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27275214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2>제16대 고국원왕(2)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1>제16대 고국원왕(1)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1158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2>제16대 고국원왕(2)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1159

고구려 유민으로서 당에서 죽은 고자(664~697)의 묘지명에 보면, 고자의 20대조 할아버지인

고밀(高密)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묘지명에서는 그가 고구려의 장수로서 공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先祖, 隨朱蒙王, 平海東諸夷, 建高麗國已後, 代爲公侯宰相. 至後漢末, 高麗與燕慕容戰, 大敗, 國幾將滅. 廿代祖密, 當提戈, 獨入斬首尤多. 因破燕軍, 重存本國. 賜封爲王, 三讓不受. 因賜姓高食邑三千戶, 仍賜金文鐵券, 曰 "宜令, 高密子孫, 代代封侯, 自非烏頭, 白鴨綠竭, 承襲不絶."]

선조가 주몽왕을 모시고 해동의 여러 오랑캐를 평정하여 고려국을 세운 이후, 대대로 공후재상(公侯宰相)이 되었다. 후한말에 이르러 고려는 연의 모용씨와 싸워 크게 패하여 나라가 장차 멸망하려 하였다. 이 때 20대조 밀(密)은 분연히 창을 잡고 홀로 들어가 목을 벤 자가 무척 많았다. 인하여 연군(燕軍)을 깨뜨리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다. 봉(封)을 내려 왕(王)으로 하려 했으나 세 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고씨 성[高姓]과 식읍 3천호를 내리고 또한 금문(金文), 철권(鐵券)을 내려 말하였다.

“마땅히 고밀 자손은 대대로 후(侯)를 봉하여 까마귀 머리가 희어지고 압록강이 마르지 않는 한 승계를 끊지 않는다.”

『고자묘지명』

 

고자의 선조 '밀'이라는 사람이 창을 들고 적진에 들어가 수백에 달하는 적군의 목을 베고,

이로서 연의 군사를 깨뜨리고 나라를 보전할수 있었다고 기록한 이 묘지명의 내용은,

오늘날에는 서기 342년ㅡ고구려 고국원왕 12년의 전연 침공의 상황을 말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때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밀이라는 사람은 고구려의 왕성(王姓)인 고(高)씨 성을 수여받고,

'까마귀 머리가 희어지고 압록강의 물이 마를 때까지' 집안 대대로 벼슬과 봉록이 끊이지 않으며

역적죄가 아닌 이상 모두 사면받는다는 금문과 철권을 하사받았다.

간신히 나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해준 그들이, 고국원왕으로서는 엄청 고마웠을 터다.

 

[奴客祖先▨▨▨北夫餘隨聖王來奴客▨▨▨之故▨▨▨▨▨▨▨▨世遭官恩▨▨▨▨上聖太王之世▨▨▨▨▨祀▨▨▨▨▨▨▨▨非▨枝▨▨▨▨▨▨▨叛逆▨▨之▨▨▨▨▨牟▨▨▨▨▨▨▨▨遣招▨▨▨▨▨▨▨▨拘雞▨▨▨▨▨▨▨▨曁農▨▨▨▨▨▨▨▨▨▨▨▨▨▨▨▨▨▨恩▨▨▨▨▨▨▨▨▨官客之▨▨▨▨▨▨牟令彡靈▨▨▨▨▨▨]

노객의 선조 ▨▨▨는 북부여에서 성왕을 따라[隨] 왔다[來]......대대로 관은(官恩)을 입어[世遭官恩].... (국)강상 성태왕(聖太王)의 시대에..... 반역(叛逆)이.......염모(牟)가.....

『모두루묘지명』

 

이건 또 뭐야 싶은 분들이 있을 거다.

워낙 마모가 심한 거라서 몇 부분 빼고는 제대로 해석도 못 하는 거긴 하지만,

이건 광개토태왕 때에 북부여수사라는 벼슬을 지냈던 모두루라는 사람의 묘지명이다.

(광개토태왕은 고국원왕의 손자이기도 하지)

모두루의 선조는 원래 북부여에서부터 추모성왕을 따라왔다고 묘지명은 말하고 있는데,

그 후손 중 염모()라는 사람은 고구려에서 일어난 어떤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고구려에서 북부여대형이라는 관직을 맡아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맥락이다.

 

[慕容鮮卑▨▨使人▨知河泊之孫日月之子所生之地來▨北夫餘大兄牟▨▨▨公▨彡▨▨▨]
모용선비(慕容鮮卑).... 사람을 시켜.... 하백(河泊)의 손자이며 해와 달의 아드님께서 태어나신 땅(을 알지 못하고) 와서...... 북부여 대형(大兄) 염모......공.....삼....(???)

