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VGEBhP

<10>온 달 (중)
북주<北周> 침략군 무찌른 배산<拜山>전투의 주역
2010. 05. 06   00:00 입력 | 2013. 01. 05   05:34 수정
 

온달산성 북벽. 차곡차곡 돌을 쌓아 올린 전형적인 고구려식 산성이다.
 

온달산성 아래 온달동굴에도 온달장군의 전설이 서려  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공주의 나이 꽃다운 열여섯 살이 됐다. 공주가 어여쁜 처녀로 자라서 시집갈 나이가 되자 대왕은 공주의 혼처를 물색했다. 사건은 공주의 혼사 이야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부왕이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출가시키려 하자 공주가 울며불며 이렇게 따지고 들었기 때문이다.

“폐하! 소녀를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시갔다니 그것이 무슨 말쌈이십네까? 소녀는 골백번 고쳐죽어도 다른 데로는 시집가지 않갔습네다!”

“아니, 공주야! 너 지금 무스거 소리를 하고 있는 기야? 다른 곳으로 시집가지 않갔다니, 기렇다면 네가 이미 점찍어 둔 사내라도 있다는 말이야 뭬야? 날래 고해 바치라우야!”

“폐하께서 소녀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르지 아니하셨습네까? 네가 자꾸 울기를 좋아하니 다음에 크면 온달의 각시로 주마고 아니하셨습네까? 그러고도 이제 와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시갔다면 그 말쌈이 거짓 말쌈이 아니고 무엇이갔시오? 소녀는 죽어도 온달을 낭군으로 삼고야 말갔습네다!”

그제야 대왕은 공주의 말이 실없는 농담도 아니고 단순한 생떼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불같이 노해 대궐이 떠나가도록 소리쳤다. 

“예끼, 천하에 고약하고 발칙하고 무엄한 간나이 같으니! 네 어찌 이토록 방자하게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기야! 너는 대고구려의 황녀가 아니냐? 그럼에도 미천한 온달의 각시가 되갔다 기런 말이야?”

“대고구려 천자이신 폐하께서 하신 말쌈이오니 더욱 중하지 않갔습네까? 저자의 이름 없는 필부도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아바지 대왕께옵서 어찌 거짓말쌈을 하시갔시오? 소녀는 대왕폐하의 딸인 까닭에 폐하의 말쌈에는 거짓이 없음을 만천하에 널리 알리고자 더욱 온달에게 시집가고자 하옵네다!”

말꼬리가 잡힌 데다 말문까지 막혀버린 대왕이 분노에 못 이겨 냅다 고함을 질렀다.

“예라, 고얀 년! 나쁜 년! 넌 이제부터 내 딸이 아니야! 너같이 못된 년은 애당초 낳지도 않은 것으로 칠 터이니 썩 물러가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도 말라우야! 아, 썩 나가지 못 하갔네?”

그렇게 하여 공주는 궁궐에서 쫓겨나게 됐다. 그때 공주는 금팔찌 수십 개를 지니고 대궐을 나왔다고 했으니 이는 부왕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녀는 무엇이 부족해 고귀한 공주의 신분도 버리고 부왕의 내침을 자초해 화려한 대궐을 등졌을까. 

어쩌면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새장 속에 갇힌 새와 다름없는 궁중 생활이 싫어 넓디넓은 바깥 세상의 자유를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미 몰락한 집안의 하급무사인 온달과 몰래 만나 사랑을 키워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에는 공주가 홀로 궁에서 나와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길을 물어 온달의 집으로 찾아갔다고 했다. 그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평강공주는 마침내 온달의 색시가 되어 함께 살게 됐다. 그렇게 해서 천대받던 신분의 온달은 하루아침에 팔자를 고쳐 비록 몰래 한 혼인이지만 고구려 대왕의 사위가 됐던 것이다.

