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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동 44호분 모형사진이 없어 비슷한 것으로 가져왔습니다.

가야가 살아온다 <6>
제1부 낙동강의 여명 ⑤ 왕과 후예

비운의 양왕(讓王)

경남 산청읍에서 서북쪽으로 40여리 떨어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인 1001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왕산(王山) 기슭에 돌탑 형태의 신비한 돌무더기를 만난다. 가파른 경사면에 수만개의 돌덩이를 차곡차곡 7개단으로 쌓아올린 모습은 이집트 피라미드를 연상케한다.
 

경남 산청의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전 구형왕릉. 비운의 가야왕 전설이 전해지는 가야사 미스터리의 현장이다

전면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양왕’은 나라를 넘겼다 해서 붙은 별칭으로, 금관가야의 마지막왕인 구형왕을 일컫는다.

산청(山淸)의 깊은 산골짜기에 만들어진 이 ‘석총(石塚)’이 가야 마지막 왕의 무덤이라면, 역사의 뒤켠에서 헤매온 가야사 만큼이나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왕릉인지 석탑인지 제단인지, 또 왕릉이라면 구형왕릉이 맞는지는 누구도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신비한 유적(사적 제 214호)이 가야와 깊이 관련돼 있다는 사실이다. 이 석총은 가야사가 풀어야할 미스터리 중 하나다.

삼국사기’의 승자적 기록

금관가야의 멸망에 대해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이렇게 쓰고 있다.

‘법흥왕 19년(532년)에 금관국주 김구해(金九亥=구형왕)가 비(妃)와 세아들, 즉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과 함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매, 법흥왕은 예로 대접하고 상등의 벼슬과 함께 금관국을 식읍으로 주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다르게 쓰고 있다. ‘신라 진흥왕이 군대를 일으켜 금관국을 쳤는데, 병력이 부족한 구형왕이 대적할 수 없어 왕자들과 함께 항복했다…’.

반면 ‘일본서기’에는 ‘남가라(금관가야)는 (신라의 침공에)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의탁할 곳을 몰랐기 때문에 멸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를 종합해 신라가 무력으로 금관가야를 정벌한 것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며, 어느 정도 대항을 하다 자진귀속 형식을 취하자 신라가 파격적인 대우를 한 것으로 본다.

베일에 싸인 왕들

가야 각국 왕들의 실체는 온통 미스터리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부분적인 기사가 비치지만 편린일 뿐이어서 왕실세계(王室世系) 복원은 어림도 없다.

가야의 기록은 남의 나라 사서에 보다 구체적으로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안라(安羅)와 가라(加羅)에 왕이 있고, 다른 소국에 한기(旱岐)라는 지배자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는 ‘한(韓)에는 대국과 소국이 있고 최고 지배층으로서 주수(主帥)가 있다’고 알려준다.

사료에 기대어 파악할 수 있는 가야왕은 전·후기 가야연맹을 통틀어 열서너명 정도. ‘삼국유사’에 따르면 금관가야는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나라를 세워 532년에 10대 구형왕이 나라를 넘길 때까지 490년간 존속한 것으로 돼 있다. 2대부터 9대까지 거등-마품-거질미-이시품-좌지-취희-질지-겸지라는 이름의 왕이 나오지만 설화형식의 전승이 많아 기록을 온전히 믿기도 어렵다.

대가야 왕조는 이보다 더 어둡다. ‘삼국사기’는 대가야의 멸망을 언급하면서 ‘16명의 왕이 520년간 통치했다’는 식으로 짤막하게 다루고 있다. 그나마 이름이 드러나는 왕은 시조인 이진아시왕(혹은 뇌질주일)과 9대 이뇌왕, 16대 도설지왕 정도다. 대가야의 전성기인 5세기말, 중국 남제로부터 ‘보국장군본국왕’에 제수됐다는 가라왕(加羅王) 하지(荷知)는 누구를 말하는지 여전히 논란거리다.

경북 고령의 왕릉전시관에 모형으로 복원된 지산동 44호분 내부모습 . 고분에서 가야왕의 이름이 밝혀진 사례는 아직 없다.

