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ThYHw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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菊圃瑣言이 검색이 안 되는 것으로 보아 국포쇄록 일 듯...

<31>이순신의 리더십 (13) 원활한 소통으로 이성적 공감을 불러일으켜라
2012. 08. 13   00:00 입력 | 2013. 01. 05   08:16 수정

열 왜적 두렵지 않게… ‘救國의 마음’ 울렸다

고금도 충무사 전경.

리더십에서 리더와 구성원 사이의 허심탄회한 수평적 대화나 논리적 설득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통해 이성적 공감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리더와 구성원이 상호 이성적으로 공감이 되면 구성원은 자발적으로 조직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역량을 쏟아붓는다. 심지어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도 아무런 조건 없이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이 리더십에서 원활한 소통이 강조되는 이유다. 이른바 사람은 천성적으로 의리(義理), 명분(名分), 이치(理致)에 부합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성적 존재’라는 인간관에 기초한 리더십이다.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는 동료 수사나 부하 장수들과 대화를 나눴다는 내용이 수없이 등장한다. “식후에 충청수사 정걸과 광양 현감 어영담이 와서 종일토록 군사 일을 이야기하였다.”(계사년, 6월 4일 일기) “아침 후에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적을 토벌할 것을 의논하는 참에 가리포 첨사도 오고 경상우수사도 와서 의논했다.”(계사년, 6월 25일 일기) “늦게 전라우수사, 경상우수사 및 두 조방장, 충청 우후, 경상 우후, 가리포 첨사, 평산포 만호 등 열 아홉 장수들과 함께 모여 이야기했다.”(병신년, 8월 15일 일기) 대화는 감성도 감성이지만 기본적으로 이성에 호소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소통 방법이다. 이 방법은 일정한 정도의 지식을 지닌 식자층이나 리더 계층에 매우 큰 효과가 있다. 

대의명분에 기초 이성적 호소 

이순신은 부하 장수들과의 소통을 위해 어떤 방법을 즐겨 사용했을까. 첫 번째로 소개할 것은 임진년(1592년) 첫 출동을 앞두고 보여 준 이순신의 의사결정 사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우수사 원균은 4월 14일 저녁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순신은 부하 장수들을 불러 모아 이 문제를 토론토록 하였다. 많은 장수들이 전라도의 수군은 전라도를 지키는 것이 마땅하며 굳이 경상도 해역으로 출동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때 군관 송희립이 “큰 적들이 국경을 치고 들어와서 그 형세가 마구 뻗쳤는데 가만히 앉아서 외로운 성만 지킨다고 혼자 보전되어질 리도 없으니 나가 싸우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行錄)라고 했다. 또 녹도 만호 정운은 “신하로서 평소에 국은(國恩)을 입고 국록(國祿)을 먹다가 이런 때에 죽지 않고 어떻게 감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것이오.”(行錄)라고 하면서 송희립의 주장을 거들었다. 부하 장수들의 갑론을박을 조용히 듣고 있던 이순신은 녹도 만호 정운의 말을 듣고는 매우 기뻐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국가가 위급하게 된 이때 어찌 다른 도의 장수라고 핑계하고서 물러나 제 경계만 지키고 있을 것인가. 내가 시험 삼아 물어 본 것은 우선 여러 장수들의 의견을 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다만 나가서 싸우다가 죽는 것밖에 없다.”(行錄) 이순신은 경상도 해역으로의 출동 여부를 놓고 부하 장수들의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고는 현재의 상황에서 무엇이 최선의 방책인지를 도출했다. 나라를 지키는 데 전라도·경상도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이순신의 최종 결정에 경상도 해역으로의 출동을 반대했던 장수들도 감동해 죽기를 맹세하면서 전투의지를 불태웠다고 전해진다.

두 번째는 칠천량 해전 패배 이후 다시 통제사에 임명됐을 때의 사례다. 삼도 수군을 장악하기 위해 이순신이 전라도 회령포에 도착했을 때 남은 전선은 고작 10여 척에 불과했다. 여러 장수들은 전투의지를 잃고 회피할 꾀만 내고 있었다.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일장 연설을 했다. “우리들이 임금의 명령을 함께 받들었으니 의리상(義理上)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다음에야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아까울 것이냐.”(行錄) 이순신의 이 말을 들은 부하 장수들은 모두 감동했다고 한다. 이성적 공감을 통해 부하 장수들의 마음을 다잡은 이순신은 명량의 좁은 물목을 해전 장소로 택하고 일본 수군과의 해전을 준비한다. 명량해전은 절대 열세의 해전이었다. 그렇다고 회피할 수도 없는 해전이었다. 명량이 뚫릴 경우 남해, 서해로 이어지는 일본의 보급로가 확보되고, 보급로가 확보되면 조선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고금도 이순신 가묘 자리 월송대.

죽음 각오하게 한 소통이 승전 비결

명량해전 하루 전 이순신은 또 부하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병법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고, 살려고 꾀를 내고 싸우면 죽는다’라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정유년, 9월 15일 일기)라고 하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줄 것을 당부한다. 이 내용 속에는 명량해전의 승리 요인의 비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조선 병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게 한 이순신의 리더십 그리고 좁은 물목을 해전 장소로 택해 절대 열세의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던 이순신의 탁월한 전략전술이 비밀 아닌 비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부하 장수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이성적 공감을 불러일으킨 이순신의 소통의 리더십이야말로 또 하나의 중요한 승리 요인이었던 것이다. 

다음의 자료는 이순신과 원균의 리더십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순신이 진영에 있을 때 운주당(運籌堂)을 짓고 여러 장수와 더불어 그 속에 모여 일을 의논했는데, 원균은 … 울타리를 둘러치고 술에 취하여 일을 살피지 않으니 모든 군심(軍心)이 이반되어 모두들 ‘적이 오면 달아날 따름이다’ 라고 하였다.”(菊圃瑣言) 통제사 원균과 그의 지휘관, 참모 사이의 불통(不通)은 이미 칠천량 해전의 패배를 암시하고 있었다. 소통의 달인 이순신과 함께했을 때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던 조선 수군 장병들이 불통의 리더 원균의 지휘를 받으면서부터는 도망가기에 급급한 오합지졸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수군의 칠천량 해전에서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는 리더와 구성원 사이의 원활한 소통, 이성적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 리더십 요소인지를 웅변으로 보여준다.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전 해사 교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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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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