공주는 출궁할 때에 갖고 나온 금팔찌며 보석을 팔아 집과 땅과 노비와 소 따위를 사들여 집안을 새롭게 일으키고 가꾸었다. 집을 사고 땅을 사서 노비들로 하여금 밭을 갈게 한 공주는 온달도 더 이상 놀고먹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바보 소리를 들을 만큼 우직한 온달을 고구려의 그 어떤 사내보다도 더욱 날쌔고 용감한 장수가 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주는 터를 고르고 마구간을 세운 다음 온달에게 돈을 주고 저자에 나가서 말을 사 오라고 시켰다. 

온달이 시키는 대로 마장(馬場)에 가서 병들어 보잘것없어 보이나 나라에서 못 쓰겠다고 내놓은 말을 사왔는데, 공주가 먹이고 정성껏 돌보니 금세 늠름한 준마의 모습을 되찾았다. 온달은 그로부터 자고 일어나면 말달리고 활쏘고 창검 휘두르며 열심히 무술을 익혔다.

그렇게 갈고 닦은 실력이 마침내 빛을 보게 됐으니 그것은 고구려에서 해마다 음력 3월 3일이면 평양성 교외 낙랑의 언덕에서 대왕이 친히 주재하는 사냥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온달이 그 대회에서 공주가 가꿔 준 그 말을 타고 그동안 연마한 무술 솜씨를 한껏 발휘하니 말달리기도 으뜸이요, 활시위를 당겨 쏘면 쏘는 대로 모조리 잡는지라 보는 사람마다 놀라 혀를 내둘렀다. 그의 눈부신 솜씨는 마침내 대왕의 눈에도 띄어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됐다. 

“어허, 근래에 보기 드문 용사로다! 저기 저 황소처럼 억세고 범처럼 날쌘 무사가 어느 부에서 온 누군고? 이리 데리고 와 보라우! 짐이 친히 만나보고 상을 내려야 되갔어.”

그렇게 해서 온달은 처음으로 장인인 평강대왕과 대면하게 됐다.

“그래, 이리 가까이 와 보라우. 네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에 사는가 날래 말해보라우야?”

“네이! 천한 놈의 이름은 온달이라 하옵고 하부에 사옵네다!”

“아니 뭐가 어드래! 네가 바로 그 바보 온달이라 그기야? 세상에 이럴 수가!”

대왕은 놀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옛날부터 입버릇처럼 ‘바보 온달 바보 온달’ 하다가 사랑하는 외동딸을 빼앗긴 바로 그 녀석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아비의 뜻을 어기고 제멋대로 대궐을 뛰쳐나간 공주에 대한 분이 덜 삭고 화가 덜 풀렸음인지 대왕은 그 자리에서는 온달을 자신의 사위로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회는 또다시 찾아왔으니, 그것은 북주(北周) 무제(武帝)의 군대가 요동으로 침범해 전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쳐들어온 나라가 후주(後周)라고 했는데 이것은 틀린 기록이다. 후주는 고구려가 망한 다음인 서기 951년부터 960년까지 존재한 중국 오대(五代) 최후의 왕조였고, 실은 선비족의 한 갈래인 우문씨(宇文氏)가 세운 북주로서 556년부터 581년까지 겨우 25년간 지탱하다가 수 문제(隋文帝) 양견(楊堅)에게 망한 하루살이 제국인 것이다. 중국 북방을 석권해 한때 강성을 뽐내던 이 북주의 무제가 고구려를 노략질하러 쳐들어오자 평강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배산(拜山)의 들판에 나아가 적군을 여지없이 물리쳤다.

이때 범처럼 사납고 날쌘 용사가 있어서 스스로 선봉이 돼 적진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용감하게 오랑캐들을 무찌르니 싸움이 끝난 뒤에 논공행상을 하는데 그 용사의 전공이 단연 으뜸이었다.

대왕이 불러보니 이번에도 또 온달이 아닌가. 대왕이 그제야 무릎을 철썩 치며 이렇게 소리쳤다.

“바보, 아니 온달아! 너 오늘 정말로 화끈하게 잘 싸웠지 뭐갔네! 과연 너는 내 사위다 그기야! 내 이 자리에서 너를 고구려의 대형(大兄)으로 삼갔노라!”

<황원갑 소설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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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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