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24687

'고려 충신' 하륜은 왜 이방원 참모가 됐나
[김종성의 참모열전④] 하륜 1부
13.11.12 08:20 l 최종 업데이트 13.11.12 08:20 l 김종성(qqqkim2000)

고려 공민왕 때 보수파에 맞서서 떠오른 개혁파 사대부 그룹. 이들은 신진사대부로 불린다. 이 중에서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급진파는 새 왕조 창업을 추진했고, 정몽주로 대표되는 온건파는 고려왕조의 간판을 유지하고자 했다. 

양쪽의 운명은 1392년 조선 건국과 함께 갈렸다. 정확히 표현하면 '조선 건국과 함께 갈리는 것처럼 보였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건국 이후 6년간은 급진파가 권력을 잡았지만, 태조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이 정도전 정권을 무너뜨린 제1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온건파가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온건파는 동북면 무인 세력(이성계 가문의 군사적 기반) 및 고려시대 보수파와 손잡고 이방원 정권의 핵심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바로 이 온건파 신진사대부의 일원으로서 이방원의 참모가 된 인물이 하륜이다. 하륜은 정도전처럼 팔방미인 스타일 즉 르네상스형(型) 참모였다. 정통 선비들이 볼 때, 이들은 '쓸데없는 학문'까지 하는 사람들이었다. 정도전은 문학·역사·철학 외에 도시공학·군사학·법률 등에까지 관심을 기울였고, 하륜은 문·사·철 외에 관상학·풍수학 등에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좋게 말하면 박학다식하고, 나쁘게 말하면 '잡학다식'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하륜의 경우에는, 관상학과 풍수학이 그를 정치적 위기에서 구하는 은인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의 잡학다식이 어떻게 그를 살렸는지는 이 시리즈에서 다시 설명될 것이다. 

외교적 분쟁을 교묘하게 처리한 하륜 

▲  고려 말기 관료의 모습. ⓒ 김종성

하륜은 정해년인 고려 충목왕 3년 12월 22일(음력) 즉 1348년 1월 22일(양력)에 태어났다. 대부분의 백과사전에서는 하륜이 1347년에 태어났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것은 정해년이 1347년과 1348년 양쪽에 모두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탓이다. 정해년은 1347년 2월 11일부터 1348년 1월 30일까지이므로, 같은 정해년에 태어난 사람일지라도 어떤 사람은 1347년 생이 되고 어떤 사람은 1348년 생이 된다.  

하륜이 태어난 1348년은 고려왕조가 무너지기 44년 전이었다. 그의 '라이벌'인 정도전은 이 해에 일곱 살이었다. 물론 정도전은 하륜을 라이벌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도전은 하륜의 주군인 이방원도 라이벌로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다.  

하륜이 태어난 곳은 지금의 경남 진주다. 정씨·강씨·소씨와 더불어 진주 토착세력을 형성한 하씨 집안은 지역에서는 기반을 잡았지만, 중앙 정계에서는 오래도록 기반을 잡지 못했다. 이 집안은 하륜 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중앙 권세가의 반열에 올라선다. 

하륜은 초년 운세가 좋은 편이었다. 열세 살 때인 1360년에는 국립대학 입학시험인 국자감시에 합격했다. 이것은 조선시대로 치면 진사 선발시험(문장력 테스트)이나 생원 선발시험(경전 이해력 테스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성균관에 입학한 것과 같았다. 한마디로 전도유망한 코스였다. 

진주 토착세력인 가문의 지원, 어릴 때부터 잘 풀린 운세에 더해 그의 출세에 큰 영향을 준 요인이 있다. 그것은 그의 문제해결 능력이었다. 이 점은 훗날 관료가 된 이후에 그가 보여준 행적에서도 잘 드러난다. <고려사> '신우(우왕) 열전' 및 '임견미 열전'에 따르면, 하륜은 37세 때인 1384년에 외교적 분쟁을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해결했다. 

공민왕이 반몽골(반원) 노선을 천명한 뒤에도 고려는 명나라와 북원(北元, 몽골 잔존세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명나라 측은 북원 사신의 고려 왕래를 막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그러자 고려 조정은 북청만호인 김득경에게 명나라 군대를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김득경의 작전이 성공하자 명나라에서는 항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고려 조정은 김득경에게 "너 혼자 알아서 한 일이라고 말하라"고 요구했다. 고려 조정과는 무관하게 단독으로 벌인 일이라고 해명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김득경이 이 요구를 거절하자 고려 조정은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때, 하륜의 아이디어가 상황을 '깔끔'하게 종료시켰다. 고려 조정은 하륜이 낸 아이디어에 따라, 왜구를 가장한 자객을 보내서 김득경을 암살했다. 고려 조정이 김득경에게 책임을 떠넘긴 상태에서 일본 해적들이 김득경을 죽인 것처럼 사건이 처리되자, 고려와 명나라는 더 이상 얼굴 붉힐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것은 하륜이 책사 혹은 책략가의 기질을 과시한 사례였다.  


