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jhsong46.blog.me/70171856065 
* "혁명을 일으킨 고구려의 여걸 ´부여태후´ - 김용만" 에서 태조왕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태조왕
2013/07/18 06:03

수렴청정에서 벗어난 태조대왕

어린 나이에 왕이 된 태조대왕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왕으로서의 자질을 키워 나갔다. 10년 가까이 수렴청정을 통해 왕권을 행사한 부여태후는 그가 10대 중반이 되자 모든 권한을 물려주었다. 태조대왕은 일찍부터 국내를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였다. 주로 사냥을 빙자한 나들이였지만, 이것은 국내 여러 세력들의 동태파악과 포섭, 그리고 주변세력에 대한 탐문 등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태조대왕이 대왕이란 칭호를 얻게 된 이유는 그가 호칭에 걸맞는 많은 일들을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여 왔다. 태조대왕도 마찬가지로 주변으로 세력을 팽창하여 여러 작은 나라들의 항복을 받았다.

태조대왕 16년인 서기 68년, 20대의 젊은 태조대왕이 다스리는 고구려는 힘이 넘쳤다. 고구려의 강성함을 옆에서 지켜보던 갈사국의 도두왕은 스스로 자기 나라를 바치며 항복해 왔다. 부여 대소왕의 동생이 세웠던 갈사국은 불과 47년 만에 스스로 멸망하고 말았다. 태조대왕은 도두왕에게 우태 직위를 주고 신하로 삼았다. 우태는 고구려의 중요 관직인 중외대부나 좌보, 우보에 임명될 수 있는 높은 관등이나, 패자보다는 낮은 관등이다. 멸망 직전의 갈사국은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4년 후 태조대왕은 영토를 더욱 넓히고자, 관나부 패자 달가를 보내어 조나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달가는 조나를 공격하여 그 왕을 사로잡았다. 또 2년 후에는 환나부 패자 설유를 보내어 주나를 공격하게 했고, 설유 또한 주나의 왕자 을음을 사로잡아 왔다.

주나는 큰 세력이었던 탓에 그 왕자 을음을 고추가로 대우해 주었다. 고추가는 왕의 장인이나 유력한 부족의 부족장, 왕가의 유력한 대인에 한해서만 칭할 수 있는 호칭이다. 주나를 합병한 것은 이제 고구려가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여러 작은 세력들을 전부 통합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고구려 주변에는 이제 북쪽에 부여, 서쪽에 후한, 남쪽에 후한의 낙랑군, 북동쪽에 숙신이 있었다. 그러면 동쪽에는 어떤 나라가 있었을까. 남동쪽에 위치했던 동예는 이미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고, 동쪽인 오늘날의 연변자치주와 연해주 지역은 태조대왕 시기에 새롭게 고구려에 편입된다. 주나와 조나, 갈사국이 이 지역에 위치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태조대왕은 어머니 부여태후의 요서 진출과는 달리 동쪽으로 세력을 확충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후한은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강대국 후한을 상대로 고구려가 요서 지역에 군사를 주둔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오래도록 지배하는 것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내적 정비가 더 필요한 상태에서 강대국 후한과 정면대결을 펼칠 힘이 부족했다. 고구려에게 요서 지역 진출은 아직까지는 과대 팽창이었다. 요서 지역에서 약탈이나 일시적 군사활동은 가능해도 고구려 내지처럼 직접 지배는 어려웠다. 이 시기 고구려에게 현명한 선택은 과다한 국력이 소모되는 요서 지역 지배보다는 후방기지 건설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태조대왕은 요서 지역 지배를 어느 시점에서 포기한 듯하다.

반면 태조대왕은 고구려의 동부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다. 오늘날 연변자치주가 있는 곳은 예로부터 넓은 평야가 있어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이다. 이곳을 흐르는 두만강과 그 지류하천들은 이곳 평야를 기름지게 했다. 발해시대에는 이곳의 쌀이 특산물일 정도였다. 이곳의 중심지는 오늘날의 혼춘시 인근에 위치한 책성이었다.

태조대왕은 서기 98년 책성을 직접 방문하였다.

그가 책성에 머문 기간은 3월부터 10월까지로 반년이나 되었다. 태조대왕은 이곳에서 많은 신하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었다.

