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27302

이방원이 주목받게 된 건 '관상' 때문이었다
[참모열전⑤ 하륜 2부] 관상가이자 책략가인 하륜의 선택
13.11.20 13:12 l 최종 업데이트 13.11.20 13:12 l 김종성(qqqkim2000)

▲  영화 <관상> 포스터. ⓒ 주피터 필름

영화 <관상>에서 주인공 내경(송강호 분)은 왕으로부터 수양대군(이정재 분) 등 신하 중에서 역모를 꾸미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라는 명을 받는다. 

하지만 내경은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수양대군의 실물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내경은 수양대군이 보낸 가짜 수양대군의 관상을 보고 '역모를 꾸밀 재목이 못 된다'고 판단했다. 결국 내경은 이로 인해 참혹한 수난을 겪게 된다. 

영화 <관상>은 허구를 소재로 한 픽션이지만, 관상과 얽힌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이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하륜이다. 그는 유학만을 공부하는 일반 선비들과 달리 관상학과 풍수학까지 두루 공부했다. 덕분에 그는 훗날 조선 태종이 될 이방원과 인연을 맺었고, 이것이 계기가 돼 조선 왕조에서 절정의 권력을 구가했다. 

'고려가 계속될 것인가(1번) 새 왕조가 나올 것인가(2번)'의 갈림길에서 하륜은 1번에 '베팅'을 했다. 2번에 베팅한 사람들이 권력과 재산을 거머쥐게 되면서, 그는 정치무대 저편으로 밀려났다. 그랬던 그가 금방 컴백한 데는 관상학이 톡톡히 한몫을 했다.

하륜이 이방원에게 주목한 이유  

<태종실록>의 서언에 따르면, 고려 멸망 직전에 하륜은 이방원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방원의 관상이 특이하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처럼 융준용안(隆準龍顔)의 형상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참고로, 준(準)이 얼굴 부위와 관련해서 사용될 때는 '절'로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융준용안은 융절용안으로도 읽을 수 있다. 

융준용안은 중국 한나라 역사서인 <한서>의 '고조 본기'에 나온다. 여기서는 한나라 고조인 유방을 두고 "콧마루가 높고 미우(眉宇, 눈썹 부근의 이마)가 용 같으며, 수염이 아름답고 왼쪽 넓적다리에 72개의 흑점이 있었다"고 했다. '콧마루가 높고 미우가 용 같다'는 부분이 융준용안에 해당한다. 안(顔)은 흔히 얼굴을 가리키지만, 관상학에서는 이마를 가리키기도 한다. 

하륜은 이방원도 융준용안의 관상을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방원의 코와 이마가 정확히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관상학의 고전 중 하나인 <마의상법>을 통해 대략적이나마 유추해볼 수는 있다. 


▲  얼굴 부위를 가리키는 관상학 용어. ⓒ 김종성

<마의상법>에서는 "코가 높아서 우러러볼 만하면 관직 생활이 영화롭게 되고, 코 위에서 광택이 나면 집안에 부귀가 가득찰 것"이라고 했다. <마의상법>의 내용을 정리하면, 콧대가 솟은 상태에서 콧구멍이 보이지 않으며 준두(코끝)가 둥글고 홍색을 띠어야 하며, 산근(코뿌리, 양 눈 사이)이 너무 푹 패지 않으면서 이마까지 잘 이어져야 좋다고 했다. 

이방원의 코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대체로 이와 유사한 느낌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또 미우가 용 같다고 한 걸 볼 때, 이방원의 이마는 적당히 넓고 뼈대가 솟은 듯한 느낌을 주면서 눈썹 바로 윗부분이 용이 꿈틀대는 듯한 느낌을 주었을 수도 있다.

만약 이방원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하륜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려 멸망 4년 전인 1388년부터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의 아들이 그런 관상을 갖고 있다니, 하륜으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듯하다. 이걸 명분으로 이성계 쪽과도 인연을 맺어두고 싶었는지, 하륜은 이방원의 장인인 민제에게 부탁해서 이방원과의 만남을 성사시킨다. 

<태종실록>의 서언에 따르면, 하륜은 민제에게 "제가 관상을 많이 봤지만, 사위 분과 같은 관상은 못 봤거든요"라면서 "제가 꼭 한번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하륜과 이방원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때가 대체로 1390년 이전으로 추정되므로, 만남 당시의 하륜은 마흔세 살 이전, 이방원은 스물네 살 이전이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하륜은 당연히 이방원의 관상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부모자식 같은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긴밀한 친분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하륜은 이성계의 정치노선을 반대하면서도 관상학을 무기로 이성계의 아들과 친분을 쌓아두었다. 영화 <관상>의 내경이 이 모습을 봤다면, "저렇게 살아야 화를 면할 수 있거늘, 내 신세는 왜 이 모양인가!"라며 한탄하지 않았을까.

