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erc.khu.ac.kr/kor/bbs/bbs_download.php?idx=1914&file_no=1 (문서파일)

동해의 거친 풍랑을 무릅쓴 발해와 일본의 교류

환동해지역연구센터 - 경희대학교 

구난희(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동해를 넘나든 사절들 
 
지난 1997년 12월 31일 오후 2시, 물푸레나무로 만든 길이 15m, 너비 5m의 뗏목 하나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출항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일본. 이들은 1월 23일 일본 근해까지 도착하였으나 심한 악천후를 만나는 탐사 대원 4명 전원은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2005년 1월 19일, 연해주 포시에트 연안에서 일본을 향하는 뗏목탐사가 다시 시도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이 탐사대는 동해안을 표류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뗏목의 대부분이 파손되고 지칠 대로 지친 대원들은 당초의 일본행을 접고 동해항으로 귀환하고 말았다. 왜 이들은 연해주로부터 동해를 건너 일본으로 가는 땟목 탐사에 몸을 실었을까? 탐사 뗏목의 이름은 ‘발해 1300’이었다. 이들은 바로 1300년전 일본을 왕래하던 발해사신들의 웅혼한 기상을 되살려 내고자 했던 것이다. 
 
발해는 공식사절로 일본을 35차례나 방문했고 일본 또한 발해를 14차례 방문했다. 위의 뗏목 탐사 시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양국을 넘나드는 항해는 결코 쉽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양국의 교류관련 기록에는 거듭되는 조난과 표류 사실을 전하고 있다. 
 
어려운 항해 여건에다 229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발해의 존속 기간을 감안해 본다면 47회에 달하는 양국의 교류는 활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기에 양국 교류를 둘러싸고 중대 사건과 크고 작은 에피소드도 다수 전하고 있다. 
 
발해와 일본은 어떻게 동해를 넘나들었을까?
 
발해와 일본에 있어 동해는 장벽이 아니라 서로를 연결해 주는 매개였다. 양국이 동해를 건너기 위해서는 다양한 항해 기술과 자연 조건이 필요로 했는데 계절풍은 항해를 뒷받침해 주는 가장 든든한 요소가 되었다. 발해로부터 일본으로 갈 때는 겨울의 북서 계절풍을 이용했고 역으로 일본에서 발해를 향할 때는 여름의 남동 계절풍을 이용했다. 
 
발해의 출항지는 여러 학설이 있으나 현재의 러시아 연해주 포시에트만이 가장 대표적인 항구로 주목되고 있다. 이 곳은 발해 염주와 인접한 곳이며 염주로 추정되는 크라시키노성에서는 사원유적, 기와 벽실 유구, 석정, 지하창고 등이 발굴되었다. 
 
이 곳을 출발한 발해사신단은 동해를 건넌 후 일본의 동북 해안 지역에 도착하였다. 초기에는 현재의 아키타 주변에 도착하였는데 일본 조정은 이를 꺼려하면서 자신들의 대외 규정에 맞게 큐슈 지역에 도착해 줄 것을 수차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는 양국의 항해 환경상 도저히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였다. 일본 연안에는 동한(쿠로시오) 난류가 북상하고 있기 때문에 발해 지역에서 동해를 건넌 이후 남하하여 큐슈지역에 도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일본 조정은 자신들의 요구가 무리함을 인정하고 발해 사신들이 호쿠리쿠(北陸) 지역에 도착하는 것을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그 지역에 발해사신들을 위한 객원을 조성하였다. 
 
혹자에 따라서는 울릉도 지역을 경유하여 횡단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뚜렷한 근거가 없어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겨 둘 수밖에 없다.
 
동해를 건너 간 발해의 교역품은 어떤 것일까?
 
