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gik.ac.kr/~kayakim/openlec/Gimhae/Gimhae2-4.htm

전기 가야연맹의 해체와 금관국의 복구 및 멸망 과정
 
4세기 후반 임나가라의 팽창으로 인하여 낙동강 동안의 신라는 한동안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5만 대군의 지원을 얻어 가야를 정벌하자, 가야연맹의 중심 세력이었던 임나가라는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5세기 초에 김해 지방의 모든 대형 고분군의 축조는 단절되었으며, 외형상으로도 봉토를 높이 쌓은 고총고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고고학 상의 이런 상태로 보아, 전기 가야의 주축 세력이었던 김해 가락국은 거의 멸망했다고 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김해 예안리 고분군에서는 재지계 토기와 신라계 토기가 혼합되어 다양하게 출토됩니다. 이는 예안리 고분군 축조 세력이 신라의 영향력 아래 들게 되었으면서도,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을 반영합니다.

그러다가 5세기 후반의 시기에 고령 대가야의 발전에 힘입어 김해 지방에도 다시 복구의 기운이 일어났습니다. 이 당시에 고령의 세력이 대가야를 칭하면서 후기 가야연맹을 복구할 때, 금관국(金官國)에 대하여 형제 관계의 명분을 주었기 때문에, 김해를 비롯한 가야 남부 지역은 이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520년대 후반에 대가야와 신라의 동맹이 결렬되면서 가야연맹제국 중의 하나인 밀양-영산 지방의 탁기탄국이 신라에게 정복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야남부 제국은 함안 안라국(安羅國) 중심의 세력 집중을 도모하였으나, 백제군이 그 주변까지 진출하여 전진 기지를 설치하면서 좌절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신라가 장군 이사부(異斯夫)를 보내 금관국에 대한 무력 정벌을 하자, 금관국왕 김구해(金仇亥)는 532년에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신라에게 대항하지 않고 항복을 하였습니다. 신라는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국이었던 금관국이 쉽게 투항해 준 것에 감사하여, 구해왕(구형왕)과 그 일족을 신라 왕족과 같은 진골(眞骨)로 편입하였습니다.

<金泰植>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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