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포해전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Once Marine, Ever Marine!)이라는 말이 있다. 해병대 출신이 아니더라도 해병대의 용맹성은 잘 알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통영상륙작전(꼭 취재하고픈 내용)을 시작으로 진동리전투 (본인이 직접 취재한 내용) , 김일성고지 전투, 도솔산 전투에서 승리했고 월남의 짜빈둥에서는 일당백으로 승리한 무적해병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해병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당항포해전(본인이 직접 취재한 내용)에서 패퇴하는 적을 육지로 추격하여 잡았다 하여 경남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남쪽 일대를 "잡안개"라 불렀고 진해시 웅천동에서 펼쳐졌던 웅포해전에서 일부 병력이 육지의 적을 공격하는 척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대규모 상륙작전은 1594년 겨울 이순신장군이 거제도의 장문포 왜성을 공격할 때 있었다. 장문포는 현재의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이다. 1594년 8월(이하 날짜는 모두 양력) 경부터 왜군들의 움직임이 보다 조직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장문포 일대를 중심으로 연안 각 포구마다 집을 짓고 장기간 머무를 준비를 했다.
 
 
곽재우,김덕령,한명련을 승선시키고 온길(지도 검색을 이용하여 작성한 것이라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또 왜 육지가 아니고 거리가 먼(화도)곳에서 승선을 시켰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렇게 되자 도원수 권율 장군이 한산도의 이순신 장군에게 비밀 문건으로 11월 9일에 군사를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11월 9일 아침 이순신은 거북선을 포함한 50여 척의 함선을 동원하여 통영시 화도 앞바다에서 곽재우, 김덕령, 한명련 등 육군장들을 승선시켜 칠천도로 가서 거점을 확보한 후 장문포를 공략하기 시작한다.
11월 11일에 일제히 장문포를 공격하여 적선 2척을 불태웠으나 적은 성문을 굳게 걸고 응전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후 몇일 간 계속 싸움을 걸었으나 응전해 오지 않자 11월 15일에는 이순신은 곽재우, 김덕령 등과 약속한 후 함상에서 수백명의 육전대를 차출하여 상륙작전을 구사했다. 아울러 전선을 장문포로 보내어 포구내를 들락거리며 계속 싸움을 걸게했다. 그날 저녁 나절에 아군이 바다와 육지에서 호응하자 놀란 적들이 갈팡질팡했다는 기록이 있다.


장문포왜성이 있었던 장소(직접 가보지를 못해서 아쉽습니다. 다음에 꼭 직접가서 사진찍어 올리겠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이런 기록은 당시 조선 수군의 육전대에 관한 기록이며 우리 해병대의 효시라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귀신잡는 해병대 전우회는 이 부분을 보다 깊이 있게 연구해 봐야 할 것이다.
글 내용 출처----이순신이 싸운 바다/새로운 사람들 간/ 이봉수 저/ 192쪽 참조

2차 당항포 해전 이후 큰 전투 없이 소강기가 지속되었다. 그런데 이런 전투가 없는 상황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니, 그 초명이 이균이었던 자로서 흔히 선조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선조의 불만은 이순신이 나가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8월 21일에는 영의정 유성룡과 대화를 하면서 이순신이 일을 게으르게 하는 건 아니냐는 말을 한다. 유성룡은 이순신을 변호하지만 선조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9월 3일에는 이순신에게 선조의 밀지가 도착하는데, “수륙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라는 내용이었다. 이 날의 <난중일기>를 보면 다음과 같이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거제시 장목면을 서남에서 북동쪽을 바라본 모습

9월 초3일[무인] 비가 조금 왔다. 새벽에 밀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했지만, 3년 동안 해상에 있어 그럴 리가 만무하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맹세하고 죽음으로써 원수 갚을 뜻으로 날을 보내지만 험고한 곳에 웅거하여 소굴 속에 들어 있는 적이라 경솔히 나가 칠 수는 없는 일이요, 또 더구나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함이 없다」하지 않았는가. 종일 큰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불 밝히고 혼자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국사가 어지럽건만 안으로 건질 길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밤 10시께 흥양이 내가 홀로 앉아 있는 줄을 알고 들어와 자정까지 얘기하다 헤어졌다.