<모두루묘지명>

 

사실 모용황은 처음 진격할 때에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조선조에 청 태종이 명을 치기에 앞서 조선을 공격했던 것처럼,

중원 공략에 앞서 고구려를 쳐서 후방의 위협을 없애려는 것이 첫번째였고,

두 번째는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옛 부여의 중심지역을 차지하겠다는 것이었다.

옛 부여의 중심지역ㅡ추모왕이 나왔다는 북부여 지역에 대한 공략이 342년에 진행되어,

남쪽 길로 고구려의 왕성 환도성을 작살내고 고구려 왕모와 왕비까지 사로잡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북쪽 길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5만 정예군의 존재 때문에

더 진군할 수가 없었다.

 

전연의 후방을 공격해 그들을 퇴각하게 만든 고구려 북도군의 5만 정예군 속에는,

훗날 당으로 망명해서 장수를 지내게 되는 고자의 조상 고밀도 있었고,

광개토태왕의 치세에 북부여수사(北扶餘守事)의 벼슬을 지낸 모두루도 있었다.

이들은 수도인 국내성과 그 주변 일대를 거점으로 삼고 고구려 외부와의 숱한 전쟁과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란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실세로 성장했고,

훗날 장수왕의 평양성 천도 이후에는 평양성 출신의 신흥 귀척에 맞서

'구귀척'으로 대립하게 된다. 그러니까 지네들도 내세울 게 있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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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싸움하는 이야기로 넘어가서, 모용황이 북도에서 고구려군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했던가?

장사 왕우가 이끄는 전연의 북도군 1만 5천이 고구려군에게 전멸당하게 되자,

더 이상의 군사작전은 어렵겠다고 판단한 모용황은 철수를 결정한다.

북쪽 길에서 고구려군이 전연군을 전멸시키고 모용황의 후방을 압박하지 않았다면

고구려는 이때를 끝으로 완전히 멸망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해보면 그 시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고구려의 침체기라고도 할수 있는 때였다. 

이 시기의 고구려는,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일 정도로

심각한 외환(外患)에 시달렸다. 북쪽에서는 전연이라는 강자가 고구려의 머리를 물고 있고,

남쪽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백제의 성장이, 마치 샌드위치처럼 고구려를 짓누르며

으깨듯 짜부라뜨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 확실히 뭘 해도 제대로 되는 일 하나 없는 때였지.

왕에게 복이 없는 건지 아니면 그 시대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건지.

적어도 《삼국사》 속에 묘사된 고구려의 당시 모습은 무척이나 착 가라앉고 침체된

어쩐지 암울하기까지 한 공기가 가득 메우고 있는 방과도 같았다.

 

[十三年, 春二月, 王遣其弟, 稱臣入朝於燕, 貢珍異以千數. 燕王乃還其父尸, 猶留其母爲質.]

13년(343) 봄 2월에 왕은 그의 아우를 연(燕)에 보내 신하를 칭하며 조회하고, 진기한 물건 1천여 점을 바쳤다. 연왕 황이 이에 따라 그 아버지(미천왕)의 시신을 돌려주었으나, 그 어머니는 여전히 남겨두어 인질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그리고 선왕의 시신과 대후가 인질로 잡힌 상황에서는 태왕도 어쩌지 못하고,

엄청나게 저자세를 취할 수밖에.

진기한 물건을 1천 점이나 바쳤는데도 저들은 엄청 짜게 나온다.

시신만 돌려주고 산 사람은 그냥 잡아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죽은 사람이 산 사람만 하겠니.

 

<선비족의 혁대. 3~4세기경.>

 

1963년에 북한의 주영헌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안악 3호분의 주인을 미천왕이라 제시한 근거는 바로 이때,

미천왕의 시신을 전연의 모용황에게 도굴당했다는 기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유왕이 이때 시신을 찾아오면서 불가피하게 안악 3호분에

미천왕의 묘를 다시 썼다는 것이 그 주장의 요지였는데,

안악은 비교적 후방에 있어 전란으로부터 안전하고,

또 안악 일대를 예전에 미천왕이 다시 되찾은 연고도 있고 해서

새로운 무덤 자리로 안악을 정한 것이며, 동수를 무덤에 기록한 것은

그가 미천왕의 재궁을 반환하는데 공을 세웠거나 미천왕의 무덤을 다시 만들 때

중국식의 벽화무덤 양식을 제안한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북한에서는 주장했다.

 

하지만 안악 3호분이 미천왕릉이라는 주장에도 허점이 있기는 피차 마찬가지였다.

동수설은 묘지명의 위치가 왜 하필이면 장하독의 머리 위에 있었는지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또다른 장하독의 머리 위에서

묵서의 흔적이 발견된 이유는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못했지만,

미천왕릉설은 시체의 반환부터 무덤 축조까지 13년이나 걸린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 못했으니까. 그걸 설명 못하면 다시 원점이거든.

