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21>제9대 고국천왕

[故國川王<或云國襄>, 諱男武<或云伊夷謨> 新大王伯固之第二子. 王身長九尺, 姿表雄偉, 力能扛鼎, 蒞事聽斷, 寬猛得中.]

고국천왕(故國川王)<혹은 국양(國襄)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남무(男武)<혹은 이이모(伊夷謨)라고도 하였다.>이다.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왕은 키가 아홉 척이고 자태와 겉모습이 크고 위엄이 있었으며 힘이 능히 솥을 들 만하였고, 일에 임하여는 남의 말을 듣고 결단하였으며 관대하고 엄함에 있어 중용을 지켰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고구려 제9대 남무왕(고국천왕)은 그렇게 즉위했다. 키는 9척에 힘은 솥도 들어올릴만하고.

성품도 남의 말을 듣고 결단을 내리면서, 적절하게 너그럽고 적절하게 엄했다고.

(사실 왕 치고 이런 수식 하나 안 붙는 왕은 없지만)

 

[二年, 春二月, 立妃于氏爲王后. 后提那部于素之女也. 秋九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2년(180) 봄 2월에 왕비 우(于)씨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 왕후는 제나부(堤那部) 우소(于素)의 딸이다. 가을 9월에 왕은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제나부란 곧 연나부인데, 왕실과 혼인하여 고추가()라는 귀척 칭호를 받았다. 

 

[四年, 春三月, 甲寅夜, 赤氣貫於大微如蛇. 秋七月, 星于大微.]

4년(182) 봄 3월 갑인 밤에 붉은 기운이 뱀처럼 태미(太微)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살별[星]이 태미를 지나갔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붉은 기운이 뱀처럼 태미를 스치고, 살별이 또다시 태미를 스쳤다ㅡ고.

고대 동아시아에서 전쟁의 징조를 의미하던 '붉은'빛의 '뱀'같은 기운에,

좋지 못한 징조를 알리는 살별까지 태미를 스쳐갔다는 것을.

당시 역사 기록을 맡은 사관이나, 천문관측 담당관리들은 뭐라고 해석했을까?

 

[六年, 漢遼東太守興師伐我. 王遣王子須拒之, 不克. 王親帥精騎往, 與漢軍戰於坐原, 敗之. 斬首山積.]

6년(184) 한의 요동태수가 군대를 일으켜 우리를 쳤다. 왕은 왕자 계수(須)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했다. 왕은 직접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의 군대와 좌원(坐原)에서 싸워 그들을 패배시켰다. 참수한 것이 산더미 같았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한의 요동태수가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왔을 때.

처음에 왕은 계수라는 왕자를 보내어 막게 했었다.

계수라는 이 사람은 《삼국사》에 기록된 바 왕의 아우라고 나오는데,

이때에 계수는 싸워서 이기지 못하고 패했고, 남무왕은 친히 정기(精騎)를 거느리고 나가서

좌원에서 수많은 한의 군사를 죽이고, 산처럼 쌓일만큼의 수급을 거둔다.

물론 중국 기록에야 없겠지. 자기네들이 패한 기록이니까.

 

[八年, 夏四月, 乙卯, 熒惑守心. 五月, 壬辰晦, 日有食之.]

8년(186) 여름 4월 을묘에 형혹이 심성을 지켰다. 5월 그믐 임진에 일식이 있었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매번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천문현상들은 아무래도,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걸 미리 암시하는 복선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게다가 양도 너무 많다.

분명히 뭔가 있긴 있었는데 그걸 일부러 돌려서 말하려는 듯이.

 

[十二年, 秋九月, 京都雪六尺. 中畏大夫沛者於留·評者左可慮, 皆以王后親戚, 執國權柄, 其子弟幷恃勢驕侈, 掠人子女, 奪人田宅, 國人怨憤. 王聞之, 怒欲誅之, 左可慮等與四椽那謀叛.]

12년(190) 가을 9월에 서울에 눈이 여섯 자나 내렸다. 중외대부(中畏大夫) 패자(沛者) 어비류(於留),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가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나라의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그 자제들이 모두 세력을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였으며 남의 자녀와 전택을 빼앗았으므로, 국인(國人)이 원망하고 분하게 여겼다. 왕은 이것을 듣고 노하여 죽이려고 하니, 좌가려 등이 4연나와 더불어 반란을 꾀하였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어비류와 좌가려, 이 자들은 원래 딱히 능력도 없으면서 왕후 우씨의 친척이라는

연줄 하나로 '체면유지'조로 관직을 받아 행세하던 자들이었다. 중외대부라는 관직은

고국천왕조 기사에만 나올 뿐 중국 사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 고유의 관직이 아니라

중국적 관직명이거나 『천남생묘지명』에 나오는‘중리대형(中裏大兄)’의 오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나중에 열전이 기록되면서 혹 윤색된 기록이라고 보기도 한다.

