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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1. 발해의 건국 > 1)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과 말갈족의 동향


(1)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유민의 동향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그 유민은 다음과 같이 몇 갈래로 나누어 흩어졌다. 첫째는 당에 의해 중국 내지로 끌려간 이들이다. 당과의 전쟁 기간 중 요동성 등과 같은 당군에 함락된 성의 주민과, 고구려 멸망 직전 男生이 이끌고 당에 투항한 국내성 일대의 주민들은 당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보다 대규모 이주는 평양성 함락 직후에 행해졌다. 당은 고구려인의 저항을 봉쇄하기 위하여 669년 2만 8천여 호의 고구려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 때 주된 대상이 된 이들은 평양 일대와 요동지역의 주민들로서, 고구려 상층부에 속하는 豪强(호강)한 민호들이었다. 당에 끌려간 고구려인들은 요서의 營州지역·회하유역의 황무지·甘肅省(감숙성) 회랑지역·黃河(황하) 상류지역 등지에 분산 정착되어졌다. 감숙성지역에 끌려간 이들은 그 뒤 이 지역 지방군의 유력한 병력원이 되기도 하였는데, 유명한 高仙芝(고선지)장군은 바로 그 좋은 예이다. 그리고 왕족과 귀족들은 주로 당의 수도지역에 幽居(유거)되었다.


둘째는 신라로 넘어간 이들이다. 당의 지배에 저항한 고구려유민들의 부흥운동은 평양성이 함락된 이듬해부터 일어났다. 평양지역에서는 劍牟岑(검모잠)이 봉기하여 귀족 安勝(안승)을 옹립한 뒤 당군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안승과 검모잠간의 알력과 당군의 압박으로 내분이 생겨,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넘어갔다. 이 외에도 고구려 남부지역에서 부흥운동군이 당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673년 호로하전투 등에서 패배한 뒤 신라로 넘어갔고 평양 일대의 주민 다수도 함께 신라로 갔다001). 이후에도 평양 이남지역과 예성강유역 일대는 신라군과 당군간의 전쟁의 주된 무대가 되었다. 그에 따라 이 지역 주민들의 대부분이 신라로 가니 평양 일대는 황폐화되어 갔다.


셋째는 요동지역에 계속 거주하였던 이들이다. 요동 일대는 598년 이래로 고구려와 수·당간의 전쟁의 주된 무대로서 전쟁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은 지역이다. 669년에는 당에 의해 이 지역 주민의 상당수가 중국으로 강제 이주되었고, 그런 당의 폭거에 대한 저항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의 고구려 부흥운동은 671년 安市城(안시성)의 함락을 고비로 종식되었다. 한편 676년 당은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를 이곳으로 옮긴 후, 남생을 도호부의 관리로 파견하고002), 寶藏王(보장왕)과 일부 유민을 귀환시키는 등 이 지역의 안정과 지배권 확립을 위한 일련의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보장왕이 反唐(반당) 모의를 하자 재차 그와 일부 유민을 당 내지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당의 지배에 불복하여 이 지역 고구려인의 다수는 신라와 돌궐 및 동부 만주지역으로 이탈해갔다.003) 그에 따라 안동도호부 관내의 요동지역에는 소수의 빈약한 戶口(호구)만이 남게 되었다. 요동지역에 대한 당의 지배력은 8세기 중반까지 유지되다가, 安祿山(안녹산)의 난 이후 이 지역의 고구려인들은 점차 자립해가는 형세를 나타냈다. 그것이 이른바 小高句麗國(소고구려국)이다. 그러나 소고구려국은 곧이어 8세기 초반 발해의 宣王(선왕)대에 발해의 세력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004)