 

여담이지만 이때 사유왕이 전연에 보낸 아우가 고이련,

훗날의 18대 고국양왕으로 즉위하는 인물로서 광개토태왕의 아버지다.

 

[秋七月, 移居平壤東黃城.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 遣使如晉朝貢. 冬十一月, 雪五尺.]

가을 7월에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성은 지금(고려)의 서경(西京) 동쪽 목멱산(木覓山) 가운데에 있다.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에 눈이 다섯 자나 내렸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13년(343)

 

동황성 천도기사도 《삼국사》 지리지에서 소개하고 있기는 한데,

부식이 영감은 이게 무슨 뜻인지는 자신도 모르겠다고 했다.

단재 선생은 사유왕이 환도를 버리고 평양으로 옮겨 백제를 공략하려는

뜻이었다고 설명했다. 서경의 동쪽 산에 있다고 한 기록을 고대로 믿는다면

지금 평양성과 대성산성-안학궁 사이에 있는 청암리토성이 되겠지만,

내가 감히 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그냥 여기서는 보류하기로 한다.

 

[十五年, 冬十月, 燕王使慕容恪來攻, 拔南蘇, 置戍而還.]

15년(345) 겨울 10월에 연왕 황이 모용각(慕容恪)을 시켜 쳐들어와서, 남소성[南蘇]을 함락시키고 수자리 군사를 두고 돌아갔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은 뒤에도, 고구려의 수모는 계속되었다.

대후는 아직도 전연에 모셔져(?) 있고, 또한번 영토가 침식당했다.

'남소성'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데, 영류왕 때에 고려를 방문했던

당의 사신(이라고 쓰고 첩자라고 읽는다) 진대덕의 《고려기》에 보면 이 성이

"신성 북쪽으로 70리 떨어진 산 위에 있다[城在新城北七十里山上也]."고

나오는데, 북위의 최홍이라는 사람이 쓴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전연록(前燕錄)에서도 "모용황(慕容晃) 12년에 도요장군(度遼將軍) 모용각을 보내

고려의 남소를 공격해 이기고 수자리 군사를 둔 뒤에 돌아왔다[慕容晃十二年,

遣度遼將軍慕容恪, 攻高驪南蘇剋之, 置戍以還]."고 했다.

 

[初夫餘居于鹿山, 爲百濟所侵, 部落○散, 西徙近燕, 以不設備. 燕王遣世子儁, 帥慕容軍ㆍ慕容恪ㆍ慕輿根三將軍萬七千騎, 襲夫餘. 儁居中指授, 軍事皆以任恪. 遂拔夫餘, 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 而還. 以玄爲鎭軍將軍, 妻以女.]

처음 부여가 녹산(鹿山) 있다가 백제의 침입을 받아 부락이 쇠잔해지니 서쪽으로 연(燕)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 갔는데, 연에 대해 방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연왕(燕王) 모용황이 세자 준(儁)을 보내어 모용군(慕容軍)ㆍ모용각(慕容恪)ㆍ모여근(慕輿根) 등 세 장군과 군사 1만 7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부여를 습격하게 하였다. 준은 군사에 관한 일을 모두 모용각에게 맡겼다. 드디어 부여를 격파하고 부여왕 현(玄)과 부락 사람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모용황은 부여왕 현을 진군장군(鎭軍將軍)으로 삼고 딸을 그의 아내로 주었다.

《자치통감》 권제97, 진기(晉紀)19, 목제(穆帝) 영화(永和) 2년(346) 정월

 

고구려가 전연의 침공을 받아 수세에 몰려있는 동안,

부여 역시, 전연의 공격을 받아 왕과 백성 5만 명이 전연으로 끌려가는

그야말로 '개작살'을 당한다. 광개토태왕 때에 대사자 벼슬을 지냈던

모두루의 묘지명에 보면, 모두루의 조상 염모가 고자와 비슷한 시기에

북부여대형(北夫餘大兄)이라는 벼슬을 맡고 있으면서,

북부여를 침공한 '모용선비'와 전쟁을 벌였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나온다.

(묘지명 자체는 마모가 너무 심해서 글자 판독이 어렵지만)

러면 여기 《자치통감》에서 말하는 부여는 북부여일까? 잘 모르겠다.

 

예전 285년 부여의 국가 회복 과정에서도 이미 드러난 일이지만,

부여의 운명은 부여 본국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주변국가간 세력관계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서사근연', 즉 '서쪽으로 옮겨 연과 가까워지는' 원인을 만든 것은 백제였다.

