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kidz.com/140009730413 
* 원글의 출처는 모르겠고 사진도 사라져서... 사진은 검색해서 제가 적절한 것으로 올렸습니다. 

그토록 강성하던 고구려는 왜 멸망했을까?
최용범 <역사작가> 

東國大 이기동 교수, “외교 패착으로 멸망” 
羅唐연합군보다 후계 구축 실패 때문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무용총 수렵도. 용맹하고 강인한 고구려 무사들을 그린 작품이다.
 
667년 당 고종은 역전의 노장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에 임명하고 고구려 침공에 나섰다. 이적이 신성(新城)을 함락하자 주변 16개 성도 항복했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차남인 남건(男建)이 군사를 보내 탈환을 시도했지만 5만 명의 병사만 잃은 채 패주했다. 이듬해인 668년 신라군이 합류한 나당연합군은 부여성을 쳐 고구려의 배후기지를 장악했고, 그 여세를 몰아 9월 평양성을 함락했다. 이에 앞서 연개소문의 3남 남산(男産)은 수령 98명과 함께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최후까지 남은 것은 남건이었다. 그러나 대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군사지휘를 승려인 신성(信誠)에게 맡겼지만, 그는 당군과 내통해 성문을 열었다. 평양성이 함락되자 최후의 저항자인 남건은 목을 찔러 자결하려고 했으나 모진 목숨은 끊어지지 않은 채 굴욕의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가는 몸이 되었다. 

이로써 700여 년을 이어온 고구려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고구려 5부, 176성, 69만여 호는 당나라 편제에 맞춰 9도독부, 42주, 100현이 되었다. 고구려는 당의 안동도호부로 편제돼 중국의 지배 하에 들어가야 했다. 중국 대륙을 두고 수·당과 70년에 걸친 대전쟁 끝에 요동반도를 호령했던 대제국 고구려는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심약한 당 고종의 고구려 정복 

평앙에서 북쪽으로 35km 떨어진 곳에 있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릉.
 
고구려 정벌의 대업을 달성한 것은 당 태종의 아들인 고종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중국계 역사소설가인 진순신(陳舜臣)은 고종의 고구려 정벌에 관해 이렇게 평한다. 

“천군만마(千軍萬馬)의 태종이 해결하지 못한 고구려 평정이 그가 미더워하지 않았던 심약한 고종(高宗) 이치(李治)의 시대에 뜻밖에 잘 해결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진순신이 평한 대로 당 고종의 손에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특히 그의 아버지 태종 이세민(李世民)과 견주면 더욱 그러했다. 당 태종은 무서운 인물이었다.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흡사한 스타일의 인물이었다. 이세민은 아버지 고조 이연이 창업한 당의 실세였다. 그의 왕자 시절은 수가 고구려 침공 실패의 타격으로 멸망했을 때였다. 당시 새로 건국한 당은 왕세충·이궤 등이 세운 양(凉)·정(鄭) 등의 신흥 국가와 대륙의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최후의 승자는 당나라였는데, 이세민은 이 과정에서 왕세충을 항복시키는 등 결정적 공을 세운 대주주였던 것이다. 

이세민은 이방원과 마찬가지로 형인 태자 이건성을 죽이고 아버지 고조에게 양위받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당 태종은 냉혹무비한 인물이었지만 현실정치에서는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수 양제의 문란하고도 가혹한 정치 대신 부국안민책을 써 민심을 되돌려놓았다. 국제정치적으로도 돌궐을 격파하고 접경 지역의 국가들에 군사적 타격을 입혀 국경을 안정시켰다. 그의 이런 빛나는 치세 덕에 그의 재위 기간은 ‘정관의 치’로 불린다. 

