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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이순신의 수군 전략(1):남해 해로를 차단하라
한산도에 전진기지 설치 적 내륙 진출 막아
2012. 04. 09   00:00 입력 | 2013. 01. 05   07:52 수정

대형 화약무기류·판옥선의 진가 유감없이 발휘 보급로 원천 봉쇄…가장 성공한 전략 중의 하나


 
한산도 입구 거북등대

 
한산도 수루.


한산도 삼도 수군 전진기지(현재 제승당).
 
조선의 수군은 왜구의 침략에 대응하는 과정을 통해 꾸준히 발전했다. 임진왜란 당시 주력 무기였던 총통류는 고려 말 왜구에 대비해 만들었던 화포가 꾸준히 발전된 것이며, 주력 함선이었던 판옥선 또한 왜구의 해전전술인 등선백병전(登船白兵戰)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왜구 대비용 맞춤형 함선’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대형 화약무기류와 판옥선은 임진왜란 해전에서 그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됐다. 왜구에 대비해 정비된 조선의 해전주의 전략은 적어도 임진왜란 전후까지는 조선의 군사전략 가운데 가장 성공한 전략 중의 하나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어떤 수군 전략으로 침략자 일본군에 맞섰을까. 가장 눈에 띄는 것이 한산도에 삼도 수군의 전진기지를 설치해 놓고 남해의 바닷길을 차단한 ‘남해 해로차단전략’이다. 경상도가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상태에서 마지막 남은 최후의 보루가 호남이라고 생각한 이순신은 본영인 여수에서 멀리 떨어진 한산도 부근 해상에서 일본 수군의 서진(西進) 차단 작전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호남을 지키려면 경상도 해역에서 해로를 차단해야 효과적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임진년(1592년) 다음 해인 계사년(1593년) 2월에는 7차례에 걸쳐 웅포의 일본군을 공략하며 거제도와 가덕도 사이의 해역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계사년 6월 평양에서 패퇴한 일본군이 진주성을 대대적으로 공략할 즈음부터 일본 수군은 거제도 동북쪽의 송진포, 칠천량까지 진출해 남해의 해로를 넘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도 이순신은 해로를 차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었다. 

일기에 “수로(水路)의 적이 비록 500∼600척을 합해 오더라도 우리 군사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함락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견내량을 넘보고 있었다. 계사년 7월 초에는 일본 함선 2척이 견내량을 넘어오고, 견내량 쪽 육지에는 수만 명의 일본 지상군이 해안가에 모여들어 무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견내량을 분계선으로 삼아 일본 수군의 서진(西進)을 용납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계사년 6월 말 진주성을 함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어서 호남을 침범하지 못한 것은 조선 수군이 한산도 인근에 주둔하면서 후방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드디어 계사년 7월 15일 경상도 해역 깊숙이 위치한 한산도에 삼도 수군의 전진기지를 설치한다. 그리고는 남해 해로의 두 길목인 견내량과 옥포 외해 쪽의 해로를 차단하는 ‘남해 해로차단전략’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남해 해로차단전략’을 수행하면서 이순신은 고성의 당항포나 진해만에 출현하는 일본 수군을 적극적으로 공략했다. 갑오년(1594년) 3월에는 고성의 당항포에서 일본 함대 21척을 색출해 모조리 격파했으며, 9월 말과 10월 초에는 조선의 지상군과 합동으로 거제도 장문포에 왜성을 쌓고 웅거하고 있는 일본군과 해·육상에서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산도에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남해 해로차단전략’을 수행하고 있던 조선 수군은 일본의 조선 침략 전략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조선 수군에 의해 남해의 해로를 통한 보급로가 원천 봉쇄된 일본군은 호남을 비롯한 조선 내륙 깊숙이 공략해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보급로가 길어지면 결국은 바다와 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생명줄과 같은 남해 해로를 조선 수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정에 따른 장기전을 수행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한산도에 조선 수군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본군은 행동의 자유권을 박탈당한 것이다. 현대의 해군전략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이순신은 한산도에 주둔하면서 ‘현존함대전략’을 구사했던 셈이다. 병신년(1596년) 12월,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온다는 정보를 줘 공격하도록 지시했으나 거짓 정보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이를 따르지 않았으며, ‘남해 해로차단전략’에 기초한 해상 작전을 전개했다. 결국, 이순신은 정유년(1597년) 2월 통제사에서 파직된다. 

새로 통제사가 된 원균은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조정의 지시대로 ‘남해 해로차단전략’을 포기하고 부산포 앞바다까지 진출해 대마도에서 건너오는 일본 함대와 해전을 시도하는 작전을 수행하는 도중, 칠천량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다시 통제사에 임명된 이순신에게 조정에서는 해전을 포기하고 육지에서 싸우라는 지시를 내린다. 남은 함선 세력이 10여 척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장계를 조정에 보낸다. “저 임진년부터 5∼6년 동안 적이 감히 충청도·전라도를 바로 찌르지 못한 것은 우리 수군이 그 길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臣)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으니 죽을 힘을 다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만일 수군을 전폐한다는 것은 적이 만 번 다행으로 여기는 일일뿐더러 충청도를 거쳐 한강까지 갈 것이니 그것이 신(臣)이 걱정하는 바입니다.” 

이 장계에서 이순신은 임진년(1592년)부터 정유년(1597년) 초까지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서 ‘남해 해로차단전략’을 수행한 것이 얼마나 중요했었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조정에 대한 일종의 질책성 장계다. 아울러 당시의 상황에서도 수군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남해에서 서해로 이어지는 해로를 차단하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만약 한산도에 진을 치고 있었던 조선 수군이 건재했다면 정유재란은 일본군이 원하는 방식대로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칠천량해전의 패배는 이순신이 선택한 ‘남해 해로차단전략’이 얼마나 정당한 것이었는지를 반증해 줬다. 패배를 딛고 깨우친 쓰라린 교훈이었다. 성공한 군의 전략은 위기 상황에서 나라를 구해 낸다. 만약 조선이 고려 때처럼 바다를 통해 침략해 들어오는 왜구를 육지에 상륙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지상전을 펼쳐 격파하는 육전주의(陸戰主義) 전략을 채택했다면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실패했을 것이다. 천만다행히도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왜구에 대한 방어 전략으로 해전주의(海戰主義)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해전을 전문으로 하는 수군을 두게 됐다.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전 해사 교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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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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