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27399461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4>제18대 고국양왕

소수림왕의 사망과 고국양왕의 즉위를 설명하면서, 부여 소식을 안 전했다.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9년(384)에 모용수(慕容垂)가 업을 취하고자 하여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왔다. 옛 부여왕(夫餘王)인 여울(餘蔚)을 영양 태수(榮陽太守)로 삼았다. 창려(昌黎)와 선비(鮮卑)가 무리를 이끌고서 모용수에게 항복함에 미쳐서는 모용수가 여울을 정동장군(征東將軍) 통부좌사마(統府左司馬)로 삼고 부여왕에 봉하였다.

《자치통감》

 

실제 《자치통감》 원문은 읽지 못하고, 드문드문 인용하는 중국 기록들은

대부분 한국고전번역원 제공 고전국역총서 《해동역사》에서 찾고 있다.

나중에 기회 있으면 꼭 원문을 찾아서 바꿔야 될텐데....

난 참 뭐가 이렇게 귀찮고 짜증나는게 많은 거야 참.

 

뭐 아무튼, 여기서 나오는 이 여울, 업성 북쪽 성문을 열어 전진 군사들을 받아들인 그가

부여로 돌아가서 부여왕으로 즉위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책봉하기 이전에 이미 본국에서는 즉위식 다 끝내고 정치에 들어간 상태인 경우가 많아서

아마 지금보다는 좀더 전에 이미 부여왕의 자리에 올라있지 않았을까.

그걸 전제로 하고 이 기사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에 부여왕 여울을 책봉한 것은 모용수, 전진에게 멸망당한 전연의 황족이다.

 

고구려 변경에서만 이런 식으로 후한이 섰다가 조위가 섰다가 서진이 섰다가

전연이 섰다가 전진이 섰다가 다시 후연이 서는 변화가 계속되고 있는건,

당시 중국이 소위 '5호 16국'이라는 분열시대였던 역사 사실에 기인한 것이다.

중국에서야 민족간 갈등 불식시킨답시고 '동진과 16개 나라'라고 가르치고 있다지만,

역시 '5호 16국'이라는 단어가 편하지. 여기서는 전연과 전진을 두고 이야기해야 되겠다.

 

그러니까 전연이 전진에게 망한 것이 서기 370년, 고구려 고국원왕 때의 일인데,

전연의 수도 업성이 부여 왕자 여율과 그 무리(부여와 고구려 포로들)에 의해

전진 군사들에게 던져져서 전연이 멸망하기 전에,

모용황의 아우였던 모용수는 종실 내부의 분란을 피해서 전진에 잠시 망명해 있었다.

그 뒤 전진이 동진을 정벌하는 데에도 참여했지만,

비수 싸움에서 손실을 입지 않고 귀환했고 전진이 약해진 틈을 타서 화베이에서 자립,

소수림왕 말년에 이르러서는 중산을 중심으로 다시 전연을 부활시켰다. 이것이 후연이다.

그리고 부여 왕자 여울은 이때에 이르러 다시 부여왕으로 봉해지게 된 것이다.

 

사실 모용수로서는 전진 군사들을 업성으로 불러들인 장본인인 여울을 쳐죽이고 싶었을 텐데도

그러지 않고 굳이 여울을 살려두었다. 난 중국 사람들 속을 모르니

모용수의 심리를 이해하기 힘들지만, 고구려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부여를 포섭하려고 했다ㅡ고 하기엔 부여는 너무 쇠약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 부여를 후원해서 대체 무슨 이득을 보려고 했던 건지 원.

게다가 이렇게까지 질기게 살아있는 부여라는 나라가 이제 슬슬 지겨워지기도 하고 말이다.

-----------------------------------------------------------------------------------------

 

[故國壤王, 諱伊連, 或云於只支, 小獸林王之弟也. 小獸林王在位十四年薨, 無嗣, 弟伊連卽位.]