 

중외대부 패자 벼슬의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 일족이 '국인'들의 미움을 샀다....

국인이라는 말이 이 무렵에는 나라의 정치를 맡은 귀척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의 싸움은 결국 귀척들 사이의 세력 다툼이라고 볼 수가 있겠다.

그런데 《삼국사》는 이들이 전횡을 일삼은 뒷배경, 빽이 왕비에게 있었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왕실의 외척이 권세를 믿고 전횡을 일삼는 것은,

곧 그 나라가 국왕을 중심으로 나라 체계가 잡혀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이 믿고 휘두르는 '권세'가 곧 왕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AD. 2세기의 고구려는 이미 중국의 그것과 다름없는 중앙집권체제가 구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왕실에 있어, 외척이라는 존재는 정말 껄끄러운 존재다.

우리 역사를 돌아봐도, 외척의 발호로 나라가 흔들리지 않은 적이 없다.

고구려뿐이겠나. 신라 말년에는 그야말로 진골 귀척들 전쟁에 나라가 사방팔방 찢어져버렸지.

고려 때에는 왕실과 사돈을 맺은 재상지종, 즉 문벌귀족과 권문세족들이

왕실의 외척으로서 전횡을 일삼으며 토지를 수탈하다 결국 이성계에게 멸망했고.

조선 태종이 괜히 자기 손에 그토록 많은 외척의 피를 묻혔겠는가.

자기 부인의 형제ㅡ즉 자신의 처남들을 모두 반역죄로 사약을 내려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자기 며느리(세종대왕의 왕비 소헌왕후)의 집안까지 거의 '박살'을 내다시피 했으니.

(그렇게 자기 손에 피를 묻히면서도, 자기 아들 손에만은 피를 묻히기 싫어했었지)

어쨌거나 이러한 태종의 외척 세력에 대한 '숙청'에 가까운 견제가,

훗날 세종의 태평성대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라 한다.

굳이 비유하자면, 아들이 갈 길에 방해가 될지 모를 무성한 잡초와 자갈들을

아버지가 나서서 직접 싸그리 청소해준 것과 같은 것이랄까.

 

[十三年, 夏四月, 左可慮等聚衆, 攻王都. 王徵畿內兵馬平之, 遂下令曰 "近者, 官以寵授, 位非德進, 毒流百姓, 動我王家, 此寡人不明所致也. 令汝四部, 各擧賢良在下者.” 於是, 四部共擧東部晏留, 王徵之, 委以國政. 晏留言於王曰 “微臣庸愚, 固不足以參大政. 西鴨谷左勿村乙巴素者, 琉璃王大臣乙素之孫也. 性質剛毅, 智慮淵深, 不見用於世, 力田自給. 大王若欲理國, 非此人則不可.”]

13년(191) 여름 4월에 좌가려 등이 무리를 모아 왕도를 공격하였다. 왕은 기내(畿內)의 군사를 동원하여 평정하고, 마침내 명령을 내렸다.

“요즘 들어서 총애받으면 관직을 주고 덕이 없어도 승진하니, 피해가 백성에게 미치고 우리 왕가를 뒤흔든다. 이는 과인이 현명치 못한 소치다. 이제 너희 4부는 각자 현량(賢良)으로서 아래에 있는 자를 천거하라.”

이에 따라 4부가 함께 동부(東部)의 안류(晏留)를 천거하자, 왕은 그를 불러 국정을 맡겼다. 안류가 왕에게 말하였다.

“미신(微臣)은 용렬하고 어리석어 본래 큰 정치에 참여하기에 부족합니다. 서압록곡(西鴨谷) 좌물촌(左勿村)의 을파소(乙巴素)란 사람은 유리왕 때의 대신 을소(乙素)의 후손입니다. 성질이 굳세고 지혜와 사려가 깊으나, 세상에서 쓰여지지 못하고 힘들여 농사지어 자급하고 있습니다. 태왕께서 만약 나라를 다스리려 하신다면, 이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사극 볼때마다, 혹은 고전 읽을 때마다 항상 하나씩 생각하는게.

"여기서 꼭 이렇게 말해야 하는 거냐."

하는 거다. 특히, 조금 재능있다 싶은 사람이 왕에게 불려가서 중책 맡아달라 소리 들으면,

항상 나오는 소리가

"저는 그만한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게 뭐니. 그러면 왜 와. 처음부터 오지를 말고 영 숨어서 살지.