넷째는 고구려의 서북부지역인 요동과 부여성 일대에 거주하던 이들로서, 몽고고원 방면으로 이주해간 집단이다. 몽고고원으로 이주한 고구려인들은 돌궐의 可汗(카간/가한)의 휘하에서 몇몇 집단으로 나뉘어져 자치를 영위하였다. 그 중 黙綴可汗(묵철가한/카파간 카간)의 사위가 된 高文簡(고문간)의 경우 ‘高麗王 莫離支’(고려왕 막리지)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이들 집단 중 일부는 8세기 전반에 다시 돌궐을 이탈하여 당으로 넘어가기도 하였다.005)


다섯째는 동부 만주의 고구려인들이다. 동만주지역은 직접 전쟁의 무대가 된 곳은 아니었으며, 668년 후 당의 지배 영역에 실제상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지역의 고구려인과 말갈족이 고구려군의 주요 병력원이었던 만큼, 오랜 전란과 망국의 여파는 이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두만강유역과 길림 등지와 같이 고구려의 주요 성이 있었던 곳에는 고구려인들이 많이 살았지만, 그 외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주민의 다수가 말갈족이었다. 광대한 지역에 걸쳐 말갈족 사이에 산재하여 고구려의 지배조직과 연관을 가지며 생활하고 있던 고구려인들은 기존 정치조직이 해체되고, 말갈족이 크게 동요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종전의 우월한 위치를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간의 횡적 연대를 맺어 새로 통합된 정치조직을 형성하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따라서 이 지역의 고구려인들은 말갈족 사이에 산재하여 고립된 생활을 영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006)


7세기 후반 동만주지역에서 있었던 또 하나의 큰 변화는 많은 수의 고구려인들이 이 지역으로 유입된 사실이다. 전란의 와중에서 그리고 당의 압제를 피하여 원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서·남부지역에서 많은 유민들이 흘러 들어왔다. 이들은 대규모 집단으로 조직적 이주를 해온 것이 아니라, ‘散奔’(산분)007)이라는 표현처럼 소규모로 각 방면에서 간헐적으로 이주해와 각지에 분산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668년 이후 서·남부지역의 상층부 호강한 민호의 다수는 당에 강제 이주되었거나 부흥운동의 주력이 되었기 때문에, 동으로 이주해온 이들은 기존의 빈약한 호구나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호들이 다수였다고 여겨진다. 자신들의 생활 터전을 박탈당하고 기존 조직이 와해된 채로 뿔뿔이 각처에 散居(산거)한 이들 유민들이 곧 어떤 조직적인 세력으로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전란을 피하여 혹은 생존을 위하여 각지에 은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두 세대가 흘러 전란의 상흔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동만주 신개척지에서 그들의 우월한 생산기술로 생활의 터전을 다져나갈 때, 그들은 이 지역의 새로운 활력소와 변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 이주해온 유민들은 당과의 격렬한 투쟁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인으로서의 강한 自意識(자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동만주지역에는 말갈족이 주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월한 문물과 빛나는 역사를 지녔고 얼마전까지도 이들 말갈족을 지배하여 왔던 고구려유민들은 자연 수적인 열세 속에서 그러한 자의식을 더욱 강하게 느꼈을 법하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유민집단의 정치적 움직임이 있으면 그들간에 쉽게 결합할 수 있는 내적 응집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요소들이 구체적인 정치세력으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광대한 동만주지역의 각지에 산재해 있는 소수의 고구려유민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새로운 힘의 구심점이 필요했으나 이 지역에서는 아직 형성되지 못하였다.



001) ≪舊唐書≫권 5, 本紀 5, 高宗 下 咸亨 4년 윤5월 정묘.

002) <泉男生墓誌銘>(≪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2), 495쪽.

≪新唐書≫권 110, 列傳 35, 泉男生.

003) ≪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高麗.

004) 盧泰敦,<高句麗遺民史硏究-遼東·唐內地 및 突厥方面의 集團을 중심으로-> (≪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005) 위와 같음.

006) 盧泰敦,<渤海 建國의 背景>(≪大丘史學≫19, 1981).

007) ≪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高麗.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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