장악하려면 반드시 동해에 진출해야 한다. 연해주는 동해에 진출하는 관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연해주의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중국은 국제질서가 미주공동체, 유럽공동체 형태로 지역 블럭화하는 경향에 맞춰 아시아공동체가 탄생할 것으로 보고, 일본을 누르고 아시아의 맹주가 되려는 장기적인 국가전략 속에서 역사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동북공정, 서남공정, 서북공정, 몽골공정 등이 그것이다. 중국의 신제국주의적 속성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역사학자로서 이런 중국의 태도는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중국을 설득하려는 것이다.
 
▶고구려는 세계적 질서 재편기에 성공한 역할 모델


고구려를 상징하는 상상의 새인 ‘삼족오’(세발 달린 까마귀). 한겨레 자료사진

오늘 우리는 고구려를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나?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배경에 동아시아의 질서 재편이 있다. 한·중·일의 신민족주의가 대두하고 있고, 새로운 갈등과 헤게모니 쟁탈전이 동아시아 한복판에서 숨가쁘게 펼쳐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패권다툼이 옛날에는 없었을까? 동아지중해에서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의 70년 전쟁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국제대전이었다. 당시 동아시아 질서를 놓고 양대 세력인 고구려와 중국 세력이 질서 재편 전쟁을 벌인 것이다. 지금의 상황과 너무도 흡사하다. 고구려는 질서 재편기에 우리가 해야 할 방법론과 성공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이다.
 
격변하는 국제질서의 재편 시기에 고구려처럼 우리를 동아지중해의 중심에 놓는 것이 필요하다.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은 센터론이나 제국주의의 개념과는 다르다. 동북아중심국가론, 한반도중심론과도 다르다. 중핵조정론은 (지리적으로) 가운데에 있으면서 역할만 조정하자는 것이다. 우리 같은 나라가, 어떻게 패권적 국수주의나 민족주의를 지향할 수 있나?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 늘 양 강대국인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가 팽창적 국수주의를 추구할 수 있나? 우리는 삼족오처럼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심과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존을 이룩할 수 있다.
 
▶요동 대련-경기만-평택-동해시 거점 확보해 조정자로
 
이처럼 대륙적 질서와 해양 질서가 동시에 작용하는 동아지중해의 중심에서 조정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구려는 바다와 육지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점(목)을 장악함으로써 조정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고구려 지도에서 보면 이런 전략적인 거점(목)이 여러 곳 보인다.
  
첫 번째 지역이 중국 요동반도의 끝 대련이다. 이곳을 장악해야 모든 물길을 장악할 수 있다. 고구려는 해양활동이 없었을까? 3면이 바다였고, 중국과 70년 전쟁을 벌이고, 일본열도와 계속해서 외교사신을 교환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수군 이야기가 나온다. 미천왕, 고국원왕 때는 배를 이용해 북방민족들과 군사동맹을 맺었다. 232년, 234년에는 손권의 오나라와 바다를 통해 군수물자를 주고받았다. 439년에 장수왕이 800필의 말을 중국에 보낸다. 수나라와 전쟁에서 이긴 612년에는 수나라 백성과 낙타 2필을 일본 열도에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것이 다 배를 통해, 바다를 통해 이뤄진 것이다. 고구려와 수나라와 당나라의 전쟁, 삼국통일 전쟁은 모두 해전에서 판가름이 났다. 그만큼 바다가 중요했고, 고구려가 바다를 장악하는데 대련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두 번째 경기만이다. 한강을 장악하면 한반도 반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광개토대왕은 경기만을 장악하려고 396년에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집중 공격한다. 장수왕에 이르러 한강 일대를 완벽하게 장악한다. 이 일대를 장악해 고구려는 남북으로 분단된 중국을 대상으로 등거리 외교를 펼칠 수 있었다. 위연과 상해정권과 함께 북경정권을 압박하는 정책을 편 것이다. 또 백제와 신라, 왜가 중국과 교섭하는 것을 바다에서 차단할 수 있었다. 이런 등거리 외교를 오늘날 상황에 맞게 구상하면 러시아, 몽궐, 일본과 함께 중국을 외곽에서 포위하는 전술이 될 것이다. 당시의 외교적 주도권을 고구려가 쥐고 있었다. 이는 고구려가 해륙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 번째 지역이 평택, 화성을 연결하는 서해안 지역이다. 이 지역을 장악해야 중국의 해안지역과 경쟁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서해안 경제특구를 송도로 지정한 것은 잘못된 결정이다. 평택, 인천, 강화, 개성, 해주로 이어지는 범경기만 해안특별구를 지정하는 것이 맞다. 그래야, 중국의 해안지역과 경쟁할 수 있다. 반도적 스케일을 떨쳐버리고, 고구려처럼 해륙적 스케일을 회복해야 한다.
 
네 번째는 동해시가 중요하다. 동해는 그냥 빈 바다일까? 그럼 일본이 소외된다. 동북아 질서재편기에 일본은 가만있겠나? 일본이 동해 경제권으로 서해 경제권에 대항하는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 것이다. 또 중국 해군이나 상선이 동해에 진출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한국, 러시아, 일본이 동해 경제권을 활성화할 수밖에 없다.
 
