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T7b135

<25>이순신의 리더십(7): 옳은 일은 과감하게, 어려울 땐 선두에 서는 용기(勇氣)를 지녀라
어떤 상황서도 의롭고 옳은 것은 과감히 실천
2012. 07. 02   00:00 입력 | 2013. 01. 05   08:07 수정

여수 진남관의 나무기둥.


여수 진남관의 석인상.


여수 충민사(1601년에 건립된 최초의 사액사당).

‘손자병법’을 주석한 두목(杜牧)은 용기를 “승리를 결단하고 기세에 편승하여 머뭇거리지 않는 것”이라고 했고, 왕석은 “의(義)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고 굳세게 행동에 옮기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공자는 그의 어록인 ‘논어’에서 “의(義)를 보고 행하지 않는다면 용기가 없는 것”이라고 했고 또 “군자(君子)가 용기만 있고 의(義)가 없으면 반란의 수괴가 되고, 소인(小人)이 용기만 있고 의가 없으면 도적이 된다”라고 해 용기와 의(義)의 상관관계를 설명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진정한 용기의 이면에는 반드시 선과 악, 정의와 불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용기는 어떤 상황에서도 의로운 것, 옳은 것, 선한 것을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치에 어긋나면 어명이라도 불복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면서 사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살다 보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불이익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살라’는 유학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려고 한 이순신은 관료 생활을 하면서 종종 직속상관들과 갈등 관계에 놓였다. 훈련원에 근무할 때 병조정랑 서익이 순서를 건너뛰어 아는 사람을 진급시키려고 하자 “아래에 있는 자를 승진시키면 마땅히 승진해야 할 사람이 승진할 수 없으며, 법 또한 고칠 수 없다”고 하며 직속상관의 의도를 무력화시킨 사례나 발포 만호 시절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발포 관청의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 가려 하자 “관청의 물건이므로 사사로이 베어 가게 할 수 없다”고 거절한 사례 등은 이순신의 삶의 태도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순신으로부터 무안(無顔)을 당한 직속상관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전라도 발포 만호로 근무하던 시절 이순신은 처음으로 파직을 당하는데 바로 훈련원 근무시절의 직속상관이던 서익이 감찰관으로 와서 불리한 보고서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치에 어긋나면 비록 임금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따르지 않은 이가 이순신이었다. 정유년(1597년) 1월 임금인 선조는 일본인 요시라(要時羅)가 제공한 정보에 기초해 대마도에서 건너오는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라는 명령을 이순신에게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믿고 조선 수군을 출동시킬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바닷길이 험난하고 또한 적이 반드시 여러 곳에 복병을 숨겨두고 기다릴 것이니, 배를 많이 거느리고 간다면 적이 알지 못할 리 없고, 배를 적게 거느리고 가다가는 도리어 습격을 당할 것입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정유재란 직전까지 조선 수군은 남해 해로를 일본군에게 내 주지 않았다. 그 결과 함경도와 평양까지 진격한 일본의 선봉 주력부대들은 보급에 막대한 차질이 생겨 남해 연안으로 후퇴했을 뿐만 아니라 곡창인 호남이 보전됨으로써 조선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뢰할 수 없는 정보를 믿고 출동했다가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는 조선 수군이 패하면 그 뒤를 아무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이순신의 생각이었다. 이순신은 결국 이런 항명(抗命)이 빌미가 되어 정유년(1597년) 1월 통제사에서 파직되고 죽을 고비에 직면한다. 이순신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결과를 예측하고도 “의를 보고 행하지 않는다면 용기가 없는 것”이라는 유학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이순신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런 용기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초급 관료 시절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으로 근무할 때 함경도 감사 이후백(李後白)이 각 진을 순시하면서 변방 장수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처벌받지 않은 자가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이후백은 변방 장수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이후백은 이순신에게만은 아주 잘 대해 주었다. 그러자 이순신은 변방 장수들을 대변하는 직언(直言)을 올린다. “사또, 사또의 형벌이 너무 엄해서 변방의 장수들이 손발 둘 곳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후백은 “그대 말이 옳다. 그러나 나라고 어찌 옳고 그른 것을 가리지 않고 하겠는가?”라고 답했다. 

1582년(38세) 여름, 이순신은 한성에 있는 훈련원에 두 번째로 근무하게 됐다. 정승 류전(柳琠)이란 사람이 이순신에게 좋은 화살 통이 있다는 말을 듣고 탐을 냈다. 어느 날 함께 활 쏠 기회가 있었는데 류전은 이순신에게 넌지시 화살 통을 달라고 했다. 이에 대해 이순신은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예를 갖추면서 그 불가함에 대한 이유를 여쭈었다. “대감, 제 화살통을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남들이 대감이 저에게 화살통을 받은 것을 무어라 할 것이며, 소인이 드린 것을 또 무어라 하오리까. 화살 통 하나 때문에 대감과 소인이 함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매우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정승 류전도 “그대 말이 옳다”하고 이순신의 의견을 수용했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예를 갖춰 직언하는 이순신, 그 직언을 수용하는 감사 이후백(李後白)이나 정승 류전(柳琠),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선진 일류사회의 관료 생태계의 모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진정한 용기는 대의명분 전제돼야

일반적으로 용기라고 하면 전쟁터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해 싸우는 것을 상상한다. 물론 그것도 용기다. 전우를 위해, 나라를 위해, 국민을 위해,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친다는 대의명분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정한 용기는 반드시 그 저변에 의리, 정의, 옮음, 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전제돼야 한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있었던 가미카제형 공격 행위를 용기 있는 행위로 볼 수 없는 것은 그 행위 속에 인류 평화, 정의의 승리 같은 대의명분이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 의리(義理)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과감하게 행동에 옮긴 이순신,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만들기 위해 선두에서 용전 분투하다 장렬히 전사한 이순신, 그의 참된 용기를 되새겨야 할 오늘이다.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전 해사 교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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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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