발해는 고구려보다 훨씬 넓은 지역을 영위한 국가로 다양한 특산물을 보유하고 있었다. 신당서 발해전에는 백두산의 토끼, 남해부의 다시마, 책성부의 된장, 부여부의 사슴, 막힐부의 돼지, 솔빈부의 말, 현주의 마포, 옥주의 면포, 용주의 명주, 위성현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붕어, 환도현의 오얏, 약유현의 배 등이 유명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이 발해와의 교류에서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발해사신이 가져 온 진귀한 산물이었고 특히 발해로부터 가져 온 모피는 일본 귀족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최초로 일본을 방문한 발해사신 고제덕(高齊德)이 전한 물품에는 담비가죽 300장이 포함되어 있다. 이후 발해사신이 일본을 방문하여 교류한 물품에는 반드시 모피가 포함되었고 교류 물품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모피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담비가죽, 곰 가죽, 호랑이 가죽 등이 있었다. 
 
교류 초기에는 모피가 직접적인 판매품이 아니라 답례품으로 서로 주고받았겠지만 이렇게 전달된 모피가 점차 일본 사회에 알려지게 되면서 귀족들의 모피 구매 욕구를 엄청나게 부추겼던 것 같다. 
비록 어느 정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는가에 대하여 정확히 기록된 바는 없지만 모피와 관련된 규정이 발표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연희식(延喜式 : 10세기에 편찬된 법령집)에 보면 ‘담비 가죽은 참의(參議) 이상만 착용하도록한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헤이안(平安)시대의 참의는 정4위하(正4位下)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태정관(太政官)의 고위관직에 속한다. 따라서 이 규정은 담비가죽을 일본 사회의 최고위층에 한해 착용할 수 있도록 제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생각을 확대해 보면 이러한 제한 규정이 명시된다는 것은 당시 많은 귀족들이 모피를 즐겨 착용하였으며 이로 인해 사회문제가 유발되고 있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피를 둘러싸고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도 전하고 있다. 920년 발해사를 환영하는 연회가 풍락원에서 열렸다. 때는 장마철이라 후덥찌근한 날씨였다. 당시 파견되었던 발해사신은 배류(裵璆)였는데 그는 모피 수출국 사신이라는 체면에 걸맞게 담비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연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차림은 시게아키라(重明)친왕의 복장 앞에선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 당시 연회에 참가한 시게아키라 친왕은 가장 고가품에 해당하는 검은 담비 가죽 옷을 8벌이나 겹쳐 있고 참석하였기 때문이다. 무더운 장마철에 모피 8장이라니 상상조차 힘든 일이 아닌가? 모피 구매와 착용을 과시하는 이러한 사례를 볼 때 당시 모피가 얼마나 유행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토록 구매욕구가 높은 고가 상품을 제공한 만큼 발해사절단은 그 반대급부로 많은 물품을 차지하였다. 당시 모피가 어느 정도의 부가 수익을 올렸을까 하는 것을 가늠해 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다만 발해사신 사도몽 개인에게 전달된 물품은 명주 70필, 비단 70필, 명주실 200구, 무명 500둔에다 황금 100냥, 수은 100냥, 금구슬, 수정염주 등이었다고 알려진다. 이를 통해 추산해 보면 모피가 상당한 부가가치를 낳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 인해 823년 고정태(高貞泰), 826년 고승조(高承祖)가 방문했을 당시 후지와라오쯔구(藤原緖嗣)는 발해 사신이란 장사치(商施)에 불과하므로 잦은 내왕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발해사의 방문 횟수를 줄이고자 교섭을 시도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적 의견도 귀족들의 구매욕구를 막을 순 없었다. 사신들이 가져 온 물건은 황실이 직접 구매하였을 뿐만 아니라 귀족들도 직접 사신들과 물품을 거래하였다는 기록이 다수 남아 있다. 이렇듯 모피를 비롯하여 발해로부터 온 산물은 일본귀족들에게 대단한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사신이 가져 온 산물은 모피 이외에도 각종 해산물, 인삼, 꿀 등 다양한 산물이 교류되었다는 사실이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크고 작은 갈등도 있었지만 모두 발해 뜻대로