“이제 이곳은 새로운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이곳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한 반감을 갖지 않도록 여러 신하들이 힘써 주기 바란다. 하루 빨리 이들을 충성스런 고구려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그대들의 임무다. 고구려에 항복했지만, 아직도 과거를 잊지 못하고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들을 고구려의 충성스런 신하로 만들고자 내가 이곳에 직접 온 것이다. 이곳이 고구려의 든든한 후방이 되어야만 장차 후한과 전쟁이 벌어져도 우리가 지속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이 점을 명심하고 각자 임무에 정성을 다해 주기 바란다. 오늘은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연회를 베푸는 것이니 마음껏 마시고 즐겨라.”

아마도 태조대왕은 연회를 베풀면서 신하들에게 이와 같은 지시를 했을 것이다.

수도를 떠나 국왕이 한 곳에서 반년이나 머물렀다는 것은 그 지역이 국가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말해 준다. 게다가 그곳이 별궁이 있거나 휴양지가 아닌 최근에야 개척된 땅임을 고려한다면 태조대왕의 행차는 상당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이다.

태조대왕은 이 지역 수비대장에게 노고를 치하하는 선물을 주었다. 또 자신이 방문한 사실을 산에 있는 바위에 새기기도 했다. 이것은 현재까지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금석문에 대한 기록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태조대왕의 공덕이 새겨진 바위를 찾지 못하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태조대왕 스스로 자신의 공덕을 바위에 새겼다는 것은 책성 지역 개척이 그에게 큰 의미였음을 말해 준다.

태조대왕이 국가적 내실을 다지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책성 지역의 사람들은 쉽게 동화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태조대왕은 4년 후에 다시 사람을 보내어 그곳의 백성들을 돌보도록 했다. 이런 태조대왕의 노력으로 책성 지역은 국내성, 평양, 요동, 부여 지역과 함께 고구려의 5대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발해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된다.

고구려의 후한 공격

태조대왕 25년 부여에서 사신이 왔다. 사신은 뿔이 3개가 난 사슴과 긴 꼬리를 가진 토끼를 태조대왕에게 바쳤다. 대무신왕의 부여 정벌 이후 양국의 국력은 역전되어 고구려가 확실한 강국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부여가 고구려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되었다. 태조대왕 53년인 서기 105년에도 부여에서는 매우 크고 털이 아름다운 범을 바쳤다.

태조대왕은 이 해에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자, 이제 부여도 고구려에 복종하고, 주변의 여러 나라들도 모두 정복했다. 또한 우리의 국력도 충실해졌다. 그렇다면 이제는 서쪽의 후한을 공격해도 될 것이다. 마침 후한도 전성기가 끝나 가고 있다는 징조가 보이고 있다. 이제 저들에게 내주었던 옛 땅을 되찾자.”

태조대왕은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자인 고구려라면 당시 수천만의 인구와 넓은 영토를 가진 후한과 맞서 싸워도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에 차 있었다. 서기 25년 건국된 후한은 광무제, 명제, 장제, 화제 4명의 임금을 거치면서 전성기를 누렸으나, 화제 말년경부터 망해 가는 조짐이 보였다. 서기 105년 12월 화제가 죽자 그의 뒤를 이은 상제, 안제, 소제 등이 모두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었고, 환관과 외척의 세력이 커지면서 정치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고구려는 후한의 이같은 상황을 손금 보듯 정확히 알고 있었다. 첩자를 후한에 파견해 두었고, 후한을 왕래하는 사신과 상인들을 통해 후한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봉화와 파발병은 다른 나라의 소식을 신속히 고구려 중앙정부에게 알렸다. 태조대왕은 화제 말년의 혼란을 알고서 공격을 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된 고구려의 공격은 후한 요동태수의 군대에 의해 격파되었다. 후한은 이제 막 전성기를 지났지만 여전히 강력한 나라였다.

태조대왕은 111년과 118년, 그리고 121년 연이어 후한의 요동군과 현도군 공격을 명령했다. 후한의 내분을 충분히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특히 121년 전쟁은 중요했다. 그해 봄 후한이 먼저 공격해 왔다. 태조대왕은 아우 수성을 보내 적과 싸우게 했다.

수성은 군사 2천을 이끌고 후한의 유주자사와 현도태수가 이끄는 군대와 맞서 싸웠다. 그러면서 거짓으로 항복하겠다는 뜻을 적에게 알렸다. 후한의 유주자사 풍환은 이를 믿고 공세를 늦추었다. 수성은 험한 곳에 의지하여 후한의 대군을 막으면서 3천의 군대를 보내어 후한의 현도, 요동 2개군을 공격하여 성들을 불태우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고구려의 양면 작전에 놀란 후한에서는 만리장성 이남의 여러 지역에서 군대를 출동시켰지만, 고구려군은 재빨리 돌아가 버렸다.

