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32969

신민부[新民府]

1925년 - 1929년 3월
대표자 : 김혁, 조성환, 김좌진, 이범윤
1925년 (북)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 운동 단체.

북만주 지역의 독립 운동 단체들이 효과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통합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1925년 1월길림성 목릉현(吉林省 穆陵縣)에서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가 개최되고 그해 3월 10일 영안현 영안성(寧安縣寧安城) 내에서 결성되었다.

신민부에는 대한독립군단(김좌진·최호·박두희 등)과 대한독립군정서(김혁·조성환·정신 등) 대표를 주축으로 공산계의 적기단을 제외한 각 단체 대표 및 여러 지역의 민선 대표와 국내 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결성대회에서는 신민부의 창립과 진로를 천명하는 선포문과 기관 명칭·제도·사업 방침·군사·재정·교육·헌장 등 12개항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공화주의와 민족주의를 기본 사상으로 하여 중앙집행위원회(행정기관)·참의원(입법기관)·검사원(사법기관) 등의 근대적인 삼권분립제도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참의원과 검사원은 실제 운영이 어려워 유명무실하였으며 중앙집행위원회가 모든 권력을 관장하였다.

창립 대회에서 선출된 임원은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김혁, 위원 조성환·김좌진 등 9인, 참의원 원장 이범윤(李範允), 참의원 김이윤(金裏潤)·양재헌(梁在憲) 등 15인, 검사원 원장 현천묵(玄天默), 검사원 강규상(姜奎尙)·노호산(盧湖山) 등 10인이다.

신민부는 창립 이후 지방 조직을 확장, 강화하는 한편, 권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약 500여 명의 별동대와 보안대를 편성하여 군사부 위원장 겸 총사령 김좌진의 통솔 하에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 뒤 항일전에 대비할 독립군 양성을 위해 목릉현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속성 교육을 실시, 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함으로써 독립군 간부로 활동하게 하였다. 각 지역에는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여 모든 장정에게 군사 훈련을 시켜 항일전을 준비하고 한편으로는 상비군을 보충하고자 하였다. 때로는 항일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만주의 마적이나 중국 구국군과 제휴하여 한중연합전선을 구축하고 대일전을 전개하고자 한 일도 있었다.

1927년 8월이중삼(李重三) 등 특수 공작대를 국내에 밀파하여 일본 군경의 주둔 배치 조사와 작전 지도를 작성하였고, 수시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여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해림(海林) 지역의 초대 조선인민회장 배두산(裵斗山)의 처형을 비롯하여 북만지역의 친일 단체에 대한 습격, 축출과 친일 반역자를 응징하는 등 무장 활동에 주력하여 부민의 치안을 담당하고 민족운동자들의 활동을 보호하였다.

한편 농촌의 계몽과 교육 및 산업의 발전에도 적극적이었다. 한인 자녀의 의무 교육을 목표로 50여 개의 소학교를 설립하고, 각 마을마다 노동 야간 강습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그리고 1925년 4월 이후 기관지 『신민보(新民報)』를 발행하여 문맹 퇴치와 항일 독립 정신 고취에 힘을 쏟았다. 또한 산업의 진흥을 꾀하여 실업부를 설치하고 공농제(公農制) 실시, 식산조합 및 소비조합 설치, 부업 장려 등을 권장하였다.

그런데 1926년 12월 모연대장(募捐隊長) 황일초(黃一樵) 등이 하얼빈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혔다. 또한 1927년 2월 일본 경찰과 중국군의 습격을 받아 중앙집행위원장 김혁을 비롯하여 유정근(兪正根) 등 많은 중앙 간부가 붙잡히는 불상사가 있기도 하였다.

한편 신민부는 결성 이후 각 분야에 걸쳐 커다란 실적을 올리면서 3부 통합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내부의 갈등으로 1927년 12월 석두하자(石頭河子)총회에서 군정파와 민정파로 대립하고 있었다. 그 뒤 1928년 11월 발생한 빈주사건(賓洲事件)을 계기로 두 개파는 적대관계에 이르게 되었다. 내분의 격화로 신민부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어 갔고 결국 해체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그 뒤 1928년 12월에 해체된 군정파는 그 뒤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의 중심 세력이 되었고, 1929년 3월에 해체된 민정파는 국민부(國民府)에 참여함으로써 신민부는 마침내 와해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재발굴한국독립운동사(再發掘韓國獨立運動史)』 1(한국일보사, 1987)
『독립운동사』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4·5(국사편찬위원회, 1968·1969)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애국동지원호회, 1956)
「신민부(新民府)에 대한 일고찰(一考察)」(박훤, 『역사학보(歷史學報)』 108,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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