백제의 공격으로 부여는 왕도를 버릴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전연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감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전연이 부여를 손쉽게 공략할 수 있는 상황을 저들 스스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자치통감》의 이 기사는 이 무렵 백제가 요서에까지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는

이른바 '요서진출설'을 뒷받침하는 기록이기도 한데, 기록된 대로라면

백제의 압박을 받은 부여가 서쪽으로 지금의 중국 농안(農安: 나중에 발해 부여부 서는 자리)

혹은 서풍(西豊) 일대로 중심지를 옮겼다가,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를 격파한 전연의 군사들에게 '현'이라는 이름의 부여국왕이 사로잡히는

수모를 겪은 것이다. 당 고종이 고려 보장왕이나 백제 의자왕에게 그랬던 것처럼,

모용황은 포로로 잡아온 현에게 진군장군의 벼슬을 수여하고 그를 사위로 삼는다.

 

이 후 부여왕 현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기록에 없다.

혹자는 이때가 바로 부여가 멸망한 때로 보기도 하지만,

아직 부여가 망하려면 한참 남았단 말이다.

고구려도 아직 안 망했는데 부여가 어떻게 망하겠어.

 

[十九年, 王送前東夷護軍宋晃于燕. 燕王雋赦之, 更名曰活, 拜爲中尉.]

19년(349)에 왕은 전(前) 동이호군(東夷護軍) 송황(宋晃)을 연으로 보냈다. 연왕 준(雋)이 그를 용서하고 이름을 활(活)이라 바꾸어 중위(中尉)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일찌기 전연에서 망명해왔던 두 사람의 망명객. 송황과 동수.

그들이 전연을 떠나게 만든 모용황이 죽은 뒤에도,

동수는 전연으로 돌아가지 않고 망명지 고구려에서 죽었지만, 

송황은 결국 이때에 자신의 나라인 전연으로 돌아간다.

 

[二十五年, 春正月, 立王子丘夫, 爲王太子. 冬十二月, 王遣使詣燕, 納質修貢, 以請其母. 燕王雋許之, 遣殿中將軍龕, 送王母周氏歸國, 以王爲征東大將軍營州刺史, 封樂浪公王如故.]

25년(355) 봄 정월에 왕자 구부(丘夫)를 왕태자로 세웠다. 겨울 12월에 왕은 사신을 연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어머니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왕 준이 이것을 허락하고 전중장군(殿中將軍) 조감(龕)을 보내 왕모 주씨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며, 왕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로 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하되 왕호는 예전과 같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왕자 구부를 태자로 세운 그 해,

사유왕은 전연에 인질로 잡혀간 자신의 어머니를 겨우 고구려로 모셔올수 있었다.

인질로 잡혀간지 13년만의 귀국이었다.

13년이면 고국 풍속을 대체 몇개나 기억하실까.

뭐 이민(?) 1세대니 기억하실수도 있겠다야.

 

왕모의 송환과 함께, 전연에서는 고구려왕에게 거들먹거리면서 관직을 제수했으니,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 고구려왕.

대무신왕이 광무제로부터 고구려왕의 왕호를 회복해준다는 칙지를 받은 이래,

처음으로 고구려가 받은 조공-책봉의 관직이었다. 그 이전까지

후한조차도 고구려왕에게 관직을 내려준 적도 없었는데... 굴욕이다.

엎친데 덮친 격, 사유왕이 전연에게 한참 갈굼당하고 있는 사이,

남쪽에서는 이미, 또 하나의 변수가 크게 떠오르고 있었다.

백제였다.

 

백제 근초고왕은 남방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정복작전을 개시했고,

이것은 《니혼쇼키》진구고고키의 '가라7국평정기사'로 윤색되어 전해지게 되는데,

장수 목라근자(목례근자)가 이끄는 백제군이 왜장 사사노궤와 함께

비자벌(창녕)부터 남가라(김해), 탁국, 안라(함안),

다라(합천), 탁순(창원), 가라(고령) 7국을 평정하는 동안,

근초고왕은 태자 근귀수와 함께 친히 군사를 이끌고

마한 잔여세력들이 진을 치고 있던 지금의 영산강 유역을 공격했고,

고해진(강진)을 돌아 침미다례(해남)까지 진출해 그곳을 '박살'을 냈다.

그리고 비리ㆍ벽중ㆍ포미ㆍ지반ㆍ고사의 5읍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마한 잔여세력에 대한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훗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드러나게 되는, 가라 지역과 왜를 연결하는

'남방해양동맹'의 구도가 이때에 이르러 형성되는데,

근초고왕의 이러한 움직임은 모두가 고구려 하나를 노린 것이었다.