고구려도 신라를 압박하고, 일본열도를 쉽게 건너려고 동해시를 거점으로 확보했다. 당시 이 지역에 고구려의 항로가 있었다. 일본과 중국을 거느리고 동아지중해의 조정자 역할을 하려면 동해 경제권을 띄워야 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동해시가 경제특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수룩한 광개토왕비와 다리 세개인 삼족오에 시대정신이


2005동북아청년캠프 대원들이 2005년 8월 중국 집안의 광개토대왕비를 살펴보고 있다. 집안/강재훈기자 khan@hani.co.kr
 
나는 고구려가 문화국가라고 주장했다. 고구려의 고군벽화나 예술분야가 뛰어나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독특한 문화가 있는 나라라는 의미다.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 몽골지역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토를 통치했다. 고구려 속에는 백제, 신라, 거란, 말갈, 선비족 등 종교와 생활양식, 풍습이 다른 다양한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 따라서 내부의 통일성이 깨지면 고구려라는 나라는 성립할 수 없었다. 중국은 정권이 바뀌면 정권을 잡은 사람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고구려는 주변의 모든 민족과 말 그대로 조화와 상생하는 방법론을 택했다.
 
무엇이 고구려를 결속시켰을까? 우선 고구려인들의 역할이 중요했을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스스로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자의식이 강했고, 주변 종족들에게도 이를 각인시켰다. 고구려인들은 스스로 천제지자, 화백지자, 천손지자, 황천지자, 천손, 일월지자 등으로 높여 불렀다. 이건 그 시대의 법칙이었다. 이렇게 주장을 해야 고구려인은 물론 주변 민족들이 고구려를 중심으로 모일 수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가 있는 곳(수도)은 우주의 중심이고, 그 중심에서 광개토대왕비나 장군총 같은 특별한 것이 만들어진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를 보면 고구려의 문화적 풍모가 잘 나타난다. 그 비는 중국의 그것처럼 거대하거나 위압적이지 않다. 강력한 힘이라든가, 피냄새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미완성품처럼 보이고, 어수룩해 보이고, 다분히 카오스적이다. 고구려인들은 당대에 가장 돌을 잘 다루던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이 돌을 다룰 능력이 없어서 비정형으로, 어수룩하게 광개토대왕비를 만들었을까? 거기엔 위압적이지 않으면서 더불어 살고자 하는 고구려의 시대정신이 압축적으로 담겨있다.
 
삼족오에도 고구려의 시대정신이 녹아 있다. 삼족오는 다리가 세 개고, 날개가 두 개고, 머리에 뿔이 달렸다. 다리가 세 개인 것은 각각의 역할을 의미하고, 조화를 상징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 중국, 일본이 평평하게 균형을 이뤄야 동북아의 평화와 공존이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물류와 문류, 인류의 거점인 하트로
 
고구려은 정치, 군사적으로 조정의 역할, 경제와 물류 입장에서는 허브의 역할, 문화적으로는 인터체인지, 아이씨(IC)의 역할을 수행했다. 흔히 우리 문화를 설명할 때 브릿지론을 주장한다. 발달한 중국문화가 한반도를 통해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는 가교론이 그것이다. 이는 우리 문화의 한 부분을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한반도는 문화의 인터체인지다.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한 자연환경이 있고, 대륙과 해양이 만나고, 북방과 남방이 만나는 아주 독특한 곳이다. 그러니까 문화의 브릿지가 아니라 인터체인지가 되는 것이다. 나는 한발 더 나아가 4년 전부터 아예 ‘하트(heart)론’을 주장한다. 심장에서 피가 공급되는 것처럼 모든 문화가 여기에 모여 들어와 다시 힘을 얻어서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를 물류와 문류, 인류의 거점으로 만들자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고구려는 우리의 미래를 디자인할 때 중요한 모델이 된다. 고구려가 지금도 살아있고 고구려의 시대 정신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윤명철 동국대 교수, 정리=박종찬기자 pjc@hani.co.kr


윤명철 동국대 교수가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에서 ‘고구려, 생각의 지도를 넓혀라’라는 주제로 역사특강을 하고 있다. 영상화면 캡쳐
 
◈윤명철 교수= 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 동국대 사학과 졸업. 성균관대 석사, 박사. 해양문화연구소장, 한민족학회 부회장, <지구문학> 편집위원, ‘좋은벗들’ 이사. 1993년 대한해협 뗏목 학술탐사를 시작으로 황해문화 뗏목 탐사를 두 차례 벌였다. 또 뗏목 장보고호를 타고 중국 절강성에서 인천을 경유, 제주도와 일본까지 43일간 학술 탐사를 벌인 탐험가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고구려사와 해양사이며, 4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광개토태왕을 통해 21세기 ‘고구리즘’(gogurism)의 실현을 꿈꾸고 있다. ‘역사는 진보하는가’, ‘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 ‘광개토태왕과 한고려의 꿈’, ‘광개토태왕, 생각의 지도를 넓혀라’ 등 25권의 저서와 12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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