태조대왕은 여름에는 선비족 8천 명을 거느리고 요동군을 공격하여 적장 채풍과 그 휘하 장수들을 여럿 죽이고 대군을 격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선비족은 유리명왕 시기 이래로 고구려에게 굴복한 후, 이처럼 고구려의 요청이 있으면 군대를 이끌고 와서 도왔다. 선비는 고구려의 간접적 지배를 받는 세력이었다. 당시 고구려와 후한의 전쟁은 요하 동쪽만이 아니라 요하 서쪽에서도 이루어졌다. 태조대왕은 적의 포로를 잡아오고 물자를 빼앗아 오면서 경제적 이익을 취했다.

이렇게 태조대왕이 거듭 승리를 거두자 후한에서는 크게 당황했다. 그들은 태조대왕을 몹시 무서운 인물로 생각하게 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떴으며, 포악하고 용맹하고 싸움을 잘하는 무시무시한 인물이라고 그를 평가했다. 후한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태조대왕은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후한은 고구려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는다. 동방의 어떠한 나라도 고구려 앞에는 머리를 굽혀야 한다. 우리 고구려의 강성함을 보아라.”

그는 이와 같은 허세를 부렸을 것이다. 그러나 태조대왕의 자만심은 곧 고구려의 발전에 치명타가 될 실수를 부르고 말았다.

부여의 자존심

그해 10월 태조대왕은 부여국으로 행차하여 고구려 건국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당시 부여는 고구려에게 굴복한 상태였고, 고구려가 연이어 후한을 물리치는 등 그 기세가 대단하던 상황이었기에 태조대왕의 부여국 행차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태조대왕은 마치 자신이 부여국을 다스리는 것처럼 행동했다. 부여에서 못사는 백성들을 직접 만나 어려운 사정을 묻고 고구려에서 가져온 물건을 나눠 주었다.

마침 오랫동안 부여에 굴복하고 있던 숙신마저 사신을 보내어 태조대왕에게 선물을 바쳤다. 그러자 태조대왕은 부여에서 숙신 사신을 위해 잔치까지 열었다. 태조대왕은 부여에서 왕노릇을 다했던 것이다.

다음달 11월 태조대왕이 고구려로 돌아왔다. 태조대왕은 고구려의 강성함을 북쪽의 부여와 숙신에 널리 알리고 왔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부여 사람들은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다.

“우리 부여가 고구려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고구려 너희들이 강하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이렇게 모욕을 주다니, 우리 부여의 힘으로 너희에게 복수하겠다.”

부여 사람들은 부여가 고구려의 조상 나라이고, 예전에는 부여가 고구려보다 강한 나라였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부여 사람들은 부여가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고구려보다는 몇 수 위의 나라이며, 주변 국가들의 존경을 받는 거룩한 나라라고 믿어 왔다. 자존심이 상한 부여인들은 곧 고구려를 향한 복수심을 발휘했다.

부여에서 돌아온 태조대왕은 바로 다음달인 12월 기병 1만 명을 동원하여 후한의 현도성을 공격했다. 물건을 약탈하고 포로를 잡아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부여왕이 왕자 위구태를 시켜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현도성에 왔다. 그리고는 후한의 병사와 힘을 합쳐 고구려를 공격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고구려군은 크게 패배했다.

다음해 태조대왕이 다시 후한의 요동 지역을 공격하였지만, 이번에도 부여왕이 구원병을 보내는 바람에 고구려군이 또다시 패배했다.

태조대왕은 부여가 후한의 편에 있는 한 더 이상 후한을 공격해도 승리할 수 없음을 알았다. 후한에서도 늘 고구려와 맞서 싸울 수 없음을 알고 고구려에서 잡아간 포로를 돌려주면, 어른 포로 1명당 비단 40필, 어린이는 비단 20필를 주겠다고 협상안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막대한 재물을 얻고 후한과의 전쟁을 일시 중지했다.

