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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 살아온다 <7>
제2부 비밀의 문 ①구지봉과 개국

가락국의 랜드마크

김해 분산(盆山·330m). 김해시가지 뒤편에 오뚝 솟은 이 산은 앉음새가 예사롭지 않다. 지리산에서 동남쪽으로 굽이쳐 달려온 낙남정맥의 끝지점인데다, 낙동강 하구와 남해를 한눈에 조망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 옛 가락국(금관가야)의 입지조건을 살피는데도 이만한 장소가 없다. 분산은 이른바 김해의 랜드마크(표지물)다.

취재팀은 지난 24일 오후 김해시 어방동 김해천문대 쪽으로 난 길을 택해 분산에 올랐다. 가을빛이 매혹적인 오후녘이었다.

김해 산성마을을 지나 5분 가량 오르자 시간의 무게에 짓눌린 석성이 나타났다. 분산성(사적 제66호) 북문이다. 고려말 김해부사 박위가 왜구에 대비해 쌓은 퇴뫼식 산성이다. 그러나 성 주변에서 삼국시대 토기편이 나와 가야시대 산성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정상에는 봉수대와 함께 ‘만장대’(萬丈臺·대원군이 썼다고 함)라는 큼지막한 바위도 있다. 분산에는 이처럼 역사적 향취가 그득하다.

분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자락이 구지봉(龜旨峰), 바로 가락국의 개국비밀을 품은 곳이다. 구지봉 바로 곁에는 허왕후릉이 자리잡고 있는데, ‘삼국유사’는 이곳의 지세를 마치 거북이 바다(현 김해평야)를 향해 머리를 내민 형국이라 했다. 김해평야를 바다로 상정하면 ‘여뀌잎처럼 협소하나 지세가 빼어나 16나한이 살만한 곳’으로 소개한 ‘삼국유사’의 전언이 실감난다.

2천여년전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가락의 아홉 촌장들

‘천지개벽후 이 땅에는 아직 나라이름도 없고 왕과 신하의 호칭도 없었다. 다만 아도간, 여도간 등 구간이 백성들을 통솔하였는데 무릇 100가호에 7만5천명이었다. 이들은 산과 들에 모여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었다…’.

‘가락국기’(駕洛國記·고려 문종 후반인 1075~1083년에 금관주지사로 있던 문인이 작성)에 실려 전하는 수로신화는 첫머리부터 아주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다.

수로신화는 익히 알려진대로, 서기 42년(후한 광무제 건무 18년) 하늘로부터 붉은 줄을 타고 내려온 6개의 알이 동자로 둔갑해 6가야 왕이 된다는 줄거리다.

이를 둘러싼 해석은 다양하지만 역사학계는 대체로 구간(九干)이 이끄는 청동기 사회에 수로로 대표되는 철기문화가 들어와 사회변화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가락국이 성립된 것으로 파악한다.

수로가 나타나기 전 김해지역에는 아홉 촌장이 이끄는 이른바 구간(九干)사회가 형성돼 있었다. 간(干)은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몽골계통의 말 ‘칸’의 소리를 따서 적었다는 견해가 있다. 아도간(我刀干), 유천간(留天干), 유수간(留水干), 신귀간(神鬼干) 등은 각각 칼을 잘 쓰고, 천기를 살피고, 물을 잘 이용하고, 제의를 담당하는 우두머리를 뜻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 철기문화를 가진 수로(首露)세력이 나타났다. 미개한 사회에서 철은 새로운 사회를 여는 활력 그 이상이었다. 수로세력을 위만조선의 유이민으로 보는 설도 있으나, 외부에서 들어왔다는 것은 통설로 굳어져 있다.

가야의 고향

‘거북아 거북아(龜何龜何)/머리를 내밀어라(首其現也)/만약 아니 내밀면(若不現也)/불에 구워 먹으리라(燔灼而喫也)’

수로신화의 주제가인 ‘구지가(龜旨歌)’이다. 이를 둘러싼 해석도 다채롭기 이를데 없다.

잡귀를 쫓는 주문으로 보는 견해(박지홍), 제천의식의 영신제(迎神祭)에서 신에게 희생물을 바치고 춤을 추면서 부른 노래라는 견해(김열규), 원시인들의 강렬한 성욕을 표현했다는 견해(정병욱) 등이 그것.

‘구지’를 ‘굿’, 구지봉을 굿터로 본 학자(정중환)도 있고, 구지가 첫머리의 ‘구야구야(龜也龜也)’를 ‘신(神)이여, 신이여’로, ‘수기(首其)’를 ‘쉬이’로 풀이(김의박)한 사람도 있다.

사학계에서는 대체로 구지가는 애초 위협주술 형식의 풍요제의였으나 수로왕 등장을 계기로 영신군가 형태로 각색된 것으로 본다.

인제대 이영식(사학) 교수는 “수로신화는 청동기→철기, 풍요제의→영신제의, 구간(지도자)→수로왕(지배자)이라는 역사변화 과정을 보여준다”며 “구지봉 정상의 지석묘는 이를 지켜본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구지봉 지석묘는 깬돌(割石) 4~5개를 괸 전형적인 남방식으로, 가락국 개국의 현장을 2천년 이상 흔들림없이 지켜본 셈이다.

삼국의 개국신화와 마찬가지로, 수로신화 역시 신앙의 형태로 표출된 설화성을 어떻게 역사적 사실로 풀어내느냐가 문제다. 특히 신화에 나타난 가락국의 건국 기년, 6란설, 후대의 윤색배경 등은 가야사 해명의 열쇠가 되므로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가락국 개국 기년(서기 42년)과 관련, 부산대 백승충(역사교육) 교수는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가락국의 질적인 변화가 모색되는 전환기에 수로왕이 나타나 철을 중심으로 대외교역적 성격을 드러낸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신화와 역사의 절묘한 접점찾기는 가야사가 해결해야 할 또하나 숙제다.

/ 특별취재팀/박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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