이런 당 태종이 생전에 이루지 못했고, 심지어 시도한 자체를 후회한 사업이 바로 두 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공이었다. 그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645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 침공에 나섰다. 그가 보기에는 모든 준비를 갖춘 것으로 보였다. 다음과 같은 당 태종의 대고구려전 필승의 변은 그가 얼마나 치밀한 인물이며, 동시에 고구려 공격에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를 보면 당 태종은 “옛날 수나라 양제는 그 아랫사람들에게 잔인하고 포악하게 했는데, 고구려왕은 그 백성들을 사랑했던 것이다. 반란을 도모하는 군사로 편안하고 화목한 민중을 쳤으므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제 대략 말하자면 반드시 이기는 방도가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큰 나라로 작은 나라를 치는 것이고, 둘째는 순리로 반역을 치는 것이며, 셋째는 다스려진 형세로 문란한 틈을 타는 것이다. 넷째는 편안한 군사로 피로한 군사를 대적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기쁨에 충만한 군사로 원망하는 군사와 맞서는 것이니 어찌 이기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장담과 달리 당 태종은 645년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에게 완패당하고 말았다. 패전의 후유증인지는 몰라도 당 태종은 649년 죽음을 맞았다. 일설에는 양만춘이 쏜 화살에 눈을 다쳐 죽었다고도 전한다. 중국의 사가들이 양만춘이 쏜 화살이 태종의 사인(死因)이라는 치욕적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애쓴 결과 ‘신당서’와 ‘구당서’ ‘자치통감’ 등은 당 태종의 사인을 제각기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고도 한다. 

당 태종의 용병술은 대단했다. 10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지만, 전술도 없고 문란하기 그지없던 수 양제의 병력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수의 4차례에 걸친 대규모 침공에도 고구려는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그러나 당 태종이 침공했을 때는 요동성이 함락당했고, 고연수와 고혜진이 이끄는 15만 명의 고구려 군대가 통째로 투항할 정도였다. 

이처럼 당 태종은 전쟁터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 전술 활용에 능했고, 병사의 마음을 사로잡는 용병술이 남달랐다. 황제의 몸으로 군사용 도로를 낼 때는 직접 나무를 옮기고, 사졸이 부상당하면 입으로 고름을 짜내는 등 병사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삼국사기’ 등에 기록돼 있는 그의 용병술은 능히 100만 명의 대군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당 태종도 고구려 침공에 실패한 뒤 “만일 위징(당 태종에게 간언을 서슴지 않던 신하)이 있었더라면 나에게 이번 걸음을 하지 않게 했을 것”이라며 탄식했다. 중국 사서에서는 보이지 않고 ‘삼국사기’에만 나타나 있는 고구려군에 대한 당 태종의 공포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주필산 전쟁에서 고구려는 말갈과 군사를 합쳐 사방이 40리에 뻗치니 태종은 이를 바라보고 두려운 빛이 있었다. 육군(六軍, 중국 천자 군대의 총칭)이 고구려 군대에 눌려 거의 떨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척후(斥候)가 이세적의 대장기인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아뢰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했다.’ 

당 헌종 때 태자태보 벼슬을 지냈던 유공권의 소설에 기록된 당시의 상황이다. 그래서였을까. 당 태종은 죽으면서 고구려 침공을 중지하라는 유지를 내렸다. 

물론 당 태종은 1차 원정이 실패로 끝난 뒤에도 군사를 보내 재차 고구려 침공에 나서기도 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렇지만 300년 당나라 역사에서 최강의 황제였던 태종이 채 이루지 못한 고구려 정벌의 꿈은 묘하게도 그가 그토록 못미더워했던 아들 고종에 의해 이뤄졌다. 

고종은 마음도 약하고 몸도 병약한 인물이었다. 심신이 쇠약해 황후인 측천무후가 섭정해야 했던 황제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고종은 고구려 침공에 집착했다. 병이 나 측천무후에게 섭정을 맡겼음에도 고구려 정벌을 단행하려다 무측천의 반발로 중지하기도 했다. 일본의 역사소설가로 대하소설 ‘측천무후’의 작가인 하라 모모요는 고종이 무측천에 대한 열등감의 발로로 적극적인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고종 역시 678년 토번의 침공으로 안서 4진을 잃자 고구려 정벌을 후회했다. 

