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gik.ac.kr/~kayakim/nonyo/kngima.htm
"한국의 기마민족설 - 김태식,송규현"의 4장3절 부분만 발췌한 거 같습니다. 여기에 한자를 한글로 바꿨습니다.

제4장 제3절. 일본에 건너갔다는 ‘騎馬民族’의 실체

일본 고훈시대 중기(5세기)에 갑자기 이루어진 문화 격변의 원인을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거기에는 일본열도 주민들의 내부적 문화 수용의 측면보다는 주민 이동을 포함한 외부 문화의 충격이 컸다. 그리고 그들의 성격은 에가미 나미오와 같이 가야에 있던 화북계 기마민족설(華北系 騎馬民族)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최병현과 같이 일부 기마문화(騎馬文化)를 수용하고 있으면서도 농경문화적 또는 보병적 성격을 크게 탈피하지 못한 가야 주민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고 하겠다. 가야 주민들의 이주 계기에 대해서는 최병현과 같이 경주 적석목곽분 세력의 압박과 그로 인한 세력 갈등으로 보는 것과, 신경철과 같이 금관가야의 동요에 따른 것으로 보는 것이 모두 타당하다고 생각되나, 그 직전에 가야와 왜의 타협에 의한 공인(工人)의 원조가 있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5세기 후반 일본 마구의 양식과 전개 과정으로 보아, 가야와 왜 사이의 그러한 전통은 후기 가야에도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은 일본열도에서 어떤 지위에 있게 되었을까? 고고학 자료만으로는 그들의 존재 상태를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문헌 자료를 가지고 이 문제를 비추어 보고자 한다.

815년에 만들어진 일본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기내(畿內)에 살고 있던 씨족(氏族) 1,182씨(氏)를 황별(皇別) 335씨, 신별(神別) 404씨, 제번(諸蕃) 326씨로 나누어 수록했는데, 그 중에 ‘임나(任那)’부에 등장하는 가야계 씨족은 모두 10씨로서, 황별(皇別)이나 신별(神別)과는 물론이고 제번(諸蕃) 중에서도 중국계, 백제계, 고구려계, 신라계에 비해 가장 열세이다. 김은숙(金恩淑)은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보이던 가야계 주민이 ≪신찬성씨록≫에 가장 적은 이유가 가야계로부터 이탈해간 유력씨족들이 있었기 때문이며, 일본 고대 가야계 이주민의 전체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皇別과 神別 및 백제․신라계 씨족 중에서 가야계로부터 이탈해간 씨족을 추출하여 그 이탈 과정을 검토해 보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추가 연구가 이루어진 바는 없고, 또 이를 밝혀내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필자는 앞 절에서 일본 고대 씨족 중에 중국계 이주민을 칭하는 하타씨(秦氏)와 아야씨(漢氏)가 있으며, 秦氏의 조상인 유미즈키노키미(弓月君)과 漢氏의 조상 아치노오미(阿知使主)쯔카노오미(都加使主)로 대표되는 그 주민들은 원래 낙랑, 대방 지역에 살던 옛 고조선 유민과 일부 중국인들인데, 4세기 후반의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전란을 피해 가야 지역으로 왔다가, 얼마 후 오진천황(應神天皇) 시기에 일본으로 이주해 갔음을 살펴보았다. 이들은 그 후 왜국의 중앙 조정 내에서 유력한 귀족으로 살아갔다.

한편 본서의 제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에가미 나미오는 가야인들이 이미 4세기 초에 일본으로 진출하여 한왜 연합왕국을 건설하였고 그 주인공인 스진천황( 崇神天皇)은 아직 김해에 머무르고 있었으며, 그의 후손인 오진천황(應神天皇)은 이미 개척해 둔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동쪽으로 영토를 개척해 나갔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에가미는 이렇게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일본 야마토 정권의 설립자 및 개척자가 바로 가야인이라는 것이 된다. 그러나 후에 이를 찬성하는 연구자를 찾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일본의 건국 신화인 천손강림신화(天孫降臨神話)이다. 그에 따르면, 아마테라스의 아들인 오시호미미(忍穗耳尊)와 다카미무스히의 딸인 다쿠하타치지히메(栲幡千千姬)가 결혼하여 천손(天孫) 니니기노미고토(瓊瓊杵尊)가 태어나, 그가 지상에 강림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1948년에 에가미와 함께 좌담회를 열었던 오카 마사오(岡正雄)은, 일본 신화가 원래 다카미무스히(高皇産靈尊)를 중심으로 하는 다카마가하라(高天原) 신화와 아마테라스(天照大神)를 주(主)로 삼는 두 개의 독립된 신화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양자의 관계를 결론적으로 말하면, 다카미무스히 신화는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에 진입한 천황족(天皇族)에 고유한 종족조신(種族祖神) 신화이고, 아마테라스 신화는 그 이전에 이미 일본열도에 살면서 농업사회를 형성하고 있던 민족의 신화라고 하였다. 진입 종족은 이미 모계모처혼적(母系母處婚的) 농업사회를 영위하고 있던 선주민족(先住民族)과 모처적(母處的) 혼인관계에 들어가 여기서 선주민족의 문화 및 제도의 대부분이 천황족(天皇族) 안에 혼입되었으며, 그 결과 신화에서도 다카미무스히와 아마테라스의 Dualism이 생겨 조신(祖神) 니니기가 그들 자녀의 혼인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게다가 이미 미시나 쇼에(三品彰英)이 분석하고 에가미나미오(江上波夫)나 천관우(千寬宇), 김석형(金錫亨) 등이 중시한 바와 같이,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수로신화(首露神話)와 일본의 천손강림신화(天孫降臨神話) 사이에는 도저히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일치가 있다. 그것은, 첫째, 일본에서도 가야에서도 건국신화에서 국토(國土)를 지배하라는 천손(天神)의 명령에 의하여 그 자손이 강림해왔다는 점, 둘째, 그 때에 일본의 경우 진상복금(眞床覆衾)이라는 직물, 가야에서도 홍폭(紅幅)에 싸여 내려왔다고 되어 있는 점, 셋째, 강림한 땅이 일본에서는 구시후루타케(久士布流多氣), 또는 구시후루노타케(槵触峯), 혹은 구시히(槵日)의 고천수봉(高千穗峯)이라 하고, 가야에서는 구지봉(龜旨峰)이라는 동일 지명인 점 등이다.

