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l4icFu

<2>첨단화 정예화 조선은 수군 강국이었다
천자·지자·현자·황자 총통 任亂때 주력 무기
2012. 01. 09   00:00 입력 | 2013. 01. 05   07:34 수정

임진왜란 발발 당시 조선의 수군은 신예 함선인 판옥선과 천자·지자·현자·황자 총통 이른바 함포를 보유한 첨단 수군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함선에 함포를 장착해 운용했을까. 그 연원은 멀리 고려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 국방을 책임진 리더들은 잦은 왜구의 침략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고려가 멸망하기 전 40여 년 동안 약 500여 회에 걸쳐 왜구가 침략해 왔다는 사실은 왜구의 격퇴 문제가 얼마나 시급한 과제였는지를 반증해 준다. 



총통발사장면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고려의 최무선 장군이 화약과 화포를 만들려고 그토록 노력했던 이유도 왜구를 물리쳐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성 때문이었다. 화약과 화포를 만든 고려는 이것을 바로 함선에 배치했다. 그리고 이 화포는 왜구 섬멸전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고려 우왕 6년(1380년) 8월 나세·심덕부·최무선 등의 고려 장수들은 전선 100여 척을 이끌고 가서 진포구(鎭浦口: 현재의 금강 어구)에 정박해 있던 왜구의 선박 500여 척을 화포를 이용해 불태운다. 진포해전은 세계 해전사상 함포를 사용한 최초의 해전이다. 다시 3년 뒤인 고려 우왕 9년(1383년) 5월 정지 장군은 전선 47척을 이끌고 왜선 120여 척을 추격해 남해의 관음포(觀音浦)에서 마찬가지로 화포를 활용해 격퇴한다. 이른바 관음포 해전이다. 

일본 사람이 쓴 ‘함포 사격의 역사’라는 책에서 저자는 영국 해군이 1410년 함포를 가장 먼저 배에 싣고 운용했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이미 1380년에 함포를 사용해 대규모 해전을 벌여 승리했으니 함포사격에 관한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선구였던 셈이다. 이렇게 볼 때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함포 운용의 노하우가 200여 년 동안 축적된 수군이었음이 확인된다.

조선 건국의 기틀을 다지는 태종 연간에 이르러 화약 무기는 새로운 무기체계로의 위상을 갖게 된다. 화약 무기를 전문으로 연구하고, 제조하는 화약감조청(火藥監造廳)이 세워지고, 여기서 만들어진 화약 무기는 서북 방면의 국경지대에 광범위하게 배치됐으니 육전에서도 화약 무기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라고 알려진 세종대에 이르면 화약 무기는 또 한번의 비약적 발전이 이뤄진다. 이때 화약 및 화기의 성능이 크게 개선돼 기존의 화포에 비해 파괴력과 사정거리가 크게 향상됐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왜구의 침략은 끊이질 않았다. 중종 5년(1510년)의 삼포왜란, 중종 39년(1544년)의 사량진왜변, 명종 10년(1555년)의 을묘왜변 등은 해전에서의 대형 화약 무기류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동시에 조선 수군이 첨단화·정예화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 특히 명종대에 이르러서는 왜구와의 해전에서 대형 화약 무기인 총통과 발사체인 대장군전(大將軍箭)의 효용이 증명됐다. 

다음은 ‘명종실록’의 기록이다. “전라도 감찰사 김주가 장계하기를(중략)…… 적선을 깨뜨리는 기구로는 대장군전보다 나은 것이 없으나 총통을 주조할 놋쇠를 준비할 방법이 없어 이준경이 여러 사찰의 종을 거둬 총통을 주조하려 했습니다.” 여러 차례 왜변을 경험하면서 화포와 발사체인 대장군전 등이 해전의 주력 무기로서 더욱 주목받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총통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으며 그 재료인 동철(銅鐵)의 부족 사태가 생기게 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심지어 사찰의 종을 거둬 총통을 제조하는 일까지 생겼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주력 무기로 사용됐던 천자·지자·현자·황자 총통은 대개 명종 10년(1555년)부터 명종 20년(1565) 사이에 만들어졌다. 

이뿐만 아니라 고려 수군을 계승한 조선 수군은 규모 면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고려가 망하기 전인 1389년(창왕 1년) 2월, 박위 장군에 의해 최초의 쓰시마 정벌이 이뤄지는데 이때 동원된 전투력은 함선이 대략 100척 이상, 병력은 1만여 명 내외다. 

조선이 건국한 이후에도 여전히 왜구의 침략이 지속되자 조선 조정은 1396년(태조 5년) 첫 번째 쓰시마 정벌을 추진한다. 동원된 함선의 척수와 병력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약 2개월이 소요됐으며 어느 정도의 성과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조 두 번째 쓰시마 정벌은 1419년(세종 1년)에 단행됐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이때 동원된 함선은 227척, 병력은 1만7285명이고. 식량은 65일분을 준비했다고 한다.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로 한 정벌군은 쓰시마에 도착해 114명을 참수하고, 포로로 21명을 잡았으며, 가옥 1939호를 불태웠다. 또한 선박 129척을 노획했고, 중국인 포로도 131명을 구출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이뤄진 세 번의 쓰시마 정벌은 강력한 수군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선 전기의 수군 전투력을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는 단종 때 발간된 ‘세종실록지리지’와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군선의 척수는 829척이고 병력은 5만402명이다. 또한 ‘경국대전’에 기록된 군선의 척수는 739척이며 병력은 4만8800명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조선 전기에 대략 5만 명 정도의 수군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인구 약 5000만 명인 오늘날의 대한민국 해군 병력과 유사한 규모다. 인구 대비 결코 적은 병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발발 시기와 비슷한 1588년 서양에서는 영국 해군이 스페인 무적함대와 칼레해전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게 된다. 칼레해전에 동원된 영국의 함선은 197척이고 병력은 1만5000명이었으며, 스페인 무적함대는 함선 130척, 병력 약 3만 명을 투입했다. 함선의 크기나 무기의 차이 등 수평적으로 서양과 조선의 수군력을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해전을 전문으로 하는 순수 수군 병력 5만여 명 그리고 약 700척 또는 800척의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던 조선은 서양의 수군 선진국과 어깨를 견줄 만한 수군 강국이었다. 
 

임원빈 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 전 교수부장 



관련글
임진왜란 군사 목록  http://tadream.tistory.com/11518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