답답하지만 왕의 밀지에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현장에서 거리가 먼 왕은 사정을 몰라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바로 현장에 있으므로 다른 누구보다 수군이 쉽게 출전하지 않는 상황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할 자가 날더러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일도 있었다. 그나마 이순신에게 직접 그런 말을 하면 당당히 자기 의사를 표명한 것이라 생각하겠는데 조정의 대신들에게 편지 등으로 이순신의 험담을 하였던 걸로 보인다. 이순신이 이런 상황을 파악한 것은 유성룡과 병조판서 심충겸이 보낸 편지를 통해서였다. 그런데 대체 누가 그렇게 이순신의 험담을 했더란 말인가? 조선 삼도 연합 수군 중에 그런 일을 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며, 역시 ‘균’이란 이름을 가진, 무능한 주제에 욕심은 많은 경상우수사 원균 뿐이다. 그런 가운데 1594년의 마지막 수군 출동인 장문포 해전이 추진된다.


거제시 장목면을 남에서 북쪽을 바라본 모습

그러나 사실 누구보다도 나가 싸워서 적들을 쓸어버리고 싶은 사람은 선조나 원균이 아니라 이순신이었다. 그러나 나가 싸우려고 해도 적군은 꼭꼭 숨어서 싸우려 들지를 않는데, 폭격기를 탑재한 항공모함이나 순항미사일이 있는 이지스함도 없는 상황에 어떻게 싸우겠는가?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결국 조선 수군의 출전이 계획되니, 이것이 바로 장문포 해전이다.

장문포 해전은 이전의 해전과는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이고 있었다. 이전의 해전들은 이순신의 현장에서의 판단이 위주가 되어 순전히 수군의 완전 주도형 해전이었지만, 장문포 해전은 이와는 달리 통제사 이순신이 아니라 원균의 인척이며 좌의정겸 삼도체찰사인 윤두수가 중심이 되어 추진된 해전이다. 장문포 해전의 건의자도 처음부터 이순신이 아니라 윤두수였다. 여기에 윤두수와 원균의 관계를 고려하면 이순신이 나가지 않고 머뭇거린다고 하던 원균의 건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순신도 이미 전 해 겨울에 거제도에 있는 일본군에 대한 원균의 보고를 받고 봄이 되면 거제도를 포위할 것을 검토하였지만, 군선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철회하였다. 당시의 판옥선은 약 100여척이었는데, 사실 일본 수군은 도저히 상대가 안 될 전력이었지만, 적들이 해전을 기피하고 육지에 은거하는 상황에서는 뭍에 접근하다가 적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더구나 일본 군선에서는 기술상의 문제로 사용하지 못하는 조선군의 노획한 화포를 땅에서는 사용이 가능하고, 만에 하나라도 조선 수군이 전멸하는 날에는 그것은 곧 조선의 멸망위기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순신의 결정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거제시 장목면을 확대한 모습

1594년 9월에 추진된 장문포 해전에 대해서도 이순신의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윤두수가 도착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은 날의 일기에는 “심히 불행한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윤두수에 의해 무리한 작전이 추진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표출된 것이다. 하지만 이에도 불구하고, 9월 19일에는 비변사가 거제도 공략을 주장하는 등 장문포 해전은 본격추진되어 간다.

이런 과정을 거쳐가며 체찰사 윤두수를 주장으로 하며, 수군 판옥선에 의병장 곽재우와 김덕령 등이 육군 천여 명을 이끌고 참가하며, 도원수 권율이 지원하는 장문포 해전이 시작된다.

9월 27일에 출동한 수군은 29일에 거제도 장문포 앞바다에 이른다. 그러나 한산도 대첩과 안골포해전 이후 항상 그랬듯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에 대한 반격을 자제하고,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나오지를 않았다. 그나마 나온 적도 선봉 2척을 무찌르니 땅으로 올라가 더 이상의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날은 빈 배만 깨뜨리고 물러나 칠천량에서 밤을 보낸다.


거제시 장목면을 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본 모습
(장문포해전이 벌어졌던 곳과 칠천량해전이 벌어졌던 곳과 거리차이가 거의 안나죠)

