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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이순신의 수군 전략(3)서해 해로를 차단하라
‘수륙으로 호남 공략’ 일본 의도 원천 봉쇄
2012. 04. 23   00:00 입력 | 2013. 01. 05   07:54 수정

명량해전서 13척 함선으로 300척 일군 격파 조선 수군 건재 대내외 과시·재건 토대 마련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명량대첩공원의 명량대첩탑.


전남 해남~진도 울돌목에서 펼쳐진 명량대첩 재현 장면.
 
조선 수군의 칠천량에서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는 이순신의 ‘수륙 병진전략’이 옳았음을 입증해 줬다. 또한, 조선 수군이 패배하면서 호남이 무너졌으니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서 ‘남해 해로 차단전략’을 수행한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가 증명됐다.

조선 수군이 궤멸하자 일본군은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호남을 공략했다. 일본의 좌군 4만9600명은 남해안을 따라 고성·사천·하동·구례·남원·전주를 차례대로 공략했고, 우군 6만4300명은 거창·안의·진안을 거쳐 전주로 입성했다. 좌군의 공격로에 있던 남원에는 조·명 연합군 4000여 명이 필사적으로 대응하면서 나흘 동안이나 버텼지만 결국 8월 16일 무너졌으며, 8월 19일에는 전주에 무혈입성했다. 전주에서 합류한 좌·우군은 다시 임무를 분담해 우군은 9월 3일 공주를 함락하고 전의, 천안을 거쳐 9월 7일 충청남도 직산까지 진출하고, 좌군은 충청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남하해 정읍·장성·강진·해남을 점령했다. 

명량해전이 벌어지는 정유년(1597년) 9월 16일은 호남이 일본의 좌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 시점이다. 그야말로 적진 깊숙이 위치한 장소에서 해전이 벌어진 것이다. 칠천량해전의 패배 뒤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이순신은 8월 18일 장흥의 회령포에서 10여 척의 함선을 수습한다. 배설이 이끌고 도망해 온 경상우수영 소속 중심의 함선들이었다. 조정에서는 해전을 포기하고 육전에 종사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10여 척밖에 안 되는 함선 세력을 가지고는 이순신도 어쩔 방도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지난 회에도 살펴본 바 있지만, 다시 한번 이순신이 조정에 보낸 장계를 확인해 본다. “이제 신(臣)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으니 죽을 힘을 다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만일 수군을 전폐한다는 것은 적이 만 번 다행으로 여기는 일일뿐더러 충청도를 거쳐 한강까지 갈 것이니 그것이 신(臣)이 걱정하는 바입니다.” 이순신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해로가 뚫리는 일이었다. 만약 남해에서 서해로 이어지는 해로를 적에게 내어 준다면 바닷길을 통해 한강까지 보급로가 연결된다. 이렇게 수륙으로 공격을 받게 되면 조선은 더는 버틸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을까. 어디서 막아야 일본 수군의 진격을 차단할 수 있을까. 

회령포에서 이진(梨津), 어란포(於蘭浦), 진도의 벽파진으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면서 이순신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 결과 선택한 해전 장소가 명량(鳴梁)이었다. “한 사내가 길목을 지키면 천 사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병법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명량은 남해에서 서해로 들어가는 관문(關門)과 같은 지역이다. 이순신은 평소 같았으면 절대 열세의 해전인 명량 해전을 결단코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무엇 때문에 13척의 고약한 함선 세력으로 200~300척이나 되는 일본 함대와 무모한 해전을 벌였을까. 그것은 조선의 운명이 수군이 서해의 바닷길을 막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명량해전은 서해 해로차단을 위한 운명의 한판 승부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부하 장병을 모아 놓고 비록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고 독려했던 것이다.

하늘이 도왔는지 이순신은 본인 스스로 천행(天幸)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기적과 같은 승리를 일궈냈다. 전투 결과 조선 수군은 단 1척의 함선 피해도 없었던 반면에 일본 수군은 명량 해전에 투입된 133척 가운데 해전에 직접 참여한 31척이 모두 격파됐다. 어느새 날도 저물고 조류의 방향도 바뀌자 일본 수군은 더 이상의 해전을 포기하고 어란포 쪽으로 퇴각했다. 

이후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행적은 어떠했을까. 조선 수군은 승리했으니 명량에 머무르면서 서해의 물목을 지키고, 일본 수군은 패배했으니 해전을 포기하고 물러났을까. 그렇지 않았다. 조선 수군은 해전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해전 종료 후 즉시 뱃머리를 돌려 서해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온종일 교전하면서 장군전·철환·화살 등 전투용 피사체들을 거의 소진해 전투력이 현저히 약화됐기 때문이다. 또한 31척이 격파됐지만 여전히 170~270 척의 함선 세력이 건재한 일본 수군이 추격해 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함대 보존을 위한 일종의 작전상 후퇴였던 셈이다. 

조선 수군은 명량해전 당일 당사도(唐笥島)로 진을 옮기고, 9월 17일 어외도(於外島), 9월 19일 홍농(弘農) 앞바다, 9월 20일 위도(蝟島)를 지나 9월 21일 고군산도(古群山島)에 도착했다. 조선 수군을 추격한 일본 수군은 9월 20일께 전라우수영을 접수했다. 그리고 조선 수군을 추격해 무안(務安)까지 진출했다. 그리고는 법성포 이남의 바다와 섬, 육지 등에서 대대적인 살육과 방화, 포로잡이에 몰두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명량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이 곧바로 서해의 물목을 차단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명량해전에서 31척의 함선이 격파됐음에도 서남해안의 제해권을 일시적으로 장악한 것은 오히려 일본 수군이었다. 

일본 수군은 대략 9월 20일부터 10월 1일께까지 무안 등에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만행을 저지르다 명나라 수군의 파병 정보 입수, 일본 지상군의 직산 전투에서의 패배 등이 원인이 되어 수륙으로 호남을 공략하려던 애초의 목표를 포기하고 순천 이동(以東)의 남해 연안으로 전면 철수한다. 이순신의 조선 함대는 일본군의 철수를 확인하고 10월 3일 고군산도를 출발해 법성포, 위도를 지나 10월 9일 전라우수영으로 돌아온다. 22일 만의 귀환이었다. 이순신은 이후 조선 수군의 재건 작업에 본격 착수한다. 

이렇게 볼 때 명량해전 승리의 의의는 첫째, 조선 수군의 건재함을 대내외에 널리 알렸다는 것 둘째, 조선 수군이 재건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는 것 셋째, 결과적으로 서해의 바닷길을 차단함으로써 수륙으로 호남을 공략하려던 일본의 침략 전략을 원천적으로 무력화시켰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새롭게 이해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전 해사 교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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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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