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56645

'색골' 의자왕, 알고 보면 유능한 데다 효자였다
[백제사의 진실 ②] 의자왕에 대한 세 가지 오해
10.10.07 09:29 l 최종 업데이트 11.01.07 20:27 l 김종성(qqqkim2000)

▲  영화 <황산벌>에 등장한 의자왕(오지명 분, 왼쪽). ⓒ 씨네월드

백제 의자왕처럼 한국인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저렇게 하면 나라를 망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의자왕처럼 좋은 사례도 없다. 

의자왕(義慈王)의 '의자'는 사실 그 의자가 아닌데도, 왠지 의자왕이란 말만 들으면 편안히 의자에 앉아 삼천궁녀와 노닥거리다가 나라를 망친 한심한 인물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의자왕과 함께 연상되는 '삼천궁녀의 낙화암 투신' 이미지는 의자왕이 얼마나 몹쓸 인간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의 인식 속에 있는 의자왕은 '무능하고 인간이 좀 모자라며 색이나 밝힌 왕'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런데 '①무능하고 ②인간이 좀 모자라며 ③색이나 밝혔다'에서 ①'무능하다'는 이미지가 의자왕의 실제 이미지와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한국측 사료인 <삼국사기>나 중국측 사료인 <구당서> <신당서> 같은 사료들에서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나라 야망에 맞선, '불량 군주' 의자왕

팍스 시니카(중국 중심의 세계)를 목표로 온 사방으로 힘을 팽창한 당나라가 서쪽의 돌궐·토욕혼·고창국·토번 등에 대한 제압을 끝내고 동쪽으로 고개를 돌린 시점인 서기 641년에 등극한 의자왕은 그로부터 20년 동안이나 당나라의 동진을 저지하는 데에 성공했다. 

고구려보다는 빨리 굴복했지만, 세계적 차원에서 보면 백제는 상당히 늦게 굴복한 편이었다. 백제와 고구려를 제압한 다음에야 당나라가 동아시아의 '유일 초강대국'이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의자왕은 당나라의 야망에 맞서 최후까지 투쟁한 '불량 군주' 중의 하나였다. 

또 즉위 이듬해인 의자왕 2년(642) 7월 한 달 동안에 허리케인 같은 기세로 신라의 40여 성을 휩쓸고 간 사실, 멸망 5년 전인 의자왕 15년(655)에도 고구려·말갈을 끌어들여 8월 한 달 동안 신라의 30여 성을 점령한 사실 등은 의자왕이 무능하기는커녕 도리어 상당히 유능하고 위협적인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결국에는 나라를 잃어 할 말이 없게 됐지만, 660년 백제의 최후 이전까지만 해도 의자왕은 신라는 물론 당나라도 부담을 느끼는, 꽤 유능한 군주였다. 그런 개인적 유능함을 상쇄하는 여타 요인들이 백제 최후의 날에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에 나라가 멸망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중국인들은 의자왕을 '해동증자'라 불렀다

다음으로, '②인간이 좀 모자라다'는 이미지는 의자왕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삼국사기>의 '의자왕 본기'(본기는 '제왕의 연대기')나 <구당서> 및 <신당서>의 '동이열전'(열전은 '인물이나 외국에 관한 이야기') 등에서는 의자왕을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 '동방의 증자'라고 부른 것이다. 

해동증자라니! 삼천궁녀와 노닥거린 '천하의 난봉꾼' 이미지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칭호다. 공자의 도를 계승하여 유교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증자를 의자왕과 연결시키다니, '의자왕은 난봉꾼'이라고 교육받은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인들이 의자왕을 증자에 빗댄 것은 두 사람이 서로 닮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효도의 모범 중 하나로 손꼽히는 증자의 특성이 의자왕에게서도 보인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논어> '태백' 편을 보면, 증자가 부모를 얼마나 끔찍이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증자에게 질병이 생기자, 문하의 제자들을 불러 말했다. '내 손을 보고 내 발을 보아라. <시경>에서 말하기를, 전전긍긍하여 깊은 못에 임한 듯이 하고 얕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라고 했다. 이제야 나는 (그런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알겠노라.'"

'질병이 생겼다'는 것은 목숨이 위태해져서 증자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그처럼 죽음이 예견되는 상태에서 증자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발이 온전한 것을 확인시킨 뒤에 '이제야 나는 전전긍긍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즉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인식 하에 평생 동안 전전긍긍하며 자신의 몸을 철저히 관리한 증자는, 죽음에 임박해서야 자신이 그 의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가 제자들에게 손발을 보인 것은 자신이 그 의무를 성실히 이행했음을 확인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자기 몸을 관리할 때조차 어버이를 생각했다는 이 일화는, 증자가 얼마나 효성스러운 인물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증자를 의자왕에 빗댄 것은 의자왕이 증자처럼 효성스러운 인물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백제뿐만 아니라 당나라에서도 그렇게 평가한 것을 보면, 의자왕의 효성이 국제적으로 얼마나 화젯거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의자왕은 부모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형제들에 대해서도 극진한 우정을 보였다고 한다. 