동국대 이기동 교수의 논문을 보면 당 태종은 “고구려는 요수를 건널 수 없었고, 백제는 감히 황해를 초월할 수 없었는데도 지난날 빈번하게 해마다 군대를 보내면서 널리 나라의 물자를 허비했다. 비록 지난 일이지만 나는 이를 후회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듯 고구려 멸망의 앞뒤를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단선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역사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좋은 자세가 아닌 듯하다. 다만 역사의 우연이 펼쳐졌던 밑바탕에 대한 이해가 그나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최근 동국대 이기동 교수는 고구려 멸망 원인에 대한 주목할 만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교수의 논지는 바로 고구려가 외교적 실착으로 망했다는 것이다. 최근의 대미·대북정책이 국운을 좌우할 사회적 아젠다로 설정된 현실에 비춰볼 때 이교수의 분석은 눈길을 끈다. 이교수는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당이 한창 중천에 높이 뜬 태양인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고구려는 660년대의 격류에서 잠시 발을 뺄 적절한 계기를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668년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2년이 흐른 670년에는 토번과 싸움에서 참패당한다. 당의 대외정책도 공세에서 수세로 바꾸었다. 당이 신라와 전쟁을 계속하지 못한 채 물러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 뒤 측전무후 집정 때 명재상인 적인걸이 692년 안서의 4진(鎭)을 포기할 것을 상소했다. 적인걸은 이 상소에서 하늘이 낳은 사이(四夷)는 모두 선왕이 봉한 역외(域外)라고 강조한 데서 알 수 있듯 당나라도 일단 전성기가 지나자 현상 유지에 급급한 형편이었다. 

중천에 뜬 태양이 어느덧 기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더욱 유연한 자세를 취해 무후(武后) 집권 초기의 신경질적 고구려 침략 야욕을 조금이라도 완화시켰더라면 머지않아 대외 위기가 사라져 그 뒤 오랫동안 안녕을 구가(謳歌)했을 것이라고 이교수는 주장했다. 

고구려, 對唐 평화 노선 유지 

강화도 고려산. 연개소문이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이러한 주장은 고구려 멸망 당시의 동아시아세계 판도를 종합적으로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 이해의 지평을 넓혀준다. 그럼에도 이 주장에는 쉽게 납득하기 힘든 점이 있다. 우선 고구려가 수·당에 비타협적 태도만 고수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가장 강력한 대당(對唐) 강경파로 지목되는 연개소문 또한 당에 유화의 손길을 내밀며 평화적 공존의 길을 추구했다. 

연개소문은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이듬해인 643년(보장왕 2)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한 것을 비롯, 끊임없이 대당 사절을 보냈다. 멸망 2년 전까지도 외교적 교섭을 멈추지 않았다. 당 태종이 1차 고구려 침공에 나선 644년 연개소문의 주장으로 조공한 데 이어 관인 50명을 당에 인질로 보냈다. 그럼에도 당 태종은 이들을 감옥에 가두고 진군 명령을 내렸다. 안시성 싸움에서의 패배로 당군이 철수한 뒤에도 연개소문은 사죄사를 보내고 미녀 2명까지 바쳤다.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한 해에도 보장왕은 태자 복남(福男)을 당나라에 보내 태산의 제사에 참가하게 했다. 중국에서 황제가 태산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봉선(封禪)이라고 하여 천하를 평정한 위대한 공이 있는 황제만 올릴 수 있는 행사였다. 첫번째 봉선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 이를 기념해 올렸다. 당 고종이 봉선한 것은 그만큼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주변 국가의 왕족이 참례한 것은 중국의 천하 지배를 승인한다는 의미였다. 고구려가 태자를 보낸 것은 이미 당의 패권을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연개소문이 당의 요구에 분명한 반기를 든 것은 644년 신라와 화친하라고 권유했을 때였다. 이때 연개소문은 551년 신라가 빼앗은 한강 유역 500리에 달하는 고구려 영토를 돌려주지 않으면 신라 공격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결코 당을 먼저 자극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당은 고구려 야욕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기회 있을 때마다 고구려 공격을 마다하지 않았다. 

반면 고구려로서는 강경책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당과 평화공존이 고구려의 일관된 외교 노선이었다. 대신 요동 이남의 패권을 지키기 위해 한강 유역을 점유하고 고구려를 넘보는 신라와는 충돌을 회피하지 않았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인철 교수는 “고구려는 신라와 접경 지역에는 성 대신 보루를 쌓아 방어전 대신 공격전에 치중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신라는 가만히 둘 수 없는 존재 

고구려 정벌에 유달리 집착했던 당 태종.(왼쪽 사진)

고구려 보장왕 21년(662)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평양 근처 蛇水에서 당의 침공군을 섬멸한 전투를 묘사한 기록화.
 
부여·백제·신라·말갈은 전통적으로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던 세력이었다. 당이 고구려의 신라 공격을 중지하라는 권유는 사실상 이미 확보한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고구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였다. 또한 신라와 연합 혹은 평화공존 노선 역시 실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국가의 명운을 건 삼국 간의 각축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평화 공존을 거론하는 것은 마치 중국의 위·촉·오 삼국시대 때 삼국 간에 평화공존 노선을 걸으라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실현불가능한 공론에 불과했다. 