다음날인 10월 1일에도 큰 전투는 없었으나, 일본군이 작은 배를 보내 물에 배를 매려던 조선군 사도 2호선에 불을 던진 일이 있었다. 전면승부는 승산이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조선 수군이 물러나기만 기다리는 것도 어려운지라 이라크 무장단체가 미군을 상대로 게릴라식 공격을 하는 것처럼 소규모 공격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불은 꺼졌으나 경계를 소홀히 한 군관은 처벌을 받았다. 이후 10월 3일까지 별다른 전투가 없는 대치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10월 4일에 이르러 조선군은 다시 공격을 실시한다. 곽재우와 김덕령이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땅으로 상륙을 하고 바다에서 수군이 호응하는 작전이었다. 곽재우와 김덕령은 이 전투에서 해병대가 된 셈이었다. 개전 이후 처음으로 수군과 육군이 합동으로 작전을 한 것이기도 했다. 이는 일본군을 혼란시키기는 했지만 육군이 기대만큼 활약을 해주지 못하여 적군을 바닷가로 몰아내지도 못하였고, 따라서 수군도 적을 섬멸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날의 작전도 별다른 전과도 피해도 없이 종결되었다. 육군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은 일본군이 성에 있는 상황에서는 천여 명이란 군사는 적을 몰아내기에는 부족했다는 점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순신도 이순신이지만 곽재우와 김덕령 역시 이름을 날리던 명장들이기에 일본군이 육지 싸움도 회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이 전투 때문에 이순신의 곽재우와 김덕령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안 좋아지게 되는데, 이는 두 의병장이 진짜 무능해서가 아니라 유일한 이순신과의 합동작전에서 별 활약을 하지 못하고, 게다가 이순신의 인물에 대한 평가기준 자체가 아주 엄격하였다는 이유가 크다.


거제시 장목면을 북에서 남쪽을 바라본 모습


6 일에는 선봉을 장문포로 보내니, 일본군은 패문을 땅에 꽂아 두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 일본이 대명으로 더불어 화친을 의논하는 터이라 싸울 것이 없다.”라는 것이었다. 2차 당항포해전에서 담종인에게 패문을 보내게 요청한 것처럼 자력으로 무찌를 자신이 없는 조선 수군에 대하여 명나라의 권위를 빌려서 전투를 피하고 물러나기를 바랬을 것이다. 이 날 일본군 1명이 투항을 한 것 외에는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일본군은 전투 종반까지 무대응 전술로 일관하여 결국 10월 8일 조선 수군은 한산도로 귀환하였다. 이 전투 이후 사헌부를 비롯한 대간들은 체찰사 윤두수와 권율 이순신 등을 작전실패의 책임을 물어서 탄핵하였다. 하지만 당초 이 작전은 윤두수가 주도하였고, 이 작전에 부정적이었던 이순신은 명령에 따라 출동하였지만 적군이 전혀 대응을 하지 않으니, 전과를 거두고 싶어도 거두지 못한 것이었다. 당초 작전에 참여한 육군도 천여 명 수준이라 수륙합동 작전이란 말이 무색하게 그 인원이 적었다. 행주대첩이나 진주성전투 같은 수성전에서는 소수의 병력으로도 다수의 적을 물리치는 대승리를 할 수도 있었지만 공격자의 입장에서 천여 명은 너무 적은 병력이었다. 그만큼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권율과 이순신에 대한 탄핵은 넘어가고 윤두수만 파직되는 것으로 징계는 마무리되었지만, 그도 얼마 안 가서 군기와 군정을 관장하는 판중추부사에 임명된다.

이 전투 직후 원균은 마치 자신이 시종일관 작전의 중심이었던 양 장계를 올려서 역시나 통제사 이순신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경상 우수사(慶尙右水師) 원균(元均)의 장계에,
“9월 29일부터 10월 2일까지 장문포(場門浦)에 둔거(屯據)한 적세(賊勢)와 접전한 절차에 대해서는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2일 평명(平明)에 다시 장문포에 진격하였는데, 전보다 약간 많아 무려 백여 명이나 된 것이 필시 둔처(屯處)한 왜병을 청원(請援)한 것이었습니다. 세 곳의 높은 봉우리에 모여 있으면서 많은 깃대를 세워놓고 무수히 총을 쏘아댔는데, 우리 병사들이 강개(慷慨)하여 진퇴(進退)하면서 종일토록 접전하다가 어둠을 이용하여 조금 물러나 외질포(外叱浦)에 진을 쳤습니다. 3일 진시(辰時)에 주사(舟師)를 동원하여 적진이 있는 장문포의 강 어귀에 줄지어 세워 놓고 먼저 선봉을 시켜 성(城)에 육박하여 도전하게 하니 적의 무리가 시석(矢石)을 피하여 성안에 숨기도 하고, 혹은 성밖에 땅을 파고서 몸을 숨기기도 하였는데, 그 수효를 알 수 없었습니다. 적이 총을 쏘고 대포도 쏘았는데 그 탄환의 크기가 주먹만 하였고 3백여 보(步)나 멀리 날아왔으며, 화력이 전일보다 갑절이나 더했고 설비(設備)는 매우 흉험(兇險)하였습니다. 적진 근처에 마초(馬草)가 무수히 쌓여 있었으므로 신(臣)은 정예병을 선발하여 수직(守直)하는 왜병을 쏘아 쫓고 불을 질렀는데 타는 불꽃이 밤새도록 하늘에 닿았습니다. 문제는 육병(陸兵)이 아니기 때문에 육지에 있는 적을 주사(舟師)로서는 다시 어떻게 끌어 낼 방법이 없어 매우 통분스러웠습니다.