만약 이때에 부여의 방해가 없었다면, 고구려는 후한과의 싸움에서 더 많은 승리를 거두고 요동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했을 것이다. 태조대왕이 부여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던 것이 결국 고구려의 손해로 돌아오고 말았다. 부여는 이때부터 고구려와 적국이 되고, 중원의 여러 나라와 협조하게 되었다. 태조대왕이 부여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았다면 분명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아우 수성의 욕심

태조대왕은 7세의 나이로 왕이 되어서 무려 94년간이나 왕위에 있었다. 그에게는 수성과 백고 두 아우가 있었다. 그 가운데 수성은 후한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따르는 무리들이 많았다. 수성은 좌보 목도루, 우보 고복장과 함께 연로한 태조대왕을 대신하여 정치대사를 좌우하는 중요한 인물이기도 했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수성은 차츰 자신이 왕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태조대왕 80년, 수성은 왜산에서 사냥하며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더불어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연회를 베풀었다. 사냥 후의 연회는 귀족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자 정치의 한마당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관나부 우태 미유, 환나부 우태 어지류, 비류나부 조의 양신 등이 수성에게 은밀히 말을 건넸다.

“과거의 사례를 볼 때 대왕이 연로하시면 왕위를 왕제(왕의 동생)에게 물려주시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는 그러한 마음을 안 갖고 계시니 왕제께서는 차차 내일을 준비하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대왕이 연로하지만 그 아들이 있으니 어찌 감히 내가 왕위를 엿보겠느냐.”

“아니옵니다. 왕위는 현명한 자에게 돌아가야 하니 왕제께서 왕이 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수성은 도와줄 무리들이 많음을 알고 은근히 자부심을 가졌다. 실력으로 친다면 수성은 누구보다 왕위에 오를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태조대왕에게는 막근과 막덕 두 아들이 있었고, 다음 왕은 막근이 되는 것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도 많았다.

좌보 목도루가 그러한 인물의 하나였다. 하지만 목도루는 수성에게 대항하여 막근을 왕위에 올릴 실력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수성의 야심이 점차 드러나자, 수성이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다면 가장 먼저 자신에게 해가 올 것임을 예측하고 그것이 두려워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 버렸다.

수성은 형에게 직접 칼을 들이댈 수는 없었기에 왕이 될 야심을 가진 채로 기다렸다. 태조대왕보다 24살이 적은 그는 언젠가는 자신의 시대가 오리라고 믿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자 수성은 정치보다는 사냥을 즐기며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거나 오락에 정신을 팔았다. 그러자 수성에게 동생인 백고가 간언을 하였다.

“형님께서는 대왕님의 친동생으로 모든 신하들의 으뜸이 되어 지위와 공훈이 이미 지극함에 이르렀습니다. 형님께서는 마땅히 사욕을 버리시고 위로는 대왕님의 덕과 같이하고 아래로는 민심을 얻은 후에야 부귀가 몸에서 떠나지 않고 재앙이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러한 일에 신경쓰지 않으시고 오락을 탐하시고 근심을 잊으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매우 위태로운 일입니다.”

“사람의 마음이야 누가 부귀환락을 원치 않겠느냐만은 그것을 얻는 자는 만 명에 하나도 없다. 지금 내가 환락을 즐길 만한 자리에 있어도 능히 맘대로 하지 못한다면 장차 무엇에 쓰겠느냐.”

수성은 왕의 자질을 다듬기보다는 태조대왕이 빨리 죽기만을 기다렸고 자신을 위한 충언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태조대왕은 오래오래 살아 100세를 넘기고 말았다. 태조대왕 94년이 되자, 수성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인지 좌우의 부하들을 불러모아 지시를 했다.

“대왕이 늙어도 죽지 않고 내 나이도 많아졌으니 기다릴 수 없구나. 너희들이 내가 왕이 될 수 있도록 일을 꾸며 주기 바란다.”

그런데 이때 한 사람이 나와 그의 명령에 제동을 걸었다.

“지금 왕제께서 상서롭지 못한 말을 하셨는데도 주변에서 명령만을 따르겠다고 했으니 이는 아첨입니다. 제가 직언을 하겠습니다.”

“그대가 직언을 한다면 내가 들어 주겠다.”

“지금 현명한 왕이 계십니다. 왕제께서 대왕을 몰아내시려 한다면 이것은 재앙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왕제께서 더욱 공손히 대왕을 모시고 착하게 사신다면 대왕도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가지실 것입니다.”

하지만 수성은 너무나 오래 왕이 되기를 기다렸기에 그 말이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좌우의 신하들은 즉시 눈치를 채고 수성에게 은밀히 말했다.

“저놈을 살려 두면 지금 모의하고 있는 계획이 발각될지 모릅니다. 저희들에게 저놈을 맡기시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수성은 마침내 직언한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수성이 왕위에 오르는 것에 가장 강력히 반대해 오던 우보 고복장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태조대왕에게 수성의 야심을 말해버렸다.

