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08723

정도전 없어진 조선, 얻은 것과 잃은 것은?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드라마 <정도전>, 열 번째 이야기(최종)
14.06.30 21:36 l 최종 업데이트 14.06.30 21:36 l 김종성(qqqkim2000)


▲  이방원(안재모 분)이 정도전(조재현 분)을 제압하는 장면. 드라마 <정도전> 제50회의 한 장면. ⓒ KBS

드라마 <정도전>이 29일 제50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최종회에서 이방원은 쿠데타를 일으켜 이성계-정도전 정권을 전복하고 최고 권력을 찬탈했다. 정도전은 자신의 방심으로 대업이 실패했다며 자신을 조소하는 <자조>라는 시를 남기고 역사무대에서 퇴장했다.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결은 재상주의 대 왕권주의의 대립이었다. <조선경국전>이란 법전에서 강조했듯이, 정도전은 재상이 철학자들(사대부들)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나라를 꿈꾼 데 반해, 이방원은 강력한 군주가 국정을 운영하는 중국적인 나라를 꿈꾸었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임금보다 귀족의 권력이 더 강했다. 그에 반해, 중국에서는 황제의 권력이 귀족을 능가할 때가 훨씬 더 많았다. 그래서 이방원이 꿈꾼 왕권 중심주의 국가는 중국적인 나라에 가까웠다. 

두 사람의 대결은 자주파 대 사대파의 대립이기도 했다. 정도전은 명나라에 형식적인 사대의 예를 취하더라도 조선의 자존심을 잃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고구려 고토인 요동(만주) 땅을 찾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에 비해, 이방원은 명나라의 주도권을 존중하고 만주 땅에 욕심을 내지 않는 태도를 취했다. 

재상파 대 왕권파의 대결, 이방원 승리로 끝나다


▲  패배한 정도전. ⓒ KBS

1398년에 이방원이 정도전을 기습함으로써 두 사람의 대결은 이방원의 승리로 끝났다. 이로써 재상파 대 왕권파의 대결은 왕권파 이방원의 승리로 끝났고, 자주파 대 사대파의 대결은 사대파 이방원의 승리로 끝났다. 두 가지 승부에서 이방원이 모두 승리한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 중에서 얼마 안 가 뒤집힌 것이 있다. 그것은 재상주의 대 왕권주의의 승부다. 제3대 태종 이방원은 왕권 중심주의를 구축하고자 노력했지만, 그가 이룩한 성과물은 제7대 세조(수양대군) 이후에는 허사가 되었다. 이방원 못지않게 강력한 군주였던 세조가 죽은 뒤에는 재상과 신하들의 권력이 임금의 권력을 훨씬 더 능가했다. 

조선 후기인 숙종(19대)·영조(21대)·정조(22대)·고종(26대) 때 왕권이 일시적으로 강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조선시대에는 왕권이 취약했다.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임으로써 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고 싶었지만, 그가 이룩한 것은 얼마 안 가서 허물어지고 말았다. 


▲  승리한 이방원. ⓒ KBS

그에 비해 자주파 대 사대파의 대립 구도는, 이방원의 승리를 계기로 사대파의 승리로 굳어졌다. 이 승부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임진왜란 뒤에 광해군이 일시적으로 자주외교를 지향한 적은 있지만, 이방원 이후의 역대 왕들은 대체적으로 볼 때 사대주의 외교노선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이방원의 사대 노선이 정도전의 자주 노선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조선의 대(對)중국 무역흑자다. 정도전-이방원 대결이 조선의 무역흑자로 귀결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고려 말부터 한국과 명나라의 관계는 껄끄러웠다. 조선이 세워진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정도전을 특히 경계했다. 주원장의 견제를 의식한 정도전은 주원장에 대한 경고의 말을 은근히 흘렸다. 

태조 6년 4월 17일자(양력 1397년 5월 14일자) <태조실록>에 따르면, 정도전은 1392년에 명나라 수도 남경(양자강 주변)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산해관(만리장성의 동쪽 관문)을 지나면서 "좋은 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알 수 없다"는 말을 흘렸다. 주원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는 뜻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주원장과 한판 붙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  산해관 성벽 중에서 서해와 맞닿는 부분. ⓒ 김종성

조선은 조공 많이 하려하고 명나라는 적게 받고자 했던 이유는?

정도전의 발언은 주원장의 귀에 들어갔다. 만주 땅에 대한 명나라의 지배권이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것도 조선이 만주에 욕심을 내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의 최고 실권자가 중국 영토 안에서 이런 말을 내뱉었으니, 주원장으로서는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복의 차원에서 주원장은 1395년에 이른바 표전문 사건을 일으켜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표전문은 외교문서의 일종이었다. 주원장은 표전문에 자기를 모욕하는 문구가 있다면서 정도전의 신병을 요구했다. 

이성계가 정도전의 신병을 내어주지 않자, 1397년에 주원장은 무역분쟁을 일으켰다. 해마다 세 차례 조공을 하겠다는 조선의 요구를 묵살하고 조선의 조공을 3년에 한 차례만 받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에 대해 조선이 불응함에 따라 양국의 무역은 물론 국교까지 단절되고 말았다. 

조선은 조공을 많이 하고자 하고 명나라는 적게 받고자 한 것은, 조공이 일방적인 헌납이 아니라 쌍방적인 물물교환이었기 때문이다. 조공을 받는 황제국은 회사(回賜)라는 답례를 해야 했다. 