이렇게 볼 때, 어떠한 형태로든 간에 전기 가야연맹의 주도적인 나라인 김해(金海) 가락국(駕洛國)의 옛 지배층이 일본열도에 새로이 진입한 천황족(天皇族)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역사학에서 일본 천황족이 과연 가야 유망민이었던가 하는 점을 확인한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일본 건국 신화에는 위에 거론한 바와 같은 가야계의 신화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천부인(天符印) 3개 또는 검(劍), 경(鏡), 옥(玉)의 삼종신보(三種神寶)로 상징되는 것 같은 고조선 단군신화(古朝鮮 檀君神話)의 요소도 들어 있고, 하늘의 이와토신화(岩戶神話)의 모티브와 같은 중국 화남(華南) 묘족(苗族) 등의 요소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일본의 건국 신화로 볼 때, 가야의 옛 주민이 일본열도의 정복자라거나 유일한 지배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김해 가락국의 지배층 일부는 어떤 계기로 인하여 일본열도에 건너가 선주지배족(先住 支配族)과 결합하여 천황족의 일부를 구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럴 만한 지위에 있던 계층이 일본열도로 이주했고 또 일본에 가서도 상당한 정도의 지위를 보유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불가피하게 고국을 떠난 가야 왕족 계통의 유망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럴 만한 계기라면, 400년의 고구려 군대의 남정(南征)과 그로 인한 임나가라(任那加羅)의 몰락이 결정적인 것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와 함께 옛 가야의 지배층을 이루던 고급 기술자나 일반 주민들도 상당수 동행했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낙랑, 대방 지역에 있다가 가야 지역으로 이주한 요동 방면의 한인(漢人)이나 선비족(鮮卑族)도 있을 수 있고 그와 함께 이주한 고조선 유민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선진 문물이나 그 제작 기술과 관련하여 쉽사리 일본의 지배층 안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철 생산, 특정한 금속 가공, 스에키의 생산 등으로 표상되는 5세기 이후 일본 고대 문화의 급속한 발전은 그로 인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또한 그들의 일부는 기마 습속에 익숙하여 마구를 휴대하거나 도입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이주 초기에는 기존 지배층과의 연관 속에 시급한 요소들을 위주로 개발이 이루어졌으며, 기마 습속은 습득하기도 그리 쉽지 않았다. 그 후 5세기 후반의 제2차 도입기에 고령, 합천 등 대가야 계통의 마구가 다량 도입되고 이어서 일본의 기마 풍습이 정착되는 것은, 그들이 일본열도에 안착한 이후에 본토와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주도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에는 대가야의 공인(工人)들이 대거 원조되었다. 이 때 일본열도에 중장기마(重裝騎馬) 전술이 도입되었다기보다는, 일본의 생산성 발전에 따른 사회 분화에 따라 지배층의 자기 과시 성향이 점차 고급화되고 그런 수요가 많아졌다는 것을 반영한다. 유물 상에 나타난 5세기 후반 이후 6세기 초까지 이어진 대가야와 왜국 사이의 활발한 교류로 보아, 5세기 후반 대가야의 발전은 그로 인해 촉진된 측면도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가야 주민의 상당수가 원조공인(援助工人) 또는 유망민(流亡民)의 형태로 4세기 말 5세기 초에 일본열도로 건너갔고, 그들 중의 일부는 천황족(天皇族)을 비롯한 지배층에 혼입(混入)되기도 하였지만, 섣불리 가야가 일본열도를 정복(征服)했다고 하거나, 또는 그들을 기마민족(騎馬民族)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그 후의 역사 전개 상황에 의하여, 일본 고대 문화에 기여한 가야인(加耶人)과 가야문화(加耶文化)의 중요성은 점차 희석되어갔으며, 그에 따라 가야계(加耶系)를 주장하는 씨족들이 8세기 말 9세기 초에는 그처럼 축소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5세기 이후 일본 고대 문화의 혁신적 발전은 加耶系 이주민들에 의하여 촉발되고 한동안 유지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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