이방원과의 인연이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이 세워지고 정치무대에서 밀려난 지 1년 만인 1393년에 하륜은 정계에 복귀한다. 이성계 진영은 새 왕조를 세우긴 했지만, 아직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1번'에 베팅한 사람들에게도 '배당금'을 주고 회유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하륜은 경기좌도관찰출척사라는 배당금을 받고 복귀했다. 관찰출척사는 관찰사와 같은 표현이다. 

이렇게 하륜은 고위직 지방관이 되어 조선왕조에 투신했다. 그가 조선왕조에 들어간 것은 반대파를 회유하고자 하는 왕조의 전략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방원과의 개인적 인연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왕조의 사람이 된 하륜은 이번에는 풍수학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굳힌다. 건국 직후에 조선은 처음에는 계룡산 부근으로 도읍을 옮기기 위해 신도시 공사에 착수했다. 계룡산 부근에서 '중장비' 소리가 한창 요란스런 상황에서, 계룡산 천도의 적합성에 대해 반론을 제시한 인물이 바로 하륜이었다. 

정치무대에 복귀한 해인 1393년에 하륜은 "도읍은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거늘,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 있고 동북면과도 막혀 있으며 풍수지리상으로도 좋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주장이 채택되어 계룡산 천도는 무산되었다. 혹시, 이 때문에 재산증식의 기회를 놓친 계룡산 부근의 지주들은 "하륜이 무슨 염치로 조선의 도읍을 운운하는가?"라며 분개하지 않았을까. 

참고로, 계룡산이 한반도의 수도로 적합한가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정감록>의 일부인 <삼한산림비기>에는 "계룡산 밑에 도읍을 세울 땅이 있으니, 정씨가 나라를 세울 것이다. 하지만, 그 복덕(福德)이 이씨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계룡산이 이씨 왕조한테는 적합하지 않다고 이 책에서는 말하고 있다. 

제1부에서 설명한 바 있듯이 고려 말에 고려·명나라·북원(북몽골)이 뒤얽힌 외교문제를 해결한 적이 있는 하륜은, 이번에는 위와 같이 풍수학을 무기로 계룡산 천도를 무산시키는 방법으로 조선왕조에서 입지를 굳혔다. 그 뒤 한강 이북이 새 도읍의 후보지로 떠오르자, 하륜은 무학대사와 같은 입장에 서서 무악산(지금의 서대문 안산) 천도를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북악산(청와대 뒷산) 쪽이 도읍으로 결정되었지만, 하륜은 천도 문제에 관한 논의 과정에서 '조선 건국 반대파'의 꼬리표를 떼고 어엿한 조선 관료의 위상을 굳힐 수 있게 되었다. 

정도전에게 일격을 준비한 하륜, 결국... 


▲  무악산 봉수대의 모습. ⓒ 김종성

이렇게 기반을 굳힌 하륜은 이번에는 실권자 정도전에게 정면으로 맞선다. 정도전을 경계하던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정도전을 우리한테 보내라"고 요구하자, 하륜은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주상인 이성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명나라의 요구를 일축한 상황에서 하륜은 대담하게도 명나라의 편을 들었다.  

하륜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그가 정도전의 정적인 이방원의 대변자임을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정도전에게 미움을 산 그는 계림부윤(경주시장)으로 좌천되었다가 박자안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까지 당했다. 박자안 사건은 1397년에 지방관 박자안이 왜구를 놓친 사건이다. <태종실록>에서는 구체적 이유를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륜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말했다. 

조선 건국 뒤에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하륜은 정도전의 권력이 절정에 다다르고 있던 1397년에 유배형을 당하고 다시 추락할 듯이 보였지만, 얼마 안 있어 사면을 받고 충청도 관찰사로 복귀했다. 박자안이 이방원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사실을 보면, 하륜 역시 이방원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부활한 하륜은 정도전에 대한 최후의 일격을 준비한다. 그는 이방원에게 선제공격을 건의했다. 결국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1398년)을 벌여 정도전 정권을 붕괴시켰다. 하륜은 선제공격을 제의했을 뿐 아니라 자기 휘하의 군대까지 동원해서 쿠데타에 공훈을 세웠다. 이렇게 이방원 정권이 성립하자, 책사 하륜이 국정운영의 한 축을 이루게 된다. 

이방원 정권이 성립한 뒤에 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마지막 제3부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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