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66633

이성계를 흠모하던 정몽주, 왜 돌변했을까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드라마 <정도전>, 네 번째 이야기
14.03.11 10:16 l 최종 업데이트 14.03.11 10:16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정도전>의 정몽주(임호 분) ⓒ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포은 정몽주(1337~1392년)는 이성계와 매우 돈독한 사이다. 고려 개성의 귀족들이 '여진족 구역에서 온 변방의 촌뜨기'라며 이성계를 무시하고 따돌려도 정몽주만큼은 항상 이성계를 두둔하고 지지한다. 훗날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반대하다가 개경 선죽교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그 정몽주가 맞나 싶을 정도다. 

두 사람이 얼마나 친밀한가는,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자 이성계를 가장 많이 닮은 이방원의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드라마 속의 이방원은 정몽주를 숙부라고 부른다. 우리 중 많은 이들에게는, 아버지가 동생처럼 아끼는 친구를 삼촌이라 부른 기억이 있다. 드라마 속의 이방원도 정몽주에게 그런 친밀감을 표시하고 있다. 훗날 아버지의 건국을 반대하는 원흉이라며 정몽주를 암살한 그 이방원이 맞나 싶을 정도다. 

과장이 있기는 있지만, 드라마 속에 표현된 정몽주와 이성계의 관계는 실제 사실을 비교적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정몽주가 이성계를 그토록 좋아한 일은 당시로서는 꽤 대단한 일이었다. 

고려 안에는 여진족이나 거란족 같은 소수민족들이 있었다. 바다의 탐라(제주도)도 완전한 고려의 일원은 아니었다. 그중 여진족은 고려 동북방에 독자적인 자치구역을 갖고 있었다. 이성계는 그런 소수민족 구역의 리더였다. 그런 이성계를 열렬히 따르는 정몽주의 행동은 고려사회의 엘리트들이 보기에는 독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최고의 엘리트인 정몽주가 변방의 비주류에게 그토록 호감을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정몽주가 그렇게 한 것은 무엇보다 그가 소수자를 배려하는 마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더해, 출신 성분도 그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비주류' 이성계를 챙긴 정몽주는 인간성 좋은 사람

정몽주는 이른바 삼장(三場)장원 출신이다. 요즘 말로 하면,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의 1·2·3차 시험에서 연달아 1등을 한 수재였다. 이런 능력에 비해 그의 가문은 초라한 편이었다. 9대조 이래로 그의 조상들은 대체로 한직을 맴돌았다. 그는 능력은 좋지만 이른바 '백'은 약한 인물이었다. 이 점은 정몽주가 이성계 같은 비주류를 따뜻하게 대한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물론 한미한 가문에서 성장한 엘리트라고 하여 반드시 정몽주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집에서 성장한 정치 엘리트가 서민층을 깔아뭉개는 예를 우리는 충분히 경험했다. 하지만, 정몽주는 자기처럼 출신상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이성계에게 호감과 지지를 표시했다. 이 점에서, 그는 인간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인간성이 좋다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역사적 업적을 남기는 것은 아니므로, 정몽주의 인간성에 지나치게 마음을 두지 않았으면 한다. 이것은 다만 정몽주가 이성계를 지지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  드라마 <정도전>의 이성계(유동근 분). ⓒ KBS

정몽주를 이성계 쪽으로 이끈 또 다른 요인은 정몽주의 능력이었다. 이들이 함께 활약한 14세기 후반은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급변하는 시기였다. 몽골초원, 중국대륙, 한반도, 일본열도, 동아시아 해역 전체가 변화의 바람에 휩싸일 때였다. 

이런 시대일수록 외교나 군사 방면의 능력자들이 두각을 보이기 마련이다. 정몽주는 두 방면에서 모두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명나라와 왜국에 사신으로 나가는 한편, 여진족이나 왜구를 토벌하는 전쟁에도 참전했다. 훌륭한 외교관인 그는 전쟁터에서는 훌륭한 참모의 능력을 발휘했다.  