교류 초기부터 발해는 양국 교류에 있어 유리한 지점을 확보했다. 특히 760년 전후 권력을 장악했던 후지와라나카마로(藤原仲麻呂)는 발해에 송사를 보내고 자신의 집에 발해 사신을 초대하여 영접하는 등 발해 사신들에 대한 든든한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이러한 환대를 둘러싸고 발해가 일본과 연합하여 신라를 침공하고자 했다는 일본학계의 주장도 있었으나 발해가 구체적으로 이러한 계획을 도모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쨌든 발해는 이러한 일본의 관심을 십분 활용하여 자신들의 유리한 지위를 확보해 나갔다. 당시 발해사신의 방문은 모두 일본의 초빙에 의해 이루어졌다. 양승경(楊承慶)은 오노타모리(小野田守)와 함께, 고남신(高南申)은 우치쿠라쓰네젠(內藏全成)과 함께, 왕신복(王新福) 또한 고마노오야마(高麗大山)와 함께 일본으로 갔다. 또한 파견된 사신은 일본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은 뒤 발해로 돌아가는 길엔 반드시 송사(送使)가 동행하고 있었다. 
 
한편 발해는 이렇게 접근해 온 일본을 더욱 든든한 자신의 배후세력으로 삼기 위해 다양한 정보를 일본에 제공해 주었다. 당과의 교섭과 이를 위한 견당사의 안전 입당(入唐)을 알선하는 것도 포함되었지만 이 시기 일본정세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정보는 안사(安史)의 난이었다. 당시 발해는 당에서 일어난 반란 세력이 매우 강성하다는 것을 알리는 동시에 반란세력이 발해에게까지 지원을 요청해 왔으나 슬기롭게 잘 대처했다고 하는 것을 넌지시 전했다. 대륙정세에 대한 위기의식과 자신들의 우수한 상황대처 능력을 동시에 전함으로써 일본으로 하여금 더욱 발해에 밀착하도록 유인하였던 것이다. 
 
이미 백촌강 전투의 패전을 뼈아프게 경험한 일본으로서는 대륙의 불안한 정세가 일본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크게 우려하였다. 당시 안사의 란을 보고 받은 후지와라나까마로는 안록산을 교활하고 미친 자라고 표현하면서 사태가 불리할 경우 해동으로 침범해 올 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을 조장한다. 그리고 안으로는 군사조직의 재편에 박차를 가하고 이를 위한 명분으로 신라침공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와 동시에 밖으로는 당나라에 무기제조에 필요한 소뼈를 전달할 수 있도록 발해에 협조를 구한다. 정보를 제공해 준 발해의 의도대로 일본조정은 과잉 반응을 보이면서 발해와의 교류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던 것 같다. 
 
한편 대륙의 정세 전달을 통해 위기의식과 자신의 우수한 대처 능력을 인지시키는 데 성공한 발해는 더 나아가 자신의 국가적 위상을 일본에 분명히 심어 주었다. 
 
이후 발해는 더욱 확고한 국가적 위상을 표방하고 교류를 주도해 나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때때로 일본과의 마찰을 유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양국의 합의에 의해 원활하게 해결되었고 결과는 언제나 발해의 입장대로 마무리되었다. 
 
771년 일만복(壹萬福)이 이끈 사절단은 325명에 달하는 대규모 파견인데다 국서에는 발해가 천손(天孫)임을 강조하고 발해와 일본의 관계를 구생(舅甥 : 장인과 사위)관계로 규정하여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일단 사태는 일만복 자신은 국서내용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얼버무림으로써 무마되었다. 하지만 다음 번의 오수불(烏須弗) 파견 시에는 다시 양국의 관계를 형제관계로 표현하여 일본 조정과의 또 한 차례 갈등을 야기했다. 비록 발해의 의도대로 일본이 순순히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당시 확고하게 구축되고 있던 발해의 위상을 일본에 전달하였고 일본 또한 이에 대해 일정한 유감을 전달하는 선에서 마무리 된 셈이다. 
 
양국 간에 빚어진 또 다른 갈등은 발해사의 도착지역에 관한 문제였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하였다. 그 밖에도 발해 사신의 방문 제한을 둘러싼 공방도 있었다. 일본은 12년에 한 번씩만 방문해 줄 것을 제안하는 사신을 발해에 파견하고 양국 사이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수차례의 협상이 이루어졌다. 결국 발해 사신의 방문은 기한을 제한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이렇듯 일본과 발해는 몇 차례 갈등도 겪지만 그것이 신라와의 관계처럼 양국 관계 단절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만큼 발해와의 교류는 일본에 많은 혜택을 제공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과연 일본이 발해로부터 제공받은 혜택이란 교역품 이외에 또 어떤 것이 있었을까? 
 
