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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 살아온다 <9> 제2부 비밀의 문 ③ 6가야의 실체
국제신문/02년 /11월
 

 
김해시 구산동 구지봉 정상의 천강육란석조상. 김해시는 이를 곧 철거, 구지봉의 원형을 회복토록 할 계획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수로왕 신화에는, 김해 구지봉에 9간이 모인 상태에서 하늘에서 여섯 개의 황금 알이 내려와 각기 6가야의 주인이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현재 김해 구지봉에 올라가 보면 그 정상 부위에 김수로왕 천강기념 육란석조상 등이 놓여져 있다.

이것은 1976년에 가락중앙종친회에서 조성한 것인데, 신화의 6란하강 정경을 그대로 묘사하지는 않았으나, 자꾸 가서 보니 가락국기의 내용이 그런대로 잘 추상화 되었다는 느낌이 들고, 야외에 공개된 채로 26년이 지났는데도 김해시민들의 애호 속에 별로 훼손되지 않고 보존된 것이 기이하다.

김해시에서 구지봉의 원형을 복원하는 작업을 추진하면서 이 석조물을 걷어낸다고 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나말여초에 붙여진 이름

그런데 그 6란설은 수로왕 신화 중에서도 매우 이상한 대목이다. 대부분의 천강 신화들은 모두 1명의 천손이 알 또는 사람의 상태로 내려 왔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김해 구지봉으로 여섯 개의 알이 한꺼번에 내려왔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요소로서 설화의 원형을 잃은 것이다.

조선 초기의 ‘고려사’ 지리지 및 ‘세종실록’ 지리지 김해 조에 기록된 수로왕 신화에는 황금 알이 1개로 되어 있는데, 오히려 이것이 신화의 원형에 가깝다.

그렇다면 여섯 개의 알이 내려왔다는 변형은 언제,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일까? 이는 ‘6가야’ 관념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려 중기인 11세기에 씌어진 가락국기 말미의 찬(贊)에 이르기를, ‘하나의 자줏빛 끈이 드리워져 6개의 둥근 알이 내려왔는데, 다섯은 각기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만 이 성에 남았구나’ 라고 하였으니, 이는 수로왕이 가락국, 즉 금관가야를 건국할 때, 나머지 다섯 가야도 함께 건국되었다는 의미이다. 6가야 개념은 이를 토대로 생긴 것이다. 여기서 금관가야를 포함하면 아라가야, 성산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소가야 등과 함께 6가야가 된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사서인 ‘본조사략’에 따르면, 태조 천복 5년 경자(940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쳐, 대가야, 소가야를 빼고 금관가야, 비화가야를 대신 넣었다. 그런데 어떻게 가야가 멸망한지 400년이 넘은 고려 초기 태조 왕건이 그 옛날 5가야의 이름을 바꿀 수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볼 때, 가락국 수로왕 건국 신화에 덧붙여진 6란(六卵) 설화 및 6가야의 개념은 신라 말 고려 초의 혼란기에 생겨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 당시에 반(反) 신라적인 관념이 한반도 전체에 휘몰아쳐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각각 그 옛 땅에서 생겨났듯이, 옛 가야 지역에도 반 신라 및 자치 독립의 이념을 표방하는 ‘후가야’가 생겨났을 것이다.

또 이 지역 호족들은 옛 가야 연맹의 전설을 되살려 가야 소국의 왕손임을 인정받아, 자신의 본관(本貫)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려고 고려 왕조에 요청하였을 것이다. 그런 결과 태조 23년 지방제도 개편 당시에 고려 왕조는 지방 호족들의 현실 세력관계에 맞추어 5가야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금관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비화가야 등의 ‘모(某)가야’ 형태의 국명은, 그들이 소국으로 존재할 당시의 국명이 아니라, 옛날 가야연맹 가운데 하나인 금관국 또는 아라국, 고령국, 성산국, 비화국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신라 말 고려 초의 명칭이다.

그 가야 소국 가운데에서, 일부는 실제로 가야 연맹체 속에 들어 있던 소국이었는지 의심스러운 것도 있다. 특히 성산가야와 고령가야는 ‘성산’과 ‘고령’이라는 명칭이 모두 8세기 중엽 신라 경덕왕 때에 만들어진 것이고, 그 지역들에서 출토된 토기들 중에 5세기 이후의 것들은 가야 토기보다는 신라 토기의 모습을 띠고 있다. 즉, 국명도 의심스럽고 가야 소국의 하나인지도 의심스럽다. 다만 그들이 4세기 이전의 전기 가야시대에 가야연맹에 소속되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거듭나는 ‘허구의 전설’


6가야의 개념을 통해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낙동강 유역의 주민들이 고려 초기까지도 스스로를 옛날에 존재했던 가야연맹체 소속 국의 후손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6가야의 관념은 신라 말 고려 초의 사상사를 다루는 데는 필요하나,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 실재했던 가야사의 전개를 다루는 데는 적절치 못한 자료이다. 현행 초등학교나 중학교 교과서 등에 6가야의 지도가 실려 있고, 그것이 당시의 가야 판도인 것처럼 교육되는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다행히 앞으로는 6가야와 관련된 교과서의 서술이 개정될 전망이다. 이제 가야사는 고려 초에 나타난 관념상의 6가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가야사, 즉 역사상 실재했던 가야사를 밝히는데 주력해야 한다.

김해 중심의 4세기 이전 전기 가야시대에는 최대 17개국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5세기 이후의 후기 가야시대에는 최대 22개국을 헤아릴 수 있고, 그 최대 범위는 낙동강 유역뿐만 아니라 호남 동부지역을 포괄하기도 하였다.

이제 가야의 범위는 김해와 고령에 있던 두 개의 가야국을 중심으로, 가야연맹에 소속되었던 다른 소국들을 모두 포함하는 폭넓은 가야사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김태식·홍익대 교수] ◇ 김태식(46)교수는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했고 울산대를 거쳐 현재 홍익대 역사교육과에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가야연맹사'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전3권) 등이 있고 올해 지훈상(국학부문)을 받았다 .

/박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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