신(臣)은 다시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육병장(陸兵將) 곽재우(郭再祐),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에게 상의하여 수륙(水陸)으로 합동 공격할 것을 계획하고, 길을 잘 아는 거제(巨濟) 출신 사수(射手) 15명을 뽑아 길잡이를 삼고 신이 거느린 각 선박에 육전(陸戰)을 할 만한 자로서 자원한 31명을 선발해서 곽재우의 지휘를 받도록 하는 일을 단단히 약속하였습니다. 4일 묘시(卯時)에 여러 배로 적진에 돌진해 들어가면서 명화 비전(明火飛箭)을 쏘기도 하고 혹은 현·승자총통(玄勝字銃筒)을 쏘면서 도전하고, 정예선(鄭銳船)을 영등(永登)의 적 소굴에 나누어 보내 서로 들락날락하면서 이쪽저쪽을 공격할 기세를 보여 서로 지원하는 길을 끊도록 하였으나 그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아 섬멸할 길이 없어 분함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육병장 등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에게 가서 직접 형세를 고하고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고서 7일에 돌아갔고, 신 및 주사(舟師)는 그대로 외질포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5일 휴병(休兵)할 때에 신이 거느린 사후선(伺候船)을 장수를 정하여 정심포관(廷深浦串)으로 보내 적병의 동태를 급히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6일 묘시(卯時)에 사후장(伺候將) 원사웅(元士雄)과 조준표(曹俊彪) 등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사후선 4척이 편대를 지어 거제의 오비질포(吾非叱浦)에 도착하여 적선 2척을 만났는데 기를 잡고 돌진해 들어가니 왜적의 반은 이미 육지에 내렸고 배를 지키던 적병도 우리 배가 돌진해 감을 보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수문장(守門將) 김희진(金希進) 등과 있는 힘을 다해 집중사격을 가하자 맞아서 다친 왜병이 상당히 많았는데 배에서 내린 적병 30여 명이 총을 쏘면서 지원을 해와서 수급(首級)을 베어오지는 못하였으며, 적선 2척과 기타 실려있던 잡물(雜物)은 모두 불지르고, 막풍석(莫風席)·물통·낫·도끼·노(櫓) 등은 싣고 왔다.’ 하였습니다. 다시 타다 남은 적선을 가지고 와서 증거품으로 하라고 하였더니, 7일에 돌아와 고하기를 ‘오비질포에 도착하니 왜적 5∼6명이 길을 잃고 바닷가에서 방황하고 있으므로 뭍에 내려 활을 쏘면서 추격하자 적의 무리가 산골짜기로 흩어져 도망을 쳤는데, 그중에 한 명이 다급하게 되자 칼을 풀고 항복하기에 사로잡아 데리고 왔다.’고 하였는데 타다 남은 2척의 적선도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신의 중위장(中衛將)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은 6일에 행군하여 왜적이 숨어 있는 해변에 복병하고 있으면서 출몰하는 것을 엿보아 재빠르게 배를 움직여 돌진해서 1명을 생포해 왔고, 선봉장 웅천 현감(熊川縣監) 이운룡(李雲龍)은 적진에 달려들어가 왜인이 쓴 작은 판(版)을 탈취해 왔는데, 판본(版本)은 통제사 이순신이 있는 곳으로 보냈고, 한산(閑山)으로 돌아가 진을 치고 정신을 가다듬어 사변에 대비하도록 지휘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이미 2차 당항포 해전에서도 통제사 이순신을 무시하고 공을 독차지하려 한 전과가 있는 원균이니, 한번쯤 더 그런다고 이상할 게 없다. 이런 일들로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은 점점 더 깊어진다. 그러나 결코 이순신과 원균은 라이벌 관계가 아니었다. 라이벌이라는 건 실력이 어느 정도 비슷해야 성립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초등학교 축구부 선수가 박주영 선수의 라이벌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순신과 원균의 능력 차이도 박주영과 초등학생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컸다. 그런데 문제는 원균은 그런 주제에 욕심은 엄청나게 많았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의 가장 큰 이유이다.

출처 : KBS 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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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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