백제가 남방을 평정하게 되면 모든 국력을 북쪽 전선에 쏟아부을 여유가 생기며,

그것은 고구려에 잠재적인 위협으로 작용할 것을 사유왕도 잘 알았다. 

 

[三十九年, 秋九月, 王以兵二萬, 南伐百濟. 戰於雉壤, 敗績.]

39년(369) 가을 9월에 왕은 2만 군사로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했다. 치양(雉壤)에서 싸웠으나 패했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고구려와 백제가 충돌한 곳에 대해서,

《삼국사》 고국원왕본기와 근초고왕본기는 치양이라고 했고,

근구수왕 즉위전기는 반걸양이라고 했다. 단재 선생은 반걸양이

지금의 개경 벽란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는데,

혹자는 치악(稚岳)을 진산으로 하는 평야지대라고도 한다.

반걸양(半乞壞)이라는 지명에서 '반걸'은 '밝은'으로,

'양'은 고음(古音)인 '내'로 읽어놓고 보면 '밝은내'가 되고, 

오늘의 배천(白川)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二十四年, 秋九月, 高句麗王斯由帥步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王遣太子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將士.]

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왕 사유(斯由)가 보기(步騎) 2만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 그 포로[虜獲]들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삼국사》 권제24, 백제본기2, 근초고왕

 

사유왕은 처음부터 백제와 전면전을 치를 생각같은 것을 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고구려군은 막상 백제의 변경에 와서는 치양에 진을 친 채

백제의 민가를 약탈하는 것 외에 별다른 군사활동을 보인 것이 없다.

이런 식으로 호기롭게 민가나 약탈하면서 세월아네월아

허송세월만 보낸 것으로 생각하면 큰 잘못.

애시당초 사유왕에게는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백제가 지금 남방ㅡ마한 잔당의 평정 및 가라7국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쏟아붓고 있는 '군사력'이라는 투자를 방해하는 것,

남쪽에서 한창 싸우고 있는 백제군을 북족으로 끌어오는 것이 고구려군의 목표였다.

일단 그들이 자신들을 막으러 남방에서 철수하기만 하면 고구려는 작전종료.

어디까지나 백제가 남방을 진압하는 것을 방해하기만 하면 되기에,

구태여 청목령이나 마두책 같이 방어시설 빵빵한 백제의 전략거점을 공격하는

위험부담을 질 필요가 없다. 《손자병법》에서 말하듯 '필요없는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이다.

 

[高句麗人斯紀, 本百濟人. 誤傷國馬蹄. 懼罪奔於彼. 至是還來, 告太子曰 “彼師雖多, 皆備數疑兵而已. 其驍勇唯赤旗. 若先破之, 其餘不攻自潰.” 太子從之. 進擊大敗之.]

고구려인 사기(斯紀)는 본래 백제인이었다. 실수로 국마(國馬)의 발굽을 다치게 했다. 죄를 받을까 두려워 저쪽으로 도망쳤었다. 이때 돌아와 태자에게 말하였다.

“저쪽 군사가 많기는 하지만 죄다 숫자만을 채운 가짜 병사들[疑兵] 뿐입니다.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붉은 깃발의 부대뿐입니다. 먼저 이들을 깨뜨리면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태자가 그 말을 따랐다. 나아가 쳐서 크게 이겼다.

《삼국사》 권제24, 백제본기2, 근구수왕 즉위전기

 

의병이라. 고구려 2만 보기의 대부분이 숫자만 채운 의병이라는 말이지.

하긴 전연의 침공을 받아 나라가 거의 아작이 난 지경인데,

아직 북쪽도 안정되지 못한 판국에 백제에게 그리 많은 군사를 쓸수는 없었으리라.

그리고 백제를 '조금'은 얕본 탓도 있었을 것이고.

(여지껏 백제와는 이 정도의 대규모 전투를 치른 적이 없었으니.)

 

<조선상고사>에 이른바, 고국원왕은 백제를 치기 위해 일으킨 2만의 보기를

황색·청색·적색·백색·흑색의 다섯 기(旗)에 나누어 거느리고 이끌고 왔다.

어디서 인용하셨는지는 모르지만, 5방의 깃발이란 고구려 5부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5부에서 각기 군사를 내는데, 그 군사들을 오방사상에 따라 다섯 깃발로 편재한거지.

(마치 만주족의 팔기군처럼.) 그리고서 적색의 깃발ㅡ남쪽으로

백제군과 직접 충돌하는 군사들을 정예군사로 채운다ㅡ아귀가 제법 맞아 떨어지는구나.