▲  이방원의 무덤인 헌릉.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의 국가정보원 옆에 있다. ⓒ 김종성

가문과 운세와 두뇌에 더해, 하륜의 양 날개에 '윤활유'를 발라준 것이 있었다. 열여덟 살 때인 1365년에 하륜의 두 날개에 각각 윤활유가 지급된다. 이 해에 하륜은 과거시험 문과에 급제했다. 이때의 시험관이 이색과 이인복이었다는 점은 하륜에게는 일대 행운이었다. 

시험관이란 존재는 오늘날의 수험생에게는 커닝이나 잡아내는 호랑이일지도 모르지만, 당시의 수험생에게는 합격 후에 평생토록 사제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어떤 시험관을 만나느냐'도 과거급제 이후의 행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시험관인 이색은 정도전·정몽주 같은 신진사대부들의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이색과의 인연은 하륜이 개혁파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태종실록>에 수록된 '하륜 졸기'에 따르면, 또 다른 시험관인 이인복은 하륜에게 첫눈에 반해 동생인 이인미의 딸과 결혼시켰다. 이인복의 또 다른 동생인 이인임은 9년 뒤에 출현한 우왕 정권의 최고 실세였다. 이인복과의 인연은 하륜을 보수파 실력자 이인임의 조카사위로 만들었다. 이로써 하륜은 보수파와도 깊은 인연을 갖게 되었다. 

이런 요인들은 하륜의 인생이 탄탄대로를 달리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그가 신진사대부 내에서 온건파가 되도록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고려를 개혁하는 것은 좋지만 고려를 없애는 것은 불리했기 때문이다. 

사실, 하륜은 고난을 감내하면서까지 왕조에 충성할 사람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고려에 충성을 바칠 것처럼 행동했지만 막상 조선이 세워지자 이방원을 열렬히 지지했다는 점, 이방원이 왕이 된 뒤에 부정축재로 이름을 날릴 정도로 물질에 대한 욕심이 컸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하륜은 결코 고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륜의 충성심은 매우 유동적인 것이었다. 고려왕조 하에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점, 보수파 이인임이 인척이라는 점 등 때문에 고려에 대한 충절을 표방했던 것이다. 하륜은 고려왕조와 이인임 정권이 영원하리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륜이 볼 때, 이인임 정권에 대항했다가 유배 및 야인 생활로 전락한 정도전의 행보는 주된 관심거리였을지도 모른다. 정도전의 능력은 이인임 정권에서도 인정하고 있었다. 어쩌면 하륜은 '왜 저만한 능력을 갖고 저렇게 살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하륜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마흔한 살 때인 1388년에 최영과 이성계가 손잡고 이인임 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 이성계의 배후에는, 이미 1383년부터 이성계 캠프에 가담한 정도전이 버티고 있었다. 이런 뜻밖의 상황 전개와 함께, 하륜은 구(舊)정권 인사로 몰려 곤장을 맞고 유배를 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같은 해에 벌어진 위화도 회군(이성계 쿠데타)은 하륜에게 극전인 반전의 기회를 줄 듯했다. 요동(만주) 정벌을 반대하는 하륜의 입장이 이성계의 쿠데타 명분과 일치했기 때문에,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이성계 공동정권이 무너지고 조민수-이성계 공동정권이 성립한 뒤에 하륜은 다시 정계로 돌아갔다. 

하지만, 복귀한 뒤로도 하륜의 삶은 계속 가시밭길이었다. 인척인 이인임이 무너지는 순간부터 그는 이미 권력의 주변부로 내몰린 신세였다. 조-이 정권 하에서 정계에 복귀한 뒤에도 그는 또다시 유배를 당했다. 40줄에 들어선 하륜은 생전 처음으로 고난이란 것을 겪게 된 셈이다. 

하륜의 썩은 동아줄 정몽주, 그러나... 

▲  정몽주 동상. 서울시 양화대교 북단(합정동 쪽)에 있다. ⓒ 김종성

마흔 살 때부터 인생이 꼬이기만 하던 하륜에게 고려 멸망 전년도인 1391년(44세)에 기적처럼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다. 하륜은 그것을 잡았다. 그는 그것이 튼튼하리라 믿었다. 그 동아줄은 바로 정몽주였다. 정몽주는 이성계·정도전에 맞서 신왕조 창립을 저지하고자 하륜을 자기편에 끌어들였다. 

하륜의 머리 위에서 하늘이 다시 환해지는 것 같았지만, 얼마 안 있어 먹구름이 그의 머리 위를 덮었다. 고려가 망한 연도인 1392년에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당한 틈을 타서 정몽주가 정도전을 비롯한 이성계 계파를 숙청하는 듯했지만,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철퇴로 정몽주를 죽이는 바람에 하륜의 동아줄은 끊어지고 만다. 그가 잡은 줄은 썩은 동아줄이었던 셈이다. 

하륜이 믿었던 정몽주가 암살을 당한 뒤에 곧바로 조선이 세워졌으니, 하륜은 조선왕조를 원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이방원 역시 원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하륜에게는 빠져나갈 틈새가 있었다. 그것은 하륜의 동아줄을 끊어버린 이방원과의 인연이었다. 

하륜과 이방원의 인연이 생긴 데는 하륜의 '잡학다식'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관상 보는 기술이 이방원과의 인연을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2부에서 계속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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