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us5aRS

<10>이순신 병법(4):지형의 이점을 십분 활용하라
지리적으로 가장 유리한 지점 활용 승리 이끌어
2012. 03. 12   00:00 입력 | 2013. 01. 05   07:46 수정

‘맹자’에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地利)는 인화(人和)만 못하다”는 구절이 있다. 비록 인화만은 못하지만, 지형의 이점을 활용하는 것이 전쟁의 승패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



한산도에서의 남해해로차단 전략 개념도



거북등대와 한산도.

지형의 이점을 활용해 승리한 대표적인 해전이 지난 호에서도 살펴본 명량해전이다. 13대133의 싸움이었던 명량해전의 승리요인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명량의 좁은 물목과 빠른 조류라는 지형의 특성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0여 척의 조선 함대를 명량의 입구까지 추격해 온 일본 함대는 200~300여 척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명량의 빠른 조류와 좁은 물목이라는 지형적 여건 때문에 최종적으로 조선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투입된 일본 함대는 세키부네(關船) 중심의 133척이었다. 판옥선과 크기가 비슷한 대선(大船)인 아다케부네(安宅船)가 빠졌던 것이다. 그런데 133척의 세키부네도 명량의 좁은 물목에서는 동시에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었으며 최종적으로 이순신의 조선 함대와 해전을 벌인 것은 구루시마 미치후사 등이 지휘하는 선봉함대 31척이었다. 이순신은 명량의 좁은 물목을 해전 장소로 택함으로써 최초 13대200~300의 절대 열세 상황을 13대133으로 축소했고, 최종적으로는 13대31의 상황이 되게 했다. 1대20 정도의 절대 열세 상황을 1대3 미만으로 축소한 것이다.

해전이 벌어지기 하루 전 통제사 이순신은 진(陣)을 진도의 벽파정에서 좁은 명량의 물목을 빠져 나와 전라우수영으로 옮겼다. 이순신은 일기에 “수효 적은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그 이유를 적고 있다. 진을 옮긴 후 이순신은 예하 지휘관·참모들을 불러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고, 살려고 꾀를 내고 싸우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했고, 또 ‘한 사내가 길목을 지키면, 천 사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구절이 ‘한 사내가 길목을 지키면, 천 사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관우나 장비 같은 힘센 장수가 외나무다리에서 지키고 있으면, 적이 아무리 많더라도 외나무다리를 타고 공격해 올 수 있는 자는 1명일 수밖에 없으니, 관우나 장비 같은 힘센 장수가 일단은 우세할 수 있다는 것이 이순신이 명량의 좁은 물목을 해전 장소로 택한 이유였던 것이다. 

좀 더 거시적 측면에서 지형의 이점을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가 한산도에 삼도수군의 전진기지를 설치한 것이다. 이순신은 왜 여수 본영을 두고 경상도 지역인 한산도에 전진기지를 설치했을까. 이순신은 임진년(1592년) 그리고 다음 해인 계사년(1593년) 6월 초까지 많은 시간을 거제도의 견내량·칠천량·영등포, 진해 인근의 웅천 등지에서 해상작전을 하면서 보냈다. 조선 수군이 웅천 앞바다까지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6월 중순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500~600척 규모의 일본 수군이 안골포·웅포·제포로 밀려들어왔으며 나아가 거제도의 칠천량까지 진출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견내량을 경계선으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대치되는 국면이 조성됐다. 이순신은 이때부터 한산도에 전진기지를 세울 준비를 시작했다. 여수 본영에서부터 일본 수군과의 해상 분계선인 견내량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계사년 7월 15일 이순신은 경상도 해역인 한산도에 삼도수군의 전진기지를 설치했다. 이 사실은 이순신이 사헌부 지평(持平)이었던 현덕승(玄德升)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확인된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입니다. 만약 호남이 없다면 이것은 국가가 없어지는 것입니다(若無湖南, 是無國家). 그래서 어제 진을 한산도로 옮겨 바닷길을 막을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한산도에 전진기지를 설치할 즈음에 일본군은 부산·창원을 비롯한 경상도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남은 지역은 호남뿐이었다. 호남이 최후의 보류였던 셈이다. 

부산을 침략거점으로 삼은 일본군이 호남을 장악하려면 수륙병진(水陸竝進)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한산도에 있는 조선 수군을 먼저 격파해야만 했다. 해로를 포기하고 지상으로만 공격해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경상도 해역 깊숙이 위치한 한산도에 조선 수군의 본진(本陣)이 자리한 상황에서는 뒤가 불안해 쉽사리 채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이것이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궤멸되기 전까지 일본군이 호남을 적극적으로 공략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다. 

임진년 초기 이순신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해 바닷길을 통한 보급로를 차단하고 설상가상으로 명나라 원군이 파병되자 함경도와 평양까지 진출한 일본군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후 일본군은 평양성 전투의 패배를 기점으로 남쪽으로 후퇴해 거제도 동쪽의 웅천·안골포부터 부산까지의 남해 연안에 성을 쌓고 웅거하는 형태의 수세적 상황에 몰리게 된다. 이처럼 일본군을 수세로 몰고 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명나라의 원군(援軍) 파병과 더불어 조선 수군이 남해의 바닷길을 완벽하게 차단했기 때문이다. 

부산에 침략거점을 둔 일본군이 남해 바다를 통과하려면 거제도와 육지 사이의 해협인 견내량을 통과하거나 거제도 바깥 바다인 옥포 쪽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는데, 한산도는 거제도 바로 뒤에 위치해 두 길목을 모두 차단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다.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 전진기지를 설치해 바닷길을 차단함으로써 곡창인 호남이 보전됐고, 곡창인 호남이 보존됨에 따라 조선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갖출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보급로가 차단됐다는 것을 인식한 일본군은 임진년 초기처럼 함경도나 평양 등 내륙 깊숙이 마음 놓고 진격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볼 때 한산도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이순신의 해로차단 전략은 임진왜란 전 기간을 통해 가장 성공한 수군전략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전 해사 교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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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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