“대왕이시여, 수성이 장차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먼저 그를 잡아서 죽이십시오.”

태조대왕이라고 해서 수성의 욕심을 모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신하들이 수성을 따르고 있었고, 자기 동생인 까닭에 이렇게 대답해 버렸다.

“내가 늙었고 수성이 나라에 공을 세웠으니, 그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노라.”

고복장은 안타까운 마음에 다시 한 번 태조대왕에게 건의했다.

“수성은 잔인하고 어질지 못합니다. 만약 수성이 왕이 되면 대왕의 자손들마저 해칠 것입니다. 아우만을 생각하지 마시고 자식 생각도 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태조대왕은 고복장의 말을 듣지 않고 왕위를 수성에게 넘겨주고 별궁으로 물러나 버렸다. 태조대왕은 고구려의 체제를 안정시키고,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자로 고구려의 위상을 강화시켰지만 부여와 사이가 벌어져 더 큰 발전을 이루는 데 실패했다. 또한 한때 장악했던 요서 지역을 확보하는 데도 실패했다. 그러나 태조대왕은 책성 지역을 개척하고, 주변의 여러 소국 통합을 마무리하는 큰 공을 남겼다. 그리고 조용히 역사의 뒷무대로 사라졌다.

차대왕의 측근정치

태조대왕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수성이 고구려 7대 왕으로 즉위하니 곧 차대왕이다. 차대왕은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에게 높은 벼슬을 주고 이들을 중심으로 정치를 했다. 차대왕이 왕이 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던 미유, 어지류, 양신은 특히 높은 벼슬을 받았다.

관나부 우태 미유는 그간 패자의 관등으로 올라 있었지만, 차대왕이 등극한 이후에는 최고의 관직인 좌보에 임명되었다. 환나부 우태 어지류는 좌보 직위와 함께 대주부가 되어 국가의 재정을 책임졌고, 비류나부 양신은 중외대부가 되었고, 조의라는 낮은 관등에서 우태 관등으로 올랐다.

반면 고복장은 수성이 왕으로 즉위한 지 2개월도 안 되어 잡혀 죽었다.

“원통하다. 내가 앞서 태조대왕의 측근 신하가 되어 어찌 반란을 일으킬 인물을 보고도 잠자코 말을 하지 아니하였더냐. 태조대왕이 나의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 지금 그대가 대왕의 자리에 올라 마땅히 정치를 새롭게 하여 백성에게 보여야 하거늘 의롭지 못하게도 한 충신을 죽이려고 하니 내가 도가 없는 시대에 살진대 차라리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도다.”

고복장은 이렇게 통분을 하며 죽었다. 차대왕은 고복장을 죽이고 난 후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첫 번째 인물로 태조대왕의 첫째아들인 막근을 지목했다.

“조카녀석이 내가 자기를 제치고 왕이 된 것에 불만을 갖고 있으렷다. 나를 반대하는 놈들은 막근을 내세워 그를 왕으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밀지도 모른다. 녀석을 죽이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야.”

차대왕은 사람을 시켜 막근을 찾아서 죽여 버렸다. 그러자 막근의 동생인 막덕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고복장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태조대왕을 위협하여 왕위에 오른 절차가 문제 되었던 차대왕은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조카마저 죽일 수밖에 없었고, 그 일로 결국 많은 이들을 의심하게 되었고 따라서 정치는 자신들의 측근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의 왕실인 계루부와 함께 차대왕을 도운 환나부, 관나부, 비류나부는 이제 고구려를 구성하는 중요한 세력이 되었다.

차대왕은 의심이 많았고, 자신에게 아부하는 사람을 등용했다. 당연히 백성들의 원망이 심해졌다. 한편 고구려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部)이면서도 권력에서 소외된 연나부는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차대왕 20년인 서기 165년 3월에 상왕인 태조대왕이 무려 118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동생에게 대왕의 자리를 넘겨주는 바람에 자신의 아들이 죽는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그는 살아서 왕위를 물려준 첫 번째 왕이었지만, 말년은 너무나도 쓸쓸했다.

태조대왕이 죽은 그해 10월 은밀히 세력을 키우던 연나부의 조의인 명림답부는 백성들이 견디지 못함을 이유로 내세워 차대왕을 시해하고 태조대왕의 또 다른 동생인 백고를 왕으로 모셨다.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김용만, 도서출판 창해)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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