고국양왕(故國壤王)의 휘는 이련(伊連)<혹은 어지지(於只支)라고도 하였다.>이고, 소수림왕의 아우이다. 소수림왕이 재위 14년만에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아우 이련이 즉위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양왕

 

고구려 17대 소수림왕, 19대 광개토대왕.

이렇게 좀 묵직한 왕 두분 사이에 샌드위치마냥 끼어 계시다보니

상대적으로 좀 빛이 바랜 분이, 고구려 제18대 이련왕(고국양왕)이시다.

소수림왕의 내정개혁,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대외진출로 이어지는 건널목처럼,

이련왕은 소수림왕의 정책을 보완해 좀더 체계적으로 완성을 시켰달까. 

아무튼 그런 왕이었다. 

 

저기 기록대로, 태왕은 소수림왕의 아우ㅡ고국원왕의 아들이다.

소수림왕에게 아들이 없다보니 아우인 그가 대신 즉위하게 된 것인데,

그냥 뭐 소수림왕의 아우라고만 해놨으니 몇번째 아우인지,

둘 사이에 형제가 또 있었는지 지금 남은 기록에는 안 나오니 알수도 없고....

(뭘 그런 걸 복잡하게 생각을 하냐. 소수림왕의 아우라고만 알아두면 그만이지 뭐)

 

[二年, 夏六月, 王出兵四萬, 襲遼東. 先是, 燕王垂命帶方王佐, 鎭龍城. 佐聞我軍襲遼東, 遣司馬景, 將兵救之. 我軍擊敗之. 遂陷遼東·玄菟,虜男女一萬口而還.]

2년(385) 여름 6월에 왕은 4만 군사를 내어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왕 수(垂)가 대방왕 좌(佐)에게 명하여 용성(龍城)에 나아가 머무르게 하였다. 좌는 우리 군대가 요동을 습격했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景)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우리 군대가 그들을 쳐서 이기고,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양왕

 

선왕이자 형님이신 소수림왕께서 이루어놓으신 내정 개혁을 토대로 해서,

즉위 2년(유년칭원상 원년)에 이르러 연(燕) 즉 후연이 지배하던 요동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후연의 수도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정현(定縣)에 있었는데,

대방왕 모용좌의 부하 학경이 지키고 있던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키고

1만 명이나 되는 남녀를 포로로 잡아서 돌아올 정도의 대승리.

《자치통감》 권106에 실린 호삼성(胡三省)의 주에 의하면,

385년 이후 “후연은 고구려를 능히 이기지 못하였다.”고 할 정도로,

후연에 대하여 상당히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冬十一月, 燕慕容農將兵來侵, 復遼東·玄二郡. 初, 幽·冀流民多來投, 農以范陽龐淵爲遼東太守, 招撫之. 十二月, 地震.]

겨울 11월에 연의 모용농(慕容農)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와서, 요동과 현도의 두 군을 다시 차지했다. 처음에 유주(幽州)와 기주(冀州)의 유랑민들이 많이 투항해 왔으므로, 모용농이 범양(范陽) 사람 방연(龐淵)을 요동태수로 삼아 이들을 불러 위무하게 하였다. 1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양왕 2년(385)

 

하지만 이들한테도 요동이라는 땅은 자기네들 목숨이 걸린 중요한 땅인지라,

고국양왕께서 그때 확보한 요동·현도의 두 군은 386년 다시 후연에 빼앗겼다고 한다.

그 뒤 후연은 선비족의 탁발씨가 세운 위(魏: 북위北魏)와의 싸움에서 계속 패하면서

수도를 중산에서 용산(옛 전연의 수도)으로 다시 옮기면서,

고구려와 직접 충돌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ㅡ라고 했다.

 

[三年, 春正月, 立王子談德爲太子.]

3년(386) 봄 정월에 왕자 담덕(談德)을 태자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양왕

 

나오셨다. 담덕.

고구려 19대 태왕이시며 '영락 시대'라는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끌게 되시는 분.

『광개토태왕릉비』 기록을 따른다면 이때에 그 분 나이가 열한 살.