 

게다가 남방에 투입된 백제군이 남방에 집중 못하게 훼방놓는다는

한 가지 목적만 달성하면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군사를 그럭저럭 훈련시키느라

시간 질질 끄는 사이에 백제가 남방에서 '다 끝났다!'하고 소리치면

고구려로서는 게임 오버. 처음부터 '전면전'보다는 단순히 머릿수 앞세운

'무력시위' 정도만 하려고 일부러 2만이라는 숫자를 변경에 배치시키고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들을 상대로 하는 약탈이라면 정예부대보다야

오합지졸이 더 나을 수도 있지.) 

 

하지만 사유왕의 생각은 빗나갔다. 고구려로 도망쳤다가 돌아온

백제인 사기라는 사람을 통해, 그 허술함을 간파한 백제 태자 근구수는

그의 말대로 붉은 깃발을 든 적기병들을 먼저 공격해 고구려군의 심장부를 부숴버렸고,

이때 포로로 잡은 것이 5천이나 되었다고.(그 5천이 고구려의 정규군이었는지

아니면 머리수만 채운 떨거지였는지는 모르나)

그들은 대부분 장수나 군사들 집의 노비로 떨어졌노라 한다.

 

한편 백제로서도 쓸데없이 고구려와 전쟁이나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자기들 힘으로는 고구려를 끝장낼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방 평정이 완료되면

그보다 더한 이득을 얻을 수가 있기에, 일단 수곡성의 서북쪽에

백제 태자가 주필(주둔)했다는 흔적만 남기고

'나중에 누가 또 감히 여기까지 올 수 있겠느냐!'라는 메아리를

큰 소리로 고구려군에게 들려주고 Back to the Home.

 

[永豐郡, 本高句麗大谷郡. 景德王改名. 今平州. 領縣二: 檀溪縣, 本高句麗水谷城縣. 景德王改名. 今俠溪縣. 鎭湍縣, 本高句麗十谷城縣. 景德王改名. 今谷州.]

영풍군(永郡)은 본래 고구려 대곡군(大谷郡)이었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평주(平州)이다. 영현이 둘이었다. 단계현(檀溪縣)은 본래 고구려 수곡성현(水谷城縣)이었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협계현(俠溪縣)이다. 진단현(鎭湍縣)은 본래 고구려 십곡성현(十谷城縣)이었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곡주(谷州)이다.

 

신라 때에 만들어진 지리지를 토대로 편찬했을 《삼국사》 한주지리지에 보면

한주 영풍군, 그러니까 지금의 황해도 평산에서 관할하던 두 개의 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그 두 현 가운데 수곡성현이 있었다. 지금의 황해도 신계에 해당하는 수곡성 주위에는

고구려 때는 십곡성이라 불렸던 지금의 곡산이 위치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할머니

저민의의 고향이기도 한 평산은 고구려 때에는 대곡성이라고 불렸다.

 

수곡성, 그러니까 황해도 신계까지 백제군은 고구려군을 추격해 크게 이겼고,

태자 근구수는 수곡성 서북쪽에 자신이 왔다간 것을 알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이로써 대동강 상류의 곡산과 상원 등지에 이르는 패하 이남을

모두 백제에게 빼앗긴 셈이 되었다고, <조선상고사>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백제는 자신들이 평정한 가라 제국을 '임라'라는 이름의 통합조직ㅡ

서유럽의 NATO와 같은ㅡ으로 묶고, 여기에다 또 '왜신관'을 두어

바다 건너 왜의 '출장연락소'로서 유사시 가야뿐 아니라 왜도 동원할수 있는

모종의 군사동맹체제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임라일본부'.

'반(反)고구려 동맹체' 안에서 백제에 의해 형성되고 백제에 의해 주도된

'임라'라는 군사공동체 속에 마련된 왜국의 '출장연락사무소'이자

가야에서의 이권문제에 대한 왜의 입장을 백제 본국에 상주하기 위한 '의견전달소'였으며,

이것이 백제가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남방해양동맹'이었다.

 

[四十年, 秦王猛, 伐燕破之. 燕太傅慕容評來奔, 王執送於秦.]

40년(370)에 진왕(秦王) 맹(猛)이 연을 정벌하여 깨뜨렸다. 연의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도망쳐 왔다. 왕은 붙잡아서 진에다 보냈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그런데 세상이라는 것이 참 변화가 무상한 것이라는게.

그토록 창성할줄 알았던 연이, 진에 의해서 멸망하고 만 것이라.

여기서 말하는 진은 '저'라는 이민족이 세운 전진(前秦)이다.

전진의 왕 부견이, 전연에 대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고

마침내 전연의 수도를 함락시켰으며, 어린 황제는 도망가다 잡히고,

전연에서 실권을 행사하던 태부 모용평이 이번에 도망온 것인데.

 

"올 데를 잘못 고르셨수다."

 

그렇게 깊은 원한을 안겨놓고 도망오면 우리가 받아줄줄 아셨는지.

