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0515050606906


"우린 참상을 알릴 유일한 외부인.. 끝끝내 광주를 포기할 수 없었다"

김주연 입력 2020.05.15. 05:06 댓글 201개


5·18 당시 외신 기자와 시민들 소통 도운 美 평화봉사단원들의 생생한 증언


[서울신문]1979년 4월 한국에 파견된 제45기 미국 평화봉사단 단원들은 광주와 전남 나주, 경기 안양 등 전국 곳곳의 병원과 보건소에서 결핵이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일했다. 영화 ‘택시운전사’로 익숙한 독일 제1공영방송 위르겐 힌츠페터 등 외신 기자들이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들과 대화할 수 있도록 통역을 맡은 것도 이들이다. 한국 정부의 항의로 평화봉사단은 조기에 해산됐지만, 단원들은 자신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 국내외에 광주의 진실을 전했다. 이들은 40주년을 맞아 광주를 방문할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오지 못했다. 서울신문은 14일 서면 인터뷰로 들은 데이비드 돌린저, 폴 코트라이트, 윌리엄 에이머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폴 코트라이트는 당시 썼던 일기를 모아 최근 ‘5·18 푸른 눈의 증인’을 펴냈다. 본인 제공


전남 영암의 작은 마을에서 결핵 환자를 돌보던 돌린저는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5월 16일 광주로 향했다. 18일 계엄령 선포 소식을 들은 돌린저는 이튿날 영암으로 돌아갔지만 21일 다시 광주를 찾았다. 한센인 자활촌인 나주 호혜원에서 봉사하던 코트라이트는 19일 환자를 병원에 데려가려고 광주로 향했다. 그는 “팀 원버그 등 동료로부터 전날 군인들이 학생들을 구타했다는 사실을 들었다”면서 “전화는 먹통이었고 광주로 유학 간 자녀를 걱정하던 나주 시민들을 대신해 다시 광주로 갔다”고 회상했다.


광주로 가는 길목마다 군용 헬기가 낮게 날았다. 도로 곳곳에 총알 박힌 버스와 승용차가 나뒹굴었다. 미국 대사관은 평화봉사단원들에게 광주에서 나오라고 명령했다. 단원들은 따르지 않았다. 코트라이트는 “광주 시민들이 참상을 알릴 유일한 외부인인 우리가 그들을 포기했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스러웠다”고 말했다.


윌리엄 에이머스는 1999년 5·18을 다룬 최초의 외국소설 ‘기쁨의 씨앗’을 썼다. 5·18 기념재단 제공


서슬 퍼런 계엄군의 언론 검열에 광주는 고립됐다. 정치적인 의사 표현은 평화봉사단원의 금기였다. 하지만 “통역은 외신 기자와 시민들의 의사소통을 돕는 것”이라고 단원들은 생각했다. 원버그는 힌츠페터를, 코트라이트는 타임지 사진기자인 로빈 모이어의 통역을 맡아 전남도청, 전남대병원을 돌아다녔다. 돌린저는 AP통신 기자 테리 앤더슨의 입과 귀가 됐다.


5월 24일, 전남도청에 안치된 시신은 대부분 청년이었다. 그중 나이 든 여성의 시신도 있었다. 모이어는 “이분은 어떻게 사망했나”라고 물었다. 한 의대생은 “군인들이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죽었다”면서 “당신들이 여기를 처음 방문한 외국인 기자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반드시 세계에 알려 달라”고 말했다. 코트라이트는 헬기 사격 사실을 부정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쓰레기라고 말해 주고 싶다”면서 “언제든 내가 본 일을 증언하겠다”고 했다.


코트라이트가 눈 내린 전남 나주 호혜원에서 찍은 사진. 본인 제공


코트라이트는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알리려고 나주로 향했다. 군인들이 길목이란 길목은 다 막고 있었다. 코트라이트는 자전거를 타고 산을 넘었다. 그는 “매복하던 군인을 봤을 때는 식은땀이 났다”고 기억했다. “서울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가서 모든 일을 말하겠다”는 코트라이트에게 보건소장은 택시 운전사 문성남씨를 소개했다.


문씨는 “미국인인 게 잘 보이게 앞자리에 타라”고 했다. 호혜원에서 나주 터미널로 향하는 동안 수차례 군인들이 차를 세웠다. 그때마다 코트라이트는 차에서 내려 떨리는 손을 감추며 “평화봉사단도 미국 대사관의 소속 기관이니 나는 미국 대사관 직원”이라고 설득해 위기를 모면했다.


데이비드 돌린저가 한국에서 ‘임대운’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자료. 본인 제공


평화봉사단원들은 5·18 민주화운동이 끝나자 추궁을 받았다. 한국 정부가 단원들의 활동에 항의했기 때문이다. 돌린저는 “미국 대사관은 단원들이 정치적 성명을 내기 위해 광주에 남았다고 (본국에) 전보를 보냈지만 이는 거짓”이라며 “우리는 미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광주를 떠나는 것이 머무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며 한국인 친구들이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한 일은 자원봉사자로서, 인간으로서 마땅한 도리였다”고 했다.


에이머스가 한국 시민과 함께한 모습.5·18 기념재단 제공


전남대병원에서 봉사하며 모든 과정을 지켜본 원버그는 5월 27일 군의 진압작전 직후 도청에 들어가 시신을 수습했다. 단원 중 한국어를 가장 잘했던 그는 1987년 국외 최초로 5·18을 분석한 영문 보고서 ‘광주항쟁: 목격자의 견해’를 발표했다. 안양에 머물면서 광주에서 활동한 단원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에이머스는 1999년 최초의 5·18 외국소설 ‘기쁨의 씨앗’을 썼다. 에이머스는 “나에게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느리고 고통스러운 무수한 영웅의 이야기”라고 했다. 코트라이트는 당시 썼던 일기를 모아 이달 초 ‘5·18 푸른 눈의 증인’을 펴냈다.


코트라이트는 “5·18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토대였고 모든 국민이 자랑스러워해야 할 역사”라면서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진실을 기억하는 일이 그들에게 치유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5·18 묘지에 묻히길 바란다고 밝혔던 돌린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광주의 직접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점점 늙어간다”면서 “모든 사람들이 본 것을 말하고 고통에 공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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