오늘날로 치면 초등학교 4,5학년 정도려나.

 

[二年, 春, 發國內人年十五歲已上, 設關防. 自靑木嶺, 北距八坤城, 西至於海.]

2년(386) 봄에 나라 안의 나이 15세 이상의 사람을 징발하여 국경을 방비하는 관문[關防]을 설치하였다. 청목령(靑木嶺)에서부터 북쪽으로는 팔곤성(八坤城),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렀다.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진사왕 2년(386)

 

담덕을 태자로 책봉하던 때, 백제는 고구려와의 접경지대에 국경을 방비할 관문을 쌓았다.

청목령은 대체로 지금의 개성 부근으로 보는 데에 이견이 없는데,

팔곤성에 대해서는 《삼국사》에서 어디인지 위치를 모른다고 해서 의문이 들었다.

 

[秋八月, 王發兵, 南伐百濟.]

가을 8월에 왕은 군대를 내어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양왕 3년(386)

 

쳐들어온 건 맞는데, 성공했다는 거야 실패했다는 거야.

 

[冬十月, 桃李華. 牛生馬, 八足二尾.]

겨울 10월에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다. 소가 말을 낳았는데, 발이 여덟 개이고 꼬리가 두 개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양왕 3년(386)

 


<안악 3호분에 그려진 고구려의 외양간 모습. 집집마다 소와 말을 기르고 있었던 것 같다.>

 

소가 말을 낳았다는 것도 이상한 일인데 그게 발이 여덟 개고 꼬리가 두 개라니.

당시에야 사람들이 좀 기이한 일이로다 하고 여겼겠다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환경문제까지 거론될 정도의 중대한(!) 문제가 아닐수 없다.

MBC 보니까 막 주작 날아다니고 백호 날아다니고 그러던데.....

설마... 그 시대에 핵전쟁을 했었나?[퍽!]

 

[秋九月, 與靺鞨戰關彌嶺不捷.]

가을 9월에 말갈(靺鞨)과 관미령(關彌嶺)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진사왕 3년(387)

 

고구려가 선동한 예맥족이 백제의 관미령을 쳤다.

 

[五年, 夏四月, 大旱. 秋八月, 蝗.]

5년(388) 여름 4월에 크게 가물었다. 가을 8월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양왕

 

누리란 즉 메뚜기다.

《구약성경》'출애굽기'에서 신이 이집트에 내렸다는 열 가지 재앙 중에

바로 이 '메뚜기'가 포함되어 있을 만큼, 당시 메뚜기는 엄청난 천재지변이었다.

다 키워놓은 곡식을 수십만 마리의 메뚜기들이 무슨 벌떼처럼 우글우글 몰려들어서

모두 갉아먹어버리니 논이며 밭에 곡식이란 곡식이 죄다 없어질 수밖에.

 

오늘날이야 뭐 살충제도 있고 메뚜기에 강한 벼도 만들고 있다고 한다만

당시에 그런 것이 변변하게 있긴 했겠나.

저 메뚜기들이 부디 오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메뚜기의 피해는 만주 대륙의 고구려에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백제나 신라, 하다못해 고려와 조선조의 기록에까지, 메뚜기의 피해가 여러 차례 기록된다.

 

이 메뚜기들은 도대체 뭘까.....? 

 

[六年, 春, 饑, 人相食, 王發倉賑給. 秋九月, 百濟來侵, 掠南鄙部落而歸.]

6년(389) 봄에 기근이 들어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으므로, 왕은 창고를 열어 먹을 것을 주었다. 가을 9월에 백제가 침입해 와서 남쪽 변경 부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양왕

 

메뚜기가 밭을 휩쓸고 간 이듬해 봄,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의 대기근이 고구려를 덮쳤다.

굶주린 백성들이 동요하여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나라의 창고를 열어서 구호미를 지급하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흉년이 지난 뒤에 행해지던 당연한 수순.

