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nh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468

이숙번, 24년간의 끝없는 유배생활
김성철 관장의 유배로 읽는 한국사 68
[378호] 2013년 11월 21일 (목) 10:58:06 김성철  nhsd@hanmail.net 

       태종의 오른팔 이숙번의 몰락 - 남해타임즈  http://tadream.tistory.com/11306

▲ 남해유배문학관 관장  

1416년 6월 4일, 이숙번에게 농장에 거주하게 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이숙번이 장원한 황해도 연안농장은 그가 20여 년 동안 모아둔 농토의 일부였다. 

이숙번의 귀양행렬에는 소조운과 약생 등 기생첩의 가마까지 동행한 휴양행렬을 방불케 했다. 근신해야 할 죄인의 모습은 간 데 없었다. 연안현의 수령과 지방토호들에게 태종과의 관계를 과시하면서 방자함을 일삼았다. 그것이 그의 종말을 불러오는 싹이 되었다.

"잠시 쉬러 왔을 뿐임이야. 다시 불러 주실 게야. 내 돌아가면 박은 이놈부터 가만두지 않을 게야"

하지만 조정의 분위기는 이숙번이 바라는 반대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빗발친 중신들의 상소는 이숙번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태종은 왕권강화를 위한 경계심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거사를 도모한 정리 때문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6월 21일 좌의정 류정현 등의 상소로 공신녹권과 직첩이 거두어졌다. 그러나 중신들은 공신녹권과 직첩을 거두는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1417년 2월 24일, 이숙번은 구종지, 구종유, 구종수 형제와 사통한 죄로 의금부 순군옥에 하옥됐다. 구씨 형제는 양녕대군이 왕위를 물려받을 때를 생각하여 줄서기를 했던 것이었다. 연금돼 있는 세자궁 담을 넘어 주색과 향연을 베풀고 매 등을 뇌물로 바치면서 때를 기다린 것이 발각된 것이다. 이숙번은 귀양지에서 가노 수정과 그 첩 김관도, 여종 금생을 구종지의 집으로 보내어 구종지가 죄를 청한 이유를 묻게 했다. 그리고 구종수는 이숙번의 귀양지에 사람을 보내 활과 여우꼬리, 양마를 달라고 했다. 여우꼬리는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바치려 한 것이다. 이숙번 역시 구종수에게 철갑과 투구 등을 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타락의 길로 접어든 세자를 부추긴 자들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 태종이었기에 국문은 엄했다. 결국 구씨 형제 등은 모두 저잣거리에 참수되고 이숙번은 3월 4일 경남 함양으로 유배되었다. 

이숙번은 수동면 유배지에서 절치부심했지만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1418년 양년대군이 폐세자 되고 충녕대군이 즉위한 후 20년이 지난 1438년(세종 20년) 9월 25일 이후에야 이숙번은 한양 땅을 밟을 수 있었다. 22년만에 한양으로 돌아온 이숙번은 여전히 유배객의 몸이었다. 

1438년 9월 25일 신개와 전흥은 변계량이 지은 태종의 비문이 잘못됐다며 태종에 관한 내용은 이숙번이 가장 잘 알고 있으나 멀리 귀양가 있으니 사람을 시켜 묻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아뢰었다. 

이숙번은 헌릉 비문 개수를 자문하는 일로 한양으로 송환됐다. 세종은 비문 내용의 자문과 함께「용비어천가」창작에도 참여시켰다.「용비어천가」는 1445년 정인지 등이 훈민정음으로 지은 최초의 최초의 악장가사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연려실기술』,『용재총화』,『해동잡록』,『소문쇄록』등의 야사에 이숙번이 지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1445년 편찬한 것이 관찬본이라면 이숙번 근찬본은 그 저본이라 볼 수 있다.  

한양으로 올라온 이숙번은 1339년 1월 13일 외방에서 편리한 대로 살라는 왕명을 받아 경기도 안산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440년 3월 15일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

귀밑머리엔 눈서리 더하나 / 흐르는 세월 멈추지 않네 / 임금의 말씀 대궐에서 내려지니 / 옛친구 역참 객사에서 보내네 / 집을 두른 산과 계곡의 경치여 / 구름 두른 송백의 푸르름이여 / 나라의 은혜 어찌 다 갚으리오 / 언제 대궐 뜰에 다시 돌아갈꼬.

함양에서 지은 이숙번의 오언율시는 권력의 덧없음과 허무함이 진하게 배어 본통마을 까막섬을 떠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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