나한테도 정말 잊을수 없는, 기억만 하면 기분더러운 놈이 하나 있는데,

고등학교 때에 나를 툭하면 갈구면서 못견디게 싫어하는 놈이었었지.

그놈이 만약 자기 집에 불났다고 우리 집에 피난온다고 해도(뭐 오지도 않겠지만) 

난 그놈을 절대 그냥 내쫓지는 않을 것이다.

잘게 썰어서 그 모가지를 개한테 던져줘야 분이 풀리지.

아무튼 그렇게 전연은 비참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사실 어찌 보면 복수랄 것도 없었다만서도)

 

여담이지만, 전연의 수도 업성이 전진에게 함락되던 그 날,

 

[丁丑, 桓帥鮮卑五千, 犇龍城. 戊寅, 燕散騎侍郞餘蔚帥夫餘高句麗及上黨質子五百餘人, 夜開鄴北門納秦兵]

정축에 환이 선비 5천을 거느리고 용성으로 달아났다. 무인에 연의 산기상시(散騎常侍) 여울(餘蔚)이 부여와 고구려 및 상당(上黨)의 인질 5백 명을 이끌고 밤중에 업의 북쪽 성문을 열어 진의 군사를 끌어들였다.

《자치통감》 권제102, 진기(晉紀), 해서공(海西公) 하(下), 태원(太元) 5년(370)

 

연의 산기시랑 여울이라는 자가, 전연에 포로로 끌려와있던

옛 부여와 고구려의 유민 5백 명을 이끌고 몰래 업성의 북쪽 성문을 열어놓아,

전진 군사들의 입성을 돕고 전연을 몰락시키는데 결정적으로 한몫했다.

이때의 여울이 《진서(晉書)》에 나오는 서울(徐蔚), 오늘날에는

부여왕 현의 일족 즉 부여의 왕족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치통감》에 주석을 달았던 몽골제국 초의 호삼성 역시, 여울을 가리켜

'부여의 왕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부여의 왕자 여울은

훗날 부여 본국으로 돌아가 부여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四十一年, 冬十月, 百濟王率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 薨. 葬于故國之原. 百濟蓋鹵王表魏曰 『梟斬釗首』, 過辭也.]

41년(371) 겨울 10월에 백제왕이 3만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은 군대를 내어 막다가 유시(流矢)에 맞고 이 달 23일에 죽었다. 고국(故國)의 들에 장사지냈다.<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위(魏)에 표(表)를 보내기를 『쇠(釗)의 머리를 베어서 달아 매었다[梟斬釗首].』고 하였으나 지나친 말이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백제본기에 보면, 이때 근초고왕이 먼저 백제를 치기 전에,

고국원왕이 먼저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했고, 이것을 듣고 근초고왕이 

패하(浿河)라는 강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그들을 습격해서 패퇴시켰다고 한다.

 

그러고서 겨울 10월에 이르러, 근초고왕은 태자와 함께 정예 군사 3만으로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해 들어왔고,

이 싸움에서 고국원왕은 누가 쐈는지도 모르는 화살에 맞아 죽고 만다.

때는 서기 371년 10월 23일. 고국원왕 치세 41년만의 일이었다.

정말이지 복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왕이었다.

제대로 된 전공 한번 못 올려보고 이렇게 허망하게 가실 줄이야.

너무 허망하게 죽어버려서 이거 뭐, 내가 뭐라고 코멘트를 달수도 없잖아.

 


<안악 3호분 전경>

 

코멘트는 달지도 못하고 다시 안악 3호분 이야기로 돌아가서,

안악 3호분을 고국원왕의 무덤으로 보는 주장은 여러 주장 가운데서도 근래에 나온 것인데,

1990년대에 이르러 북한의 박진욱이라는 교수가 이 설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애초에 안악 3호분의 주인이 고국원왕이 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로 거론되었던

'고국원'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고증이 뒷받침된 것이었다.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고 직접 나가 싸우던 고국원왕이 누가 쐈는지도 모르는 화살에 맞아

그 달 10월 23일에 죽었을 때, 격전지는 곧 평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삼국사》가 말한 이 '평양'을 달리 해석했다.

'고구려 남쪽 평양[高句麗南平壤]'을 '고구려의 남평양[高句麗南平壤]'으로

떼어읽기 방식을 달리해서 본 것이다.

 

한문 문장은 글자를 어떻게 떼어 읽느냐에 따라서 그 뜻이 크게 바뀌는데,

'고구려 남쪽의 평양'이나 '고구려의 남평양'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전자는 그저 고구려의 남쪽에 평양이 있다는 평양의 위치만을 말할 뿐이지만,

후자는 고구려의 남쪽에 마련된 '남평양' 즉 '별도의 평양'을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남평양'이 곧 한성(漢城), 훗날 고구려 부흥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던 곳으로

지금의 황해도 재령 일대에 해당한다.