그럼 저들은 흉년 때에도 풍년 때에도 그렇게 그득하게 쌓아놓고

먹고 싶으면 가져다 처먹었단 말인가.

(얘기가 왜 이렇게 되지?)

 

[七年, 秋九月, 百濟遣達率眞嘉謨, 攻破都押城, 虜二百人以歸.]

7년(390) 가을 9월에 백제가 달솔(達率) 진가모(眞嘉謨)를 보내 도압성(都押城)을 쳐부수고[攻破] 200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양왕

 

그리고 가을 9월에는, 메뚜기보다도 더 지겨운 백제의 침공이 있었다.

 

[八年, 春, 遣使新羅修好, 新羅王遣姪實聖爲質.]

8년(391) 봄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우호를 약속하니, 신라왕이 조카 실성(實聖)을 인질로 보냈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양왕

 

이련왕 9년 기사에 대해서는 찝찝한 구석이 없지않다. 

《삼국사》 원전에는 신라에서 실성을 인질로 보낸 것이 이련왕 9년,

(이때 신라에는 내물왕이 즉위해 있었다) 서기로 392년의 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광개토태왕릉비』에 나오는 광개토태왕의 즉위 또한 서기 392년의 일로

《삼국사》가 틀리지 않았다면 고국양왕이 살아있을 때에 그가 즉위했다는 말이 된다.

이련왕의 통치 기간은 《삼국사》에선 9년,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8년이었다고 해서 

1년의 차이가 나는데, 기이하게도 《삼국유사》가 『광개토태왕릉비』 기록과 더 잘 맞는다.

아니,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다. 

 

대개 역사적인 기록을 볼 때에는 그 당대의 사실과 시간적으로 갭(gap)이 적을 수록

신빙성이 높다고 한다. 『광개토태왕릉비』는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남긴 당대의 기록.

시간적으로 천년이라는 갭이 있는 고려 인종 연간의 《삼국사》보다는

아무래도 좀더 정확할 수밖에 없다.(이런 논리를 왜놈들이 참 더럽게 적용해서, 

《삼국사》보다 좀더 일찍 편찬된 《니혼쇼키》가 《삼국사》보다

더 옳은 역사책이라고 말하고 있다만.....) 나야 모르지.

여기저기 책마다 말이 다 조금씩 틀리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많은 자료를 볼수 있다면

이렇게저렇게 가위질하고 풀칠해서 어떻게든 맥을 이어볼수도 있을텐데.

  

오늘날에는 『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된 즉위년 390년에 맞추어

이련왕의 사망이 390년이고, 이련왕 9년의 일로 기록된 이 일들은 모두

광개토태왕 2년, 즉 영락 원년(391)의 일로 이해하고 있다.

 

[三月, 下敎, 崇信佛法求福. 命有司, 立國社, 修宗廟.]

3월에 교서를 내려 불교를 믿어 복을 구하게 하였다. 담당 관청에 명하여 나라의 사직[國社]을 세우고 종묘(宗廟)를 수리하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양왕 8년(391)

 

소수림왕 때에 처음 수용된 불교가, 이련왕 때에 이르면 좀더 권장되기에 이른다.

이 무렵의 동아시아 불교는 대승불교, 소승불교처럼 부처를 '깨달은 자'가 아닌

엄연한 하나의 '신'으로 모시던 때였다. 천주교나 이슬람교처럼,

이 무렵의 동아시아 불교 역시, 석가모니 부처를 '유일신'으로서 모시는 종교.

종교가 하나의 신을 모시듯, 나라에서도 하나의 왕을 모시게 하기 위한 사상적인 배경을

불교는 유교만큼이나 톡톡히 제공했다. 

 

그리고 이련왕 때에 이르러서 선대왕들을 모시는 종묘와 사직을 정비한다. 

이 무렵 고구려의 제사풍속에 대해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면

고구려 5부의 하나인 연나부는 고구려의 왕실과는 관련이 없는,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제사를 지냈다.