우리는 의자왕이 '여자와 친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의 의자왕은 '어버이와 친한 인물'이었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인간 됨됨이를 평가하는 최고의 기준은 효성이었다. '인간이 좀 모자라다'의 이미지가 의자왕에게 맞지 않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효성이 지극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의자왕은 '꽉 찬 사람' 혹은 '됨됨이가 제대로 된 사람'이었다. 

의자왕, 술과 이성에 빠진 건 사실이지만...

▲  충청남도 부여군 백마강 강변의 낙화암. ⓒ 문화재지리정보서비스

마지막으로, ③'색이나 밝혔다'라는 혐의는 어떠할까? 의자왕이 술과 이성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는 사실인 것 같다. <삼국사기> '의자왕 본기'에 따르면, 의자왕 16년(657)에 1급 관원인 좌평 성충이 "술과 궁녀를 멀리하시라"고 충고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된 적이 있다. "의자왕이 궁녀와 더불어 황음탐락(荒淫耽樂)하여 술 마시기를 그칠 줄 모르므로" 성충이 그런 충고를 한 것이다. 

<삼국사기>가 기본적으로 백제에게 불리하게 기록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의자왕이 술과 이성을 좋아했다는 기록을 무조건 배척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기록이 허위라는 것을 입증할 만한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또 사관들이 역사를 왜곡할 경우에도, 대개는 최소한의 근거는 갖고 그렇게 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황음탐락'할 정도까지는 안 갔더라도, 의자왕이 어느 정도는 그런 빌미를 제공했기에 그 같은 기록이 나올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상고사>의 저자인 신채호도 <삼국사기> 기록을 어느 정도는 신뢰한 듯하다.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인천 앞바다 덕적도에 당도해서 신라 장군 김유신 등과 함께 전략을 협의하는 동안에도 의자왕은 밤늦게까지 연회를 벌였고, 백제 조정에서 나당연합군에 대한 대책을 결정한 뒤에도 궁녀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술과 이성에 빠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삼천궁녀와 희희낙락할 정도까지의 퇴폐적 상태까지는 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궁녀들'과 먹고 마시며 즐겼다는 근거는 있어도 '삼천궁녀'와 그렇게 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백제 같은 작은 나라에서 삼천궁녀를 둔다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채호도 삼천궁녀 이야기만큼은 믿지 않았다

우리는 백제보다 영토도 훨씬 더 크고 인구도 훨씬 더 많았던 조선에서도 궁녀 숫자가 결코 700명을 넘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의 실록을 보면, 각 시기의 왕들이 궁녀 숫자를 늘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도 궁녀의 숫자는 항상 몇 백 명 선에서 머물렀다. 

태종 14년(1414) 6월 18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제3대 태종 때에는 궁녀 숫자가 몇 십 명에 불과했고, 성종 1년(1470) 2월 6일자 <성종실록>에 담긴 세종시대에 대한 회고에 따르면 제4대 세종 때에는 궁녀 숫자가 100명을 넘지 않았으며, 인조 14년(1636) 8월 1일자 <인조실록>에 따르면 제16대 인조 당시의 궁녀 숫자는 230명이었다. 

또 소설이라고도 하고 전기라고도 하는 <인현왕후전>에 따르면 제19대 숙종 때의 궁녀 숫자는 300명 정도였고, 실학자인 이익의 <성호사설>에 따르면 제21대 영조 때의 궁녀 숫자는 최고 684명이었다. 구한말인 고종 때도 궁녀 숫자는 결코 영조 때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보다 국토나 인구 측면에서 훨씬 더 작은 백제에서 삼천궁녀를 두었다는 것이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 이야기인지를 잘 보여준다. 

의자왕이 술과 이성을 좋아했음을 인정한 신채호 역시 삼천궁녀 이야기만큼은 믿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조선상고사>에서, 낙화암에서 투신한 사람들을 "왕후와 왕의 첩들과 태자의 처첩"으로 한정했다. 삼천궁녀가 아니라 왕·태자의 처첩들이 낙화암에서 투신했다고 본 것이다. 