황제국은 조공 받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회사를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황제국들은 무역적자를 보면서 패권을 유지했다. 이것은 돈을 많이 쓰는 쪽이 주도권을 잡는 세상사의 이치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신하국 입장에서는 조공을 자주 하는 것이 이익이고, 황제국 입장에서는 조공을 적게 받는 것이 이익이었다. 

또 신하국 사신이 중국을 방문하게 되면, 사신이 지나는 지방 관청에서는 신하국 사신에게 숙식과 선물을 제공해야 했다. 그래서 신하국 사신이 자주 방문하면 명나라의 재정적자가 증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선은 매년 세 차례 조공을 하고자 하고, 명나라는 3년에 한 차례만 받고자 했던 것이다. 


▲  정도전이 살해된 장소인 송현방이 있었던 곳. 경복궁 광화문에서 남동쪽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의 나무들 너머로 송현방이 있었다. ⓒ 김종성

사실, 3년에 한 차례만으로도 조공 횟수는 많은 편이었다. 명나라의 행정법전인 <대명회전>에 기록된 국가별 조공 횟수에 따르면, 유구(오키나와)는 2년에 1회, 섬라(태국) 및 안남(베트남)은 3년에 1회, 일본은 10년에 1회였다. 

유구·섬라·안남은 다른 나라에 비해 조공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조공을 3년에 1회로 제한한 명나라의 조치는 조선에 대한 차별 대우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도전이 이끄는 조선은 1년에 세 번은 조공을 해야겠다고 우겼다. 

1년에 3회면, 3년이면 9회다. 명나라는 3년에 1회만 하라고 한 데 반해, 조선은 3년에 9회를 하겠다고 했다. 따라서 정도전의 주장은, 명나라에 대한 무역흑자를 아홉 배로 늘리겠다는 협박과 마찬가지였다. 주원장의 입장에서는 생떼부리는 행위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양국 간에 무역분쟁이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 정도전은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 정도전의 요동 정벌은 다목적용이었다. 국제정세가 불안정한 틈을 타서 고구려 고토를 수복하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었고, 명나라를 압박해서 무역흑자를 늘리겠다는 의도도 담겨 있었고, 차제에 조선 내부의 사병을 혁파하겠다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  정도전의 집이 있었던 종로구청 주변. 정도전의 호를 딴 삼봉길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 김종성

조선, 자주파인 정도전 잃고 무역 특혜 얻었다

그런데 정도전의 요동 정벌은 이방원의 쿠데타로 좌절되고 말았다. 사대파인 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이고 권력을 잡자, 명나라에서는 무역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나왔다. 조선에 대해서만큼은 과감한 무역특혜를 주자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결국 명나라는 정도전이 제거된 지 2년 뒤인 1400년에 과감한 무역특혜를 조선에 제공했다. 조선에 대해서만큼은 이례적으로 1년에 3회의 조공을 인정한 것이다. 그만큼 명나라가 무역적자를 감내한 것이다. 이것은 이방원이 반(反)명나라 자주파 정권을 무너뜨리고 명나라의 안보를 강화시켜준 데 대한 명나라 황실의 답례였다.  

이로 인해 조선은 명나라와의 무역에서 최대의 무역흑자를 거두는 나라가 되었다. 조선의 조공 사절단은 매년 세 차례 명나라에 조공을 하고 그만큼의 무역흑자를 안고 돌아왔다. 

조선의 흑자폭은 중종 때인 1534년부터는 한층 더 확대되었다. 이때부터 명나라는 조선에 1년에 네 차례의 조공을 허용했다. 이처럼 조선은 자주파인 정도전 정권을 잃는 대신 무역특혜라는 실익을 얻어냈다. 이런 무역특혜는 명나라가 무너진 1644년 이전까지 계속 유지됐다. 

하지만, 조선이 얻기만 한 것은 아니다. 명나라도 조선 못지않은 실익을 얻어냈다. 명나라는 무역특혜를 제공하는 대신, 여진족과의 전쟁에 조선군을 동원했다. 명나라는 툭하면 파병을 요청했고 그때마다 조선은 군대를 보내야 했다. 

여진족은 왜구와 더불어 명나라의 안보를 가장 많이 위협하는 세력이었다. 명나라는 조선군의 지원에 힘입어 여진족의 위협을 상당부분 감소시킬 수 있었다. 조선이 얻은 무역흑자는 결국 조선군 파병으로 상쇄된 셈이다. 명나라는 무역적자를 보는 대신 조선군을 공짜로 이용한 셈이다. 

명나라의 요구에 휘말려 툭하면 파병을 하는 과정에서 조선이 잃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손실은, 조선의 주적이 아닌 명나라의 주적(여진족)을 막기 위해 조선군이 힘을 소모하다 보니, 일본군이나 왜구의 침략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하게 됐다는 점이다. 

명나라의 요구에 따라 여진족과의 전쟁에 휘말리다 보니, 조선군은 여진족 기마병을 상대하는 데만 익숙한 군대가 되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일본군에 연전연패한 것은, 일본군 같은 보병 위주의 군대에 대한 훈련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은 명나라 덕분에 무역흑자를 얻었지만, 명나라 때문에 임진왜란을 당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은 자주파 정도전을 잃는 대가로 무역흑자를 얻고 자주국방의 기회를 잃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은 정도전을 잃은 대가로 이익을 본 것인가 손실을 본 것인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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