지배층의 사상이 서로 나뉘어 있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때 이련왕이 고구려 왕실, 즉 계루부 출신의 고씨 왕계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종묘체계를 수립했다ㅡ고 하는 것이다.

종묘는 고구려 왕실의 선대를 제사지내는 곳이고,

사직은 곡식의 신께 풍년을 기원하는 곳.

 

중국 사람들이 기록해 놓은 고구려의 풍속,

《삼국지》나 《북사》, 《구당서》에는, 고구려 사람은 귀신과 사직,

영성(零星)과 해[日]에 제사지내기를 좋아했고,

10월에 하늘에 제사하기 위하여 동맹이라는 행사를 열었다고 하는 것은 잘 알려진 바다.

(고려 때의 팔관회 같은 거지.)

 

위에서 말했지만 종묘라고 하면 선대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명왕이나 어머니 유화부인의 제사는

종묘에 모시는 대신에 따로 신묘(神廟)라는 것을 두고,

'부여신(扶餘神)'이니 '고등신(高登神)'이니 해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굳이 왕이 졸본까지 행차하시고, 

나라 동쪽의 큰 동굴[穴]에는 수신(隧神)이라는 신을 모셔놓았다가

10월 동맹제 때에는 왕이 그걸 모셔다가 친히 제사를 지냈다고.

 

종묘라는 제도는 원래 중국의 유교 예법에 포함된 건데,

막상 받아들이자니 고구려의 전통에 저촉되는 것이 있었고,

중국식 유교예법과 우리식 전통 제사 예법을 절충하느라,

초대 국왕인 동명왕과 그 어머니 유화는 고래(古來)의 전통 예법으로 신묘를 지어 제사하고,

동명왕 이후의 왕들은 유교식 예법으로 종묘에 위패를 모시게 한 것은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고구려의 전통적인 제의와 불교를 똑같이 정비하고 장려한다.

우리나라에선 저런 사람 어디 없나.

 

[夏五月, 王薨. 葬於故國壤, 號爲故國壤王.]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 고국양(故國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고국양왕이라고 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양왕 8년(391)

 

사실 여러 편 고구려 왕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 자신이 조금 글을 날려쓰지 않나 하는 생각이 글을 쓸 때마다 수차례씩 든다.

간단하다. 내 성격이 쓰기 귀찮아하니까.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생각해도 한눈에

느낌(삘이라고 그러나?)을 안 받으면 누가 내 목에 칼 들이대고 협박해도 안 할 사람이다.

그런 성격에, 또 누가 시키지도 않은 '지랄'을 자발적으로 열'씸'히 하다가도

누가 와서 보고 '멍석'을 깔아주면 또 안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고국양왕의 이야기만 하더라도 솔직히 빨리 광개토태왕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싶어서,

그리고 군대 가기 전에 이런 고구려 역대 국왕들의 이야기들을 빨리 끝내고 가고 싶어서,

되도록이면 '속도'를 내서(좋게 말해 속도지 나쁘게 말하면 거의 건성건성 대충대충 완전 날림)

글을 써내려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보니 고국양왕편에서는 다소 부실해뵈는 느낌을

내가 봐도 지우기가 어렵다.(뭐 나중에라도 건덩건덩 시간 남으면 수정하고 그러겠지만)

 

처음에 말을 했듯이 이 고국양왕이라는 왕은, 사실 형님이신 소수림왕이나 아들인 광개토태왕,

게다가 손자 장수왕의 명성에 가려 상대적으로 빛이 바랜 왕이다.

하지만 고국양왕의 시대에 이르러, 소수림왕의 왕권강화 정책은 좀더 보완이 되었고,

선대 소수림왕이 받아들였던 불교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으며,

나라안에서 여러 귀족들이 독자적으로 행하던 조상숭배와 하늘에 대한 제사 대신,

고구려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종묘와 나라의 사직을 처음으로 정비했다.

그리고 아들인 광개토태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는 '영적 폭발'이라고 봐도 좋을

눈부신 발전을 보이게 된다.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