뭐하러 사람들한테 소문나게 다 드러내고 사느냐구. 그러면서 벼슬 주면 또 안 받는 사람들.

나같은 소인배의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정말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다.

그렇게 하면 자기가 좀더 고결하고 깨끗하게 보일까봐 그러는걸까?

하긴 준다고 그걸 덥석 받는 사람들에 비하면 조금, 염치가 있어보이기는 한다만.

 

어비류와 좌가려 등이 일으킨 반란은, 왕의 손으로 직접 평정되고,

《삼국사》 열전에는 이 대목에서

"왕께서 (그 일당들을) 목베거나 혹은 귀양보냈다."라는 추가 설명을 붙여놨다.

연나부의 반란을 진압하기는 했다만, 남무왕은 생각한 것이 아닐까.

아무래도 한 부(部)에다 세력을 몰아주는 것은 조금 위험한 짓이라고.

한쪽으로 권력이 치우치게 되면 왕권의 약화는 물론이고,

그 비대화에 따른 부패까지 초래하게 될 것이다.

옆에서 제동을 걸어줄 세력이 없으니까.

계속 이 속도로 달리다가는 어디 부딪쳐서 전치 10주나 20주는 족히 넘고,

자칫하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부(部)라는 것을 초월해서, 오로지 왕을 위해서만 생각하고 움직여줄수 있는

새로운 권력의 핵심을 찾아놓는 것이 나쁘지는 않으리라.

마침내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왕은 결정을 내린다.

이제부터는 자기가 직접 사람을 뽑아보리라.

 

[王遣使, 以卑辭重禮聘之, 拜中畏大夫, 加爵爲于台, 謂曰 “承先業, 處臣民之上, 德薄才短 未濟於理. 先生藏用晦明, 窮處草澤者久矣. 今不我棄, 幡然而來, 非獨孤之喜幸, 社稷生民之福也. 請安承敎, 公其盡心.” 巴素意雖許國, 謂所受職不足以濟事, 乃對曰 “臣之駑蹇, 不敢當嚴命. 願大王選賢良, 授高官, 以成大業.” 王知其意, 乃除爲國相, 令知政事.] 

왕은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로써 모셔와서 중외대부로 임명하고, 작위를 더하여 우태로 삼고 말하였다.

“과인이[孤] 외람되이 선왕의 업을 이어받아 신민(臣民)의 위에 있으나, 덕이 부족하고 재주가 짧아 정치에 익숙하지 못하다. 선생은 능력을 감추고 지혜를 나타내지 않으면서, 궁색하게 시골에서 지낸지 오래. 이제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바꾸어 왔으니, 과인이 기쁘고 다행스러울 뿐 아니라, 사직과 백성이 복을 받은 것이다.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공은 마음을 다하기를 바란다.”

파소가 뜻은 비록 나라에 허락하였으나 받는 관직이 일을 다스리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대답하였다.

“신의 둔하고 느린 것으로는 엄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태왕께서는 어질고 착한 사람을 뽑아 '높은 관직'을 주어서 대업을 이루십시오.”

왕은 그 뜻을 알고 곧 국상으로 임명하고 정사를 맡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13년(191)

 

처음 태왕이 을파소에게 내린 중외대부나 우태의 작위라면 높은 관직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지위다. 그런데도 을파소 이 양반은 안 받고 내빼신다.

높은 관직에 특급 연봉 아니면 안 받으시겠다(기왕 스카웃받는 몸),

자기가 인재라 이거지.(캬!)

 

안타 한 3,4백타쯤 치고 발만 날렸다 하면 슛골인인 운동선수 섭외하는데

수십억 연봉을 줘도 안 가고 뻗디디는 것이 요즘 세상 이치.(과거라고 달랐겠나.)

을파소라는 이 자도, 그저 글만 읽고 애국심 강한 샌님만은 아니고,

나름의 '야심'이라는 것도 적당하게 갖고 있는 깍쟁이였다.

왕이 또, 사람이 통이 큰 사람이었는지(원래 통 큰 사람치고 뱃심 안 좋은 사람 적지)

그의 인품 속에 적절히 배합된 야심을 꿰뚫어보시고, 그에게 파격적인 벼슬을 내린다.

국상(國相)이라는,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자리를,

을파소라는 이 몰락 귀척에게 턱하니 내준 것이다.

 

[於是, 朝臣國戚, 謂素以新間舊, 疾之. 王有敎曰 “無貴賤, 苟不從國相者族之!”]

