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0517090015973


文대통령 "1980년 '서울역 회군' 죄책감..늘 광주에 부채의식"

김태규 입력 2020.05.17. 09:00 


"서울 총학생 회장단, 軍 투입 빌미 제공..결정적 시기에 퇴각"

"광주 시민들 외롭게 계엄군과 맞서..민주화 운동 촉진 계기"


[광주=뉴시스]2017년 제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이 유가족의 사연을 들으며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DB). 2017.05.18.

[광주=뉴시스]2017년 제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이 유가족의 사연을 들으며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DB). 2017.05.18.


[서울=뉴시스]김태규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은 40년 전 민주화 운동을 위해 노력했던 서울지역 각 대학 총학생 회장단이 군부의 투입을 앞두고 해산을 결정했던 이른바 '서울역 대회군' 사건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 선택으로 인한 죄책감이 5·18 이후 대한민국 민주화의 원동력이 됐지만, 당시 민주화 운동권 사이에 형성됐던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은 떨치기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문 대통령은 17일 오전 광주MBC를 통해 공개된 5·18 40주년 특별기획 '문재인 대통령의 오일팔' 인터뷰 영상에서 '문 대통령에게 있어서 광주 시민과 오월 영령들은 어떤 존재였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광주 시민들이 겪는 엄청난 고통을 들으면서 굉장히 큰 죄책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5·18 하루 전날인 1980년 5월17일 당시 경희대 복학생 신분으로 학생운동을 이끌다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서 5·18을 접했다. 당시 자신을 비롯해 민주화 운동을 위해 노력했던 대부분의 대학생이 광주의 아픔을 함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채의식을 죄책감으로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80년 5월 초부터 매일같이 서울역에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모여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 시위를 열었고, 5월15일에는 무려 20만 명이 서울역에 운집을 했었다"고 언급했다.


이어 "그런데 그 상황에서 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소문이 쫙 퍼지자 당시 집회를 이끌고 있던 서울지역 각 대학 총학생 회장단들이 해산을 결정했다"며 "그것을 이른바 '서울역 대회군'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서울역 대회군'의 결정 배경에 대해 "군이 투입될 수 있는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는 명분도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군이 투입되면 아주 희생이 클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상황이 좋아지고 난 이후에 다시 모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런데 나는 그 때 그 결정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며 "나 뿐만 아니라 대체로 복학생 그룹들은 민주화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 군과 맞서는 것이기 때문에 군이 투입되더라도 사즉생의 각오로 맞서야 한다. 그 고비를 넘어야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고 전했다.


[광주=뉴시스]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제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DB). 2017.05.18.

[광주=뉴시스]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제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DB). 2017.05.18.


이어 "그리고 국제사회가 주시를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서울지역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아주 가혹한 진압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어떤 명분이 됐든 당시 총학생 회장단의 시위 철수 결정은 바람직하지 못했다는 게 문 대통령의 인식이다. 위험한 상황에 대한 의도적 회피였든, 상황을 안일하게 인식한 오판 때문이었든 간에 결과적으로 당시 결정으로 인해 광주 시민이 대신 계엄군과 맞서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그때 총학생 회장단의 결정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면서도 "어쨌든 결과적으로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매일 서울역에 모여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집회를 함으로써 결국 군이 투입되는 빌미를 만들어 주고는 결국 결정적인 시기에는 퇴각하는 결정을 내린 것 때문에 광주 시민들이 정말 외롭게 계엄군과 맞서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래서 그 사실에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고, 저뿐만 아니라 광주 지역 바깥에 있던 당시 민주화 운동 세력들 모두가 광주에 대한 어떤 부채의식을 늘 갖고 있었다"며 "그 부채의식이 그 이후 민주화 운동을 더욱 더 확산시키고 촉진시키는 그런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런 점에서 당시 광주 오월 영령들을 비롯한 광주 시민들은 우리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상징과 같은 그런 존재가 됐다"고 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kyustar@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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