정몽주의 삶을 정확히 표현하면, 외교무대와 전쟁터에 불려다는 신세였다. 능력이 좋다는 이유로 고생을 도맡아 했던 것이다. 그의 문집인 <포은집>에 실린 '여흥루에서 쓰다'라는 시에는 "말 타고 동서로 달리며 대체 무슨 일을 이루었나/가을바람에 황급히 또다시 남쪽으로 간다"란 대목이 있다.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그의 능력 혹은 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바로 이 점이 정몽주와 이성계를 만나게 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다 보니, 이성계가 사는 여진족 구역을 관할하는 중앙군의 참모로도 파견되고 이성계와 함께 왜구 토벌에도 참가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성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정몽주, 50세 넘어서도 이성계를 그리워 해

정몽주의 원래 이름은 몽란이었다. 이것이 나중에 몽룡으로 바뀌고 다시 몽주로 바뀌었다. 정몽주의 아버지가 꿈에서 중국의 대정치가인 주공을 본 뒤에 정몽주가 태어났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중에 몽주로 개명한 것이다. 몽주는 '꿈에서 주공을 봤다'는 뜻이다. 이 이름 속에는 주공 같은 성인을 그리워하며 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데 정몽주는 두 살 위인 이성계에게서 꿈에도 그릴 만한 영웅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성계를 칭송하는 시인 '송헌 이 시중의 화상을 찬미하며'에서 그는 "풍모가 호걸 같으니 꽃동산의 송골매로구나/ 지략이 깊고 웅대하니 남양(南陽)의 용이로다 …… 서책에서 옛 사람의 행적을 찾아봐도 그대와 같은 이는 드물구나"라고 찬미했다. 이성계의 풍모와 지략을 송골매와 용에 비유하면서, 책을 다 뒤져봐도 이런 영웅은 없다고 극찬한 것이다. 

이성계의 관직이 '이 시중'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 이 시는 이성계가 수문하시중이 된 1388년 이후에 지은 시로 보인다. 1388년이면 정몽주가 52세 때로서, 그가 이성계와 정면 대결하기 4년 전이었다. 이것은 결별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몽주가 이성계를 무척 좋아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몽주의 아버지는 주공을 그리워하며 살라고 가르쳤지만, 정몽주는 50이 넘은 나이에도 이성계를 그리워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만약 이성계가 여자였다면, 정몽주는 이성계와 결혼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  경기도 용인시 한국민속촌 안에 있는 충현서원에 모셔진 포은 정몽주의 위패. “포은 정 선생”이라고 쓰여 있다. ⓒ 김종성

이 정도로 이성계를 좋아했기에, 정몽주는 이성계의 쿠데타(위화도회군)도 지지하고 우왕·창왕의 폐위 및 공양왕 옹립도 함께했다. 죽기 직전에 지었다는 '단심가' 즉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란 시조를 무색케 할 정도로, 정몽주는 이성계와 더불어, 엄밀히 말하면, 불충의 길을 거침없이 걸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몽주는 이성계와 힘을 합쳐 이인임·최영·조민수·이색 등의 경쟁자들을 하나씩 그리고 모두 제거했다. 그래서 이성계·정몽주·정도전이 권력의 핵심부를 형성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했다. 이제 고려 천지에는 이들을 능가할 정치세력이 없었다. 

바로 이 순간부터 정몽주는 이성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성계가 왕이 될 가능성이 서서히 생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정몽주는 아주 과감하게 이성계와의 투쟁에 돌입했다. 그는 정도전을 비롯한 이성계의 측근들, 아니 자기의 동지들을 가차 없이 숙청했다. 이때가 고려 멸망 직전이었다. 

이성계의 동지였지만, 존경하지 않았던 '정도전'

정몽주의 시도는 한동안은 성공할 듯이 보였다.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이성계 측을 제압하고 정권을 독차지한 기간도 있었다. 수하에게 철퇴를 쥐어주며 정몽주 암살을 지시한 이방원의 돌발 행동이 없었다면, 정몽주는 이성계마저 제거하고 권력 장악을 공고히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성계의 또 다른 동지인 정도전은 정몽주처럼 이성계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태조실록>에 수록된 '정도전 졸기'에 따르면, 정도전은 술자리에서 툭하면 '이성계가 나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성계를 이용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비유적으로 내뱉곤 했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동지였지만, 이성계를 존경하지는 않았다. 

그에 비하면 정몽주는 이성계를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이성계를 좋아하던 정몽주가 이성계에게 칼을 들이대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이성계 같은 위인은 서책에서도 찾을 수 없다며 이성계를 칭송하던 정몽주가 갑자기 돌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심가'에서 표현한 것처럼, 고려왕조에 대한 일편단심 때문에 이성계를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정몽주도 정도전처럼 이성계를 이용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일까? 이용하려다가 안 되니까 이성계를 죽여 없애려 한 것일까? 오락가락하는 초봄의 날씨처럼, 정몽주의 본심도 추측하기 어려운 과제 중 하나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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