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daum.net/hampjmh/5752680

함께하는 자치통감의 산책-"고구려"라는 명칭의 유래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하드라마 ' 연개소문'의 자문역을 맡은 권중달입니다. sbs에서 제가 쓸 칼럼란을 만들어서 부담이 되기도 하고, 많은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여 기대 되는 바도 있으니 걱정반 기대 반인 셈입니다.
저의 전공은 중국사이고, 최근 10여년 동안 자치통감의 번역을 진행해 왔던 점을 이용하여 시청자들에게 중국측의 입장을 사료로 보여 주는 작업을 해 보려고 하며 주로 자치통감의 원문을 해석한 것을 올리고 이에 대한 해설을 해 볼 생각입니다.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손으로 쓴 고구려사를 알 수 있는 자료의 부족이 심각합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쓴 자료를 이용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중국인은 그들 나름의 시각이 있고, 우리는 우리 나름의 시각이 있습니다. 이 두 시각을 균형있게 살피는 것은 세계인이 되는 첫 걸음이지요.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주몽이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중국으로 보면 전한 원제 건소 2년입니다.  그러나 이 때에 고구려 건국기사는 자치통감에 실려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보다 46년 뒤인 왕망 시건국 원년(서기 9)에 漢왕조라는 국호를 버리고 新이라는 국호를 채택합니다.  왕망은 자기가 건국하는 정당성을 천하에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 왕망은 하늘의 뜻을 보이는 것이라는 42개의 符命을 알리려고 王奇 등 12명의 五威將을  천하에 파견하였는데, 그 가운데 동쪽으로 간 사람은 현토, 낙랑,  고구려, 부여까지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후한서를 쓴 범엽은 전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縣으로 삼아서 현토에 속하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로 보아서는 고구려라는 명칭은 기원전 37년 이전에도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고구려 현에는 다섯개의 부가 있고, 요동의 동쪽으로 1,000여리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도 高句麗도 高句驢(나귀 려)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고구려라는 명칭은 그들이 말을 잘 다루었던 생활과 관습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후에 오면서 驪는 麗로 바뀝니다. 아마도 국호를 관습에 의하여 사용하던 것이 국력이 신장되면서 발음은 같지만 보다 아름다운 명칭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 같습니다.
 
각설하고, 왕망은 그 3년 뒤인 시건국 4년(서기12)에 고구려 병사를 징발하여 흉노를 공격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았고 요서 大尹까지 죽였습니다.  대윤은 태수를 왕망이 바꾸어 부른 명칭입니다. 엄우(嚴尤)라는 사람이 왕망에게 고구려를 달래라고 하였으나 망왕은 말을 듣지 않았으며, 고구려 侯인 騶를 유인하여 죽이기도 하는군요. 그리고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驪)라고 고쳐 부르는 짓을 하자 예맥 사람들이 크게 반발하여 중국의 동북쪽이 모두 어지러워 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전쟁기사에서는 기록자의 입장에서는 자기편의 승리를 과장하고 상대편의 전공을 적게 기록하는 법입니다. 고구려나 예맥이 왕망의 新을 공격하여 동북쪽이 어지러워졌다는 것은 고구려가 대단히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후한 광무제 건무 3년(계사 서기 33년)부터 측천무후 천수(天授) 1년(경인, 691년)까지 약 660년 동안의 기록은 고구려 초기부터 멸망 후20∼30년 되는 시점까지이며 이에 해당하는 자치통감에 기록된 기사는 모두 기사는 166개입니다. 차례로 소개해 볼 생각이며 시청자들과 이 기사를 놓고 토론해 보면 더욱 흥미가 있을 듯 합니다. 자문위원이라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고 해석에도 여러 시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토론은 필요할 것 같군요.
 
[[권중달/중앙대 교수·동아시아사, 한국사학사학회 회장, SBS드라마 연개소문 자문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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