이렇게 본다면 당과의 평화공존 노선은 고구려의 태도와 관계 없는 것이었다. 당이 고구려를 침략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면 피할 방도가 없었다. 고구려는 맞서 싸워야 했다. 사실 70년간 고구려는 수·당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생존을 지속했다. 668년의 대회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때 고구려가 결정적 패배를 당한 원인은 나당연합군이 가장 주요한 변수가 아니었다. 666년 사망한 연개소문의 삼형제, 남생·남건·남산의 분열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연개소문은 사망하면서 후계 구도 설정에 실패했던 것이다. 막리지가 되어 1인자로 권력을 승계한 장남 남생이 처음으로 지방의 여러 성을 순시할 때 수도에서의 뒷일을 부탁받은 남건·남산 형제 사이에서 어떤 자가 이간질을 했다. 이 자는 남생이 동생들을 제거할 것이라는 거짓 제보를 올렸다. 동생들은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또 다른 어떤 자가 이 사실을 형 남생에게 알리자 남생은 의심이 들어 정황을 탐지할 정탐꾼을 평양에 보냈다. 공교롭게 정탐꾼은 잡혔고, 남건 형제와 보장왕은 남생을 소환했다. 그러자 남생은 감히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아들 헌성이 있는 국내성으로 도망간 뒤 헌성을 당나라에 들여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이 상황에서 이미 싸움은 끝난 것이었다. 국력을 다 바쳐 싸워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권력자인 형제들의 분란은 이미 결과가 뻔히 내다보이는 것이었다. 막리지로서 고급 정보와 자체 군사력을 보유했던 남생과 그 아들 헌성은 당나라 군대의 길잡이가 되어 고구려 침공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662년 연개소문이 있었을 때만 하더라도 당의 백주자사 방효태가 이끄는 당군을 전멸시켰던 고구려의 군사력도 분열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연개소문이 생전에 후계구도를 분명하게 구축하지 못한 점을 고구려 멸망의 최대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연개소문은 막리지라는 기존 최고위직을 넘어 태대막리지·태대대로 등의 새로운 관직을 신설해 종신 집권을 위해 초월적 지위를 누렸는데, 이로 인해 기존의 귀족 연립정권의 기반은 파괴됐다. 그의 생전에는 기존의 권력 구도를 넘어서는 독재가 가능했지만, 이를 지속시킬 시스템 창출에 실패해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던 것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나당연합이라는 새로운 외교적 국면을 파악하지 못해 멸망했다고 지적한다. 이는 일견 타당했지만 당나라를 상대로 신라·백제가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는 방식의 걸사외교(乞師外交)가 양국의 전통적 외교술이었다는 점을 간과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신라에서는 608년 진평왕의 명령으로 원광이 수에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작성하기도 했다. 서강대 김한규 교수의 다음과 같은 고·당전쟁에 대한 정리는 이 전쟁의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 

‘고종조의 당이 백제·고구려와 벌인 전쟁은 당시로서는 하나의 세계대전이었다. 전쟁 직전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는 당과 신라가 연합하는 가로축과 돌궐·고구려가 백제·일본으로 연결되는 세로축 등 두 개의 축이 대항하는 양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따라서 당은 먼저 돌궐을 무너뜨린 다음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공격함으로써 고구려·백제 양국의 연계를 단절하고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신라와 더불어 남북으로 고구려를 협공해 궤멸시킴으로써 세로축의 연합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고구려가 망한 것은 개화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과 비슷했다. 새롭게 변화하는 국면을 돌파할 적극적 계획 수립 대신 내부 권력 다툼으로 외세의 침탈을 자초했다. 물론 647년 고구려에 대한 전면전 대신 국경 지역에 소규모 부대를 출몰시키며 고구려를 끊임없는 전쟁 피로증 속으로 몰아넣었던 점이나 668년을 전후로 수년간 가뭄이 계속돼 국력이 피폐한 점 역시 패전의 원인이다. 

고구려는 20년간 지속적으로 ‘잽’(잔주먹)을 얻어맞고 ‘데미지’(충격)를 안고 있던 상태에서 668년 당과 신라의 양 ‘훅’에 의해 KO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가장 큰 원인은 조직내 갈등으로 인한 분열이었다. 모든 조직의 쇠망은 결국 자기모순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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