발해와의 교류로 일본 문화 폭 확대
 
양국의 교류는 정치적, 경제적 이익과 욕구 충족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 교류를 통해 상호 교감과 우호를 증진시키고 문화의 폭을 확대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발해사신이 일본을 방문했을 경우 으레 연회가 이루어졌다. 연회에서는 음악과 향연이 이루어졌다. 연회는 대개 음악연주로 시작되었는데 발해사신단에 악사들이 포함되어 파견될 경우는 직접 발해음악을 선보이기도 했다. 740년 이진몽(已珍蒙)의 경우 직접 발해악을 연주하여 일본인들의 관심을 받았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일본의 우치오(內雄)가 발해로 와 발해음악을 배우기도 했다. 1171년 편집된 일본쟁(箏)악보집인 『인지요록(仁智要錄)』고려악편에는 3수의 발해악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대에 입수된 발해음악이 일본 내 궁정악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연회에선 여악이라 불리우는 여성 무용단의 공연도 빼놓을 수 없다. 759년 양승경의귀국에는일본무희 11인이 동행하였고(이들 무희들을 후에 당으로 보내진다.) 883년 배정(裵璆)의 파견 때 이루어진 연회에서는 148명의 여악이 출연한 성대한 연회가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연회에 매우 많은 관심과 정성을 쏟았던 것 같다. 883년 기록에 보면 2월에 발해 사신에게 음악을 관람하도록 하기 위해 린유(林邑) 악인 107인을 다이안지(大安寺)에서 음악을 익히도록 하고 그 식량을 아마토국(大和國)의 세금으로 지급하도록 명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와 함께 양국 문인들간의 한시 교류는 문화 교류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발해측에서는 양태사(楊泰師), 왕효렴(王孝廉), 배정과 같은 당대의 문호들이 사절단에 포함되었다. 일본측에서도 당대의 최대 문사라 할 수 있는 스가와라미치자네, 오에아사쓰네(大江朝網), 시마다타다오미(嶋田忠臣)등이 참여했다. 이들에 의해 교환된 시문은 현재 관가문장(菅家文章) , 문화수려집(文華秀麗集) , 고야잡필집(高野雜筆集) 등 일본의 고대 문집에 수록되어 있어 발해 문학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시마다타다오미는 배정의 시에 크게 감탄하여 칠보지재(七步之才) 즉 일곱 걸음을 걸으면 훌륭한 시를 짓는 천재라고 칭송하였다. 
 
그 밖에도 일본에 큰 영향을 미친 발해 교류의 산물은 바로 선명력(宣明曆)이다. 선명력이란 대음태양력(大陰太陽曆)으로서 1년을 365.2446으로 계산한 역법의 하나였는데 859년 발해대사 오효신(烏孝愼)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다. 발해가 이를 수입한 것은 822년 당으로부터였으며 이후 발해에서는 71년간 사용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발해를 통해 수입한 선명력을 1684년 정향력(貞享曆)이 채용되기 전까지 사용하였으니 무려 82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사용하였다.  그 밖에도 일본에 있어서 발해와의 교류는 당과의 간접적 접촉과 견당 인사들의 연계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절실했다. 발해 사신의 귀환 시 견당 유학생과의 연락이나 동행, 표류한 견당사의 무사 귀환 등 당과의 연결을 중개하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부탁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일본사신을 동행하는 사례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특히 894년 공식적으로 견당사가 폐지되면서 대륙과의 연계는 거의 발해에 의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국 교류를 바라보는 시각 
 
발해와 일본의 교류가 지속된 데는 양국이 처한 정치 경제적 현실에 따른 필요성도 있었지만 상호이해의 자세가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 즉 오고가는 만남을 통해 맺어진 사람들 사이의 깊은 교감과 신뢰가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시시각각 급변하는 국제화 시대, 다양한 교류와 외교능력이 요청되는 오늘날, 동해를 매개로 이어진 양국 외교로부터 일정한 시사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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