'천자에게는 후궁 미인이 3천 명이 있다' 
 
위와 같이, 기록으로 보나 이치적으로 보나 삼천궁녀 이야기를 입증할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런 이야기가 마치 진실인 것처럼 왜곡되어 전달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삼천궁녀 이야기는 이미 고대로부터 중국인들 사이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것이었다. 오랜 옛날부터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천자에게는 후궁 미인이 3천 명이 있다'라는 관념이 존재했다. 한무제가 삼천궁녀를 거느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중국인들의 영향을 받아 조선시대 사람들도 "중국 천자는 삼천 궁녀를 거느린다"는 말을 곧잘 하곤 했다. 이런 사례를 태종 이방원과 이숙번의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태종 14년(1414) 6월 18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그 해에 가뭄이 들자 태종 이방원은 궁녀 숫자를 축소할 생각을 품었다. 시집 못 가는 궁녀들의 한이 쌓이고 쌓이면 우주만물의 운행이 지장을 받아 인간사회에 천재지변이 든다는 관념이 그 시대에는 존재했다. 그래서 천재지변을 물리치려면 궁녀를 방출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종이 궁녀를 줄이려 하자, 최측근인 이숙번이 반대하고 나섰다. 

"중국의 천자에게는 궁녀가 3천 명이 있고 제후들에게는 적어도 20~30명이 있다고 합니다. 전하께서는 존귀하신데도, 궁녀가 수십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어찌 많다고 하여 내보낼 수 있겠습니까?"

물론 당시의 중국 황제인 명나라 황제가 실제로 삼천궁녀를 거느린 것은 아니다. 한무제가 삼천궁녀를 거느렸다는 이야기 역시 확인되지 않았다. 한무제 이후의 역대 중국 황제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중국 황제는 삼천궁녀를 거느린다'는 말이 습관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만리장성은 1만리가 아니고, 삼천궁녀는 3천명이 아니다?


▲  국립공주박물관에서는 '2010 세계대백제전'의 일환으로 '백제의 관' 전시회를 열고 있다. ⓒ 장재완

그럼, 존재하지도 않는 삼천궁녀 이야기를 습관적으로 거론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고대 동아시아인들의 숫자 관념이 상당히 추상적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는 1만 리가 아닌데도 만리장성이라고 부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동아시아인들은 많거나 큰 것을 가리킬 때에 천이니 삼천이니 만이니 억이니 하는 숫자들을 '별 뜻 없이' 습관적으로 사용했다. 어떤 경우에는 억(億)의 1만 배인 조(兆)까지 들먹이면서 "억조창생(수많은 백성)을 굽어 살피소서!"하는 식의 말까지 했다. 1억×1조의 인구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위와 같은 경우에,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런 숫자들이 실제적인 천이나 삼천이나 만이나 억이나 조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크거나 많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뿐이었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들의 대화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내가 수천 번이나 잔소리를 했건만!" 등등.

'천자에게는 후궁 미인이 3천 명이 있다'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이 말은 실제로 천자에게 삼천궁녀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천자에게는 그 정도로 여자가 많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과거는 물론 오늘날의 중국인들도 이 이야기를 실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동아시아인들의 추상적인 숫자 관념이 이 이야기의 경우에도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방원과 이숙번도 그런 뜻으로 삼천궁녀란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명나라 황궁에 실제로 삼천궁녀가 있다고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명나라 황궁에는 그 정도로 궁녀가 많다는 의미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의자왕이 삼천궁녀에게 빠져 나라를 망쳤다"는 이야기를 최초로 만들어낸 사람들도 '의자왕에게 실제로 삼천궁녀가 있었다'는 의미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의자왕 주변에 여자가 많았음을 강조하기 위해 그런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이러던 것이, 나중에는 의자왕에 대한 악의적 비난과 뒤섞여, 의자왕이 실제로 삼천궁녀에게 빠졌던 것처럼 와전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의자왕 본인의 책임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술이나 이성과 관련하여 자신을 좀 더 철저히 관리했다면, 이렇게까지 '덤터기'를 쓰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자왕 올바로 이해해야, 백제 멸망 이유도 제대로 보인다

지금까지 우리는 의자왕의 이미지 중에서 세 가지인 '①무능하고 ②인간이 좀 모자라며 ③색이나 밝혔다'란 혐의를 살펴보았다. 이 중에서 '무능함'이나 '인간이 좀 모자람'의 경우에는 의자왕의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멀고, '색을 밝힘'의 경우에는 이성에게 어느 정도 빠진 것은 사실이지만 삼천궁녀와 유흥을 즐기는 수준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있지도 않은 결점을 들어 의자왕을 비판하는 것은, 의자왕 본인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무익하고 유해하다. 왜냐하면, 의자왕을 엉뚱하게 이해하면, 의자왕 때에 백제가 멸망한 이유에 관해서도 엉뚱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의자왕을 올바로 이해해야만 백제가 멸망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역사로부터 좀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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