 

박진욱 교수는 이 '남평양'을 황해도 하성 근방으로 추정하고,

고구려의 고국원이라는 곳 역시도 통상 알려진 것처럼 국내성 근처가 아니라

바로 구월산을 곁에 끼고 재령평야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 안악의 언덕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고국원왕과 근초고왕은 평양 일대에서 싸웠고

그곳에서 고국원왕이 죽었는데, 평양 근교에서 죽은 왕을 뭐하러

국내성까지 옮겨다 장사를 지냈겠냐고. 그래서 고국원왕 무덤을 만들면서

왕이 총애했던 신하 동수를 '딸린무덤' 개념으로

벽화 속에다가 특별히 그려놓은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나는 의심스럽다. 전연이 침공해올까 두려워서

무덤을 후방으로 옮길 것 같으면, 백제의 침공은 두렵지 않다는 건가?

황해도 재령은 백제와도 가까운 곳인데, 백제가 쳐들어와 선왕의 능을 파헤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계산을 고구려인들이 하지 못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유홍준 교수가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에서 말한 것처럼

무덤이 왜 이렇게 호화분묘로 바뀌었는가에 대한 설명도 고국원왕설은 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렇게 보면 결국 고국원왕설도 부정될 수밖에 없는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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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로 시작해 패배로 끝난 왕ㅡ.

고국원왕은 살아생전 위아래로 전연과 백제에게 치이다,

결국 이름모를 백제군의 화살에 맞고 죽어버린 삶 때문에, 고구려 역대 왕들 중에서는

가장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은 왕이 아닐까 싶다.

 

단지 패배만 하다 끝난 무능한 왕이었다고 사람들은 기억하고 계실까?

그가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그렇게 수모를 당했던 걸까?

.....단순히 그것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회의 고국원왕과 그의 아버지 미천왕.

개인적으로, 인간사의 기복과 역사의 흐름이라는 것이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는

이 두 왕을 보면 알수 있다고 보고 있다.

고국원왕의 아버지, 왕실의 종친으로 태어나 역적의 자손이 되고 머슴에 소금장수를 전전하다가

결국 한 나라의 제왕이라는 지위를 얻게 된 미천왕이라는 왕의 삶을 보아도,

한 사람의 운명이 이리 뚜렷한 기복을 보일수 있을까 싶고, 

그런 미천왕의 아들 고국원왕의 삶을 보고 있자면,

우리 역사 속에서는 그렇게나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는 고구려에게도 이런 암울했던 과거가 존재했던가 하는 생각에,

나 자신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입이 벌어지는 것이다.

 

주워들은 말을 빌리자면,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속성을 지닌 것이라 한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내려가야 하고, 내려가 있으면 언젠가는 올라가게 될 날이 있는.

하물며 그런 인간의 아들이 만드는 역사에 기복이 있을 수밖에.

인간이야 어느 시대건 어느 나라건 다 똑같은 것이지.

누구든 즐거운 기억만 있고 싶고, 자랑스러운 역사만 기억하고 싶고.

어두운 것은 좀처럼 기억하지 않고 어떻게든 묻어버리려 하지.

 

하지만 그걸 꼭 천박하다거나 추하다거나 욕해서는 안된다.

그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좋은 면만 알리려 하고

나쁜 면은 조금만 있어도 어떻게든 덮으려고 할 것이다.

그걸 숨기지 않고 자랑스럽게 내놓는 것이 낫다고 하는게 아니라,

숨겨봤자 소용이 없다는 얘기다.

섬나라 오랑캐들이 자기들 치부를 숨기려고 그렇게 애써봤자,

전쟁을 일으켜 죄없는 목숨들을 순국이라는 이름으로 죽게 만들고

수많은 여자들을 종군위안부로 몰고 간 사실이 지워지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쌓아올려도 채워지지 않는 빛과, 조금만 잘못해도 스며들어 빠지지 않는 어둠.

자신에게도 일어날수 있는 불행한 일을 남이 당했다고 해서 그걸 가볍게 볼수 있을까?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을.

좋은 면이든 나쁜 면이든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모르는 건가.

이렇듯 기분이 썩 좋지 못한 역사마저도, 

우리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면면히 살아있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조금은 고국원왕이라는 이 왕의 이야기를 고구려 역사의 치부라고 여기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우리가 살아왔던 5천년 역사속의 한 모습으로 봐주기를 바란다.

인간의 모습은 지극히 다양한 것이니까.

때로는 너무 흉하고 처절해서 감추고 싶을 만큼.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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