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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의 강, 두만강을 말한다(19) - 고구려시기 녀성파워의 이모저모
3. 강성왕국의 토대를 닦아놓은 녀걸―부여태후
김관웅  2012-9-6 9:20:23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녀걸―부여태후의 치적이 상세하게 기록되여있다.[5]
 
제3대왕 대무신왕(大武神王, 기원 4-44)으로부터 제6대왕 태조대왕(太祖大王, 47-165)에 이르는 백년 남짓한 동안은 고구려 700년 왕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강성제국의 토대를 닦아놓은 력사시기라고 할수 있다. 이 시기에 고구려의 발전을 위해 마멸할수 없는 공로를 세운 많은 사람들중에서 반드시 엄지손가락에 꼽아야 할이는 남자가 아닌 녀자인데, 그녀가 바로 태조대왕의 어머니 부여태후(扶余太后)이다.
 
부여태후의 본격적인 정치생애는 고구려의 제5대왕 모본왕(慕本王, 48-53)을 제거하고 일곱살 난 자기의 아들 태조대왕을 왕위에 올려놓으면서부터 시작된다.
 
일곱살의 철부지 어린애가 정치를 한다는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되는 일이다. 정치의 실권은 놀랍게도 태조대왕의 어머니인 부여태후에게 돌아갔다. 남편이 분명이 살아있음에도 부여태후는 녀자의 몸으로 정치 제1선에 뛰여들었다.
부여태후는 태조대왕의 어머니로서 수렴청정을 했다. 그러므로 태조대왕 초기에 벌어졌던 일들은 전부 부여태후의 궁량과 결정에 따른것이였다.
 
부여태후는 태조대왕이 아홉살 되던 해인 기원 55년에 신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고구려를 세운지도 이제 100년이 되여간다. 나라를 더 크게 발전시키려면 령토를 넓히고 차지한 땅은 더 잘 다스려야 한다. 먼저 우리가 가진 료서땅에 열개 성을 쌓아 후한(后汉)의 침입을 막도록 하라.
 
보는 바와 같이 부여태후는 치국의 안목을 지닌 인물이였다.
 
그녀는 모본왕때에 이미 확보한 료하서쪽 지방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 여기에 성을 쌓으라고 지시를 했던것이다. 그녀는 또 다음해 7월에 군사를 보내여 지금의 조선 함경남도 함흥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세력을 펼치고있는 동옥저를 공격하여 그 땅을 차지하고 관리를 파견했다. 고구려는 이 고장을 지배함으로써 동해의 수산자원을 획득할수 있게 되였다. 또 동해의 해안평야를 따라 남쪽의 신라와도 만날수 있었고, 바다 건너 일본렬도로 나갈수 있는 해상통로도 얻게 되였다.
 
동옥저는 습복, 언어 등이 고구려와 비슷했다. 고구려사람들은 동옥저사람들에게 각종 세금을 거두고 특산물을 바치게 하였다. 처음에는 동옥저인들이 노비의 대우를 받았지만 점차 고구려인으로 동화되여갔고 고구려의 든든한 후방이 되였다.
 
부여태후의 담력과 끈질긴 노력으로 고구려는 동쪽으로 동해, 남쪽으로는 청천강, 북쪽으로는 부여국, 서로는 료서지방에 이르는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되였다.
 
부여태후는 고구려가 강성왕국으로 도약할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후에 아들인 태조대왕에게 정치의 권한을 넘겨주고 물러난 위대한 녀걸이였다.
 
태조대왕은 어머니가 마련해준 이 발판을 충분히 리용하여 고구려 동부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오늘날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는 곳은 예로부터 넓은 평야가 있어 사람들이 살기 좋은 지방이였다. 이곳을 흐르는 두만강과 그 지류하천들인 해란강, 부르하통하, 훈춘하, 가야하 등은 이곳의 평야를 기름지게 했다. 그래서 콩과 쌀이 이 고장의 특산물일 정도였다. 이 고장의 중심지는 연변대학 반진석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연길시 시가지에서 동쪽으로 15리 정도 떨어져있는 성자선산성과 하룡고성 그리고 연길시 흥안향에 있는 흥안고성 등이 합쳐진 고구려와 발해시기의 책성(栅城)이라고 한다.
 
태조대왕은 기원 98년 3월에 책성을 직접 방문하여 여러 신하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고 책성을 지키는 각급 관원들에게 차등 있게 선물을 하사하고 자기의 공적을 암벽에 아로새겨놓았다고 하며, 그해 10월에 또 한번 책성을 순시하였다고 한다.[6]
 
이 일이 있은 4년후인 태조대왕 50년(기원 102년)에도 태조대왕은 다시 사람을 보내여 책성의 관원들을 안무(安抚)하고 백성들을 돌보도록 했다. 이런 태조대왕의 노력으로 책성지역은 국내성, 평양, 료동, 부여 지역과 함께 고구려의 5대 중심지의 하나가 되였으며 나중에는 발해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된다.
 
태조대왕의 이런 치적은 그의 어머니인 부여태후가 마련한 토대우에 이룩된것이였다. 하지만 전쟁이 많았던 나라인만큼 고구려에서 녀자가 왕이 된다는것은 무척 어려웠던 모양이다. 부여태후는 중국의 황제 무칙천처럼 스스로 왕이 되지는 못했다. 아들을 내세워 왕으로 삼고 자신은 실질적인 왕노릇을 하는것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부여태후는 어느 왕만 못지 않게 큰 일을 해낸, 고구려력사에서 실질적인 최초의 녀왕이라고 할수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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