가야지역의 수많은 고총고분들도 왕들의 실체에 대해서는 대답을 해주지 않고 있다. 부산대 신경철(고고학과) 교수는 “김해와 고령 등지에서 많은 고분발굴이 있었지만 왕묘로 추정되는 곳에서조차 주인공이 밝혀진 예는 없다”고 말한다.

신라에서 빛난 가야인들

가야멸망 뒤 나라잃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길이 막막하다. 학자들은 신라의 복속정책 사례를 들어 많은 가야인들도 사민(徙民=강제이주) 되었거나 차별대우를 받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신라에 들어가 명성을 떨친 가야인도 있다. 금관가야 출신의 김무력(金武力)과 김유신(金庾信), 대가야 출신의 우륵(于勒)과 강수(强首)가 그 대표적 인물들. 이들은 문 무 예에서 신라의 ‘젊은 피’가 되어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은 신라왕실에서 가야계 ‘신김씨(新金氏)’를 형성할만큼 위상이 두드러진다.

우륵은 가야금을 창시하고 가야 지방의 12곡을 정리한 인물로, 진흥왕의 후원 아래 신라 대악(大樂)을 만들었다.

강수는 신라 통일기에 활동한 유학자이자 문장가였다. ‘삼국사기’ 강수전에는 무열왕이 강수의 문장력에 감탄해 출신지를 묻자 ‘임나가량인(任那加良人)’이라 대답하는 대목이 나온다. 학자들은 임라가량을 대가야의 한 지역으로 파악한다.

부산대 백승충(역사교육) 교수는 “강수는 가야출신이면서 육두품 이하의 신분으로 유학·문장학을 가지고 신라사회에 진출한 최초의 신흥 유교관료였다”라며 “그의 입신이 갖는 사회·사상사적 의미는 크다”고 평한다.

경북대 주보돈(사학과) 교수는 “우륵과 김유신, 강수 등은 가야의 수준높은 문화를 대변하는 만큼 이를 통해 가야의 국가발전 수준도 역으로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 특별취재팀/박창희


<6> 구형왕릉의 수수께끼

“나라를 보전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속에 묻히랴. 차라리 돌속에 들어가서라도 가야 백성을 지키겠노라….”

금관가야의 구형왕이 죽음을 앞두고 별궁이 있었다고 전하는 지리산 자락 수정궁(水晶宮)에서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말이다. 물론 전설이다. 사뭇 비장감을 주는 이 전설은 그러나 ‘삼국사기’ 기록과는 배치된다.

전설은 또 있다. “나라가 망하려 하자 구형왕은 지리산으로 피해 들어와 천연요새인 국(國)골에서 도성을 세우려 했다는 것이지요. 왕등재 일원에서도 토성을 쌓고 신라에 항전했을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요.” 산청의 향토사 연구가 조종명(62·산청군 삼장면 대포리)씨의 이야기다.

지리산 동부권역에는 구형왕에 얽힌 지명과 전설이 유난히 많다. 국골과 추성산성터 주변의 두지터(식량저장고), 구형왕이 올랐다는 왕등재와 그 일대의 토성, 전(傳)구형왕릉이 위치한 왕산(王山), 구형왕을 향사하는 덕양전(德讓殿·문화재 자료 제50호),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 장군의 훈련터 등이 그것이다.

조종명씨는 “산청지역에 전해지는 구형왕 전설은 부분적으로 과장·미화된 측면도 있겠지만 가야의 흔적을 말해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전(傳)구형왕릉과 관련된 후대의 사료도 있다. 1800년에 편찬된 ‘가락삼왕사적고’에 인용된 ‘왕산사기(王山寺記)’에 따르면, 신라에 항복하여 금관군도독이 된 구형왕은 말년에 산청의 왕산에 가서 살다가 죽어 장사 지내되 돌을 쌓아 언덕을 만들었다고 돼 있다.

가야사 연구자들은 “구형왕릉이 진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산청에 있었던 가야 소국의 역사가 비운의 구형왕 전설과 중첩돼 전승되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알듯 모를듯 안개를 피우는 지리산 자락의 가야 자취는 체계적인 학술적 규명작업을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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