이리하여 조신(朝臣)과 국척(國戚)이 소(素)가 신진으로서 구신(舊臣)들을 이간한다며 미워하였다. 왕이 교하였다.

"귀천을 막론하고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멸족시키겠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13년(191)

 

세종대왕께서는 황희와 맹사성 같은 재상을 얻어서 나라의 중임을 맡겼고,

해동요순(海東堯舜)의 칭호를 받으며 이 나라 최고의 성군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고국천왕이 얻은 을파소는 왕에게 부여받은 이 국상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실권을 쥐고 있던 구(舊) 귀척들을 견제하는 작업을 수행하게 되었고,

그의 뒤에는 왕이 있었다.

 

[素退而告人曰 “不逢時則隱, 逢時則仕, 士之常也. 今上待我以厚意, 其可復念舊隱乎?” 乃以至誠奉國, 明政敎, 愼賞罰, 人民以安, 內外無事.]

소가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마땅한 도리이다. 금상께서 나를 후한 의로 대하시니, 이전 숨어지내던 것을 어찌 다시 생각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지성으로 나라를 받들고 정교(政敎)를 밝게 하고 상벌을 신중히 하니, 인민이 편안하고 안팎이 무사하였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13년(191)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도리다."

라는 말은 《논어》에 나오는 말인데, 을파소가 정치를 맡게 된 다음의 고구려에 대해서,

김부식 영감이 "인민이 편안하고 안팎이 무사하더라"라고 말한 것은,

비단 그가 뛰어난 재상이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삼국 초기의 '재상'은 《삼국사》가 인용한 《고기(古記)》에 모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백제의 상좌평(上佐平)과 신라의 상대등(上大等) 즉 상신(上臣), 그리고 고구려의 국상.

왕이 재상을 임명한다는 건 일종의 권력 몰아주기라고 할 수 있다.

 

[冬十月, 王謂晏留曰“若無子之一言, 孤不能得巴素以共理. 今庶績之凝, 子之功也.”乃拜爲大使者.]

겨울 10월에 왕은 안류에게 말하였다.

“만약 그대의 한마디 말이 없었다면 과인이 파소를 얻어 함께 다스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 많은 공적이 쌓인 것은 그대의 공이다.”

그리고는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13년(191)

 

을파소를 천거한 안류 역시 나름의 보상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신찬성씨록》에 나오는 가후치노미타미노오비토(河內民首)의 선조

안류왕(安劉王)가 바로 안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안(安)과 안(晏)은 글자가 비슷하고, 류(留)하고 유(劉)는 발음이 비슷하니

나중에 글로 옮겨적다가 실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ㅡ고 하는 생각.

 

[論曰, 古先哲王之於賢者也, 立之無方, 用之不惑. 若殷高宗之傅說, 蜀先主之孔明, 秦堅之王猛. 然後賢在位, 能在職, 政敎修明, 而國家可保. 今王決然獨斷, 拔巴素於海濱, 不撓衆口, 置之百官之上, 而又賞其擧者, 可謂得先王之法矣.]

논하노니, 옛날의 밝은 임금이 어진 사람을 대할 때는 등용하는 데에 걸릴 것이 없었고, 등용하면 의심하지 않았다. 은(殷)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대한 것이나, 촉(蜀) 선주(先主: 유비)가 공명(孔明)을 대한 것, 진(秦) 부견(堅)이 왕맹(王猛)을 대한 것이 그와 같다. 그런 다음에야 어진 사람이 자리에 앉고 능력있는 사람이 직분을 맡아 올바른 가르침이 밝게 닦여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왕이 결연히 홀로 결단하여 파소를 바닷가에서 뽑아 여러 사람의 입놀림에도 흔들리지 않고 모든 관료의 윗자리에 두었으며, 또 천거한 자에게도 상을 주었으니 선왕의 법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13년(191)

 

부식이 영감도 이렇게 극찬을 하고 있는 고국천왕의 처사.

역시 사람은 사람을 잘 알아볼줄 알아야 사람 소리를 듣는다니까.

더욱이 정치하는 사람이라면 말할것도 없는거지. 《명심보감》에서도 말하지 않는가.

"사람을 의심하거든 쓰지 말고, 일단 썼으면 의심하지 마라.(단 책임은 자기가 다 진다)"

성호 이익 선생이 《성호사설》에서 이르되,

 

한 고조는 진평(陳平)을 얻어 천하를 도모하면서 먼저 위무지(魏無知)에게 상을 주었는데, 이것이 4백년의 터전을 이룩한 조짐이었다. 공자께서,

“자신이 힘쓰는 것을 어질다 하겠느냐, 어진 사람 추천하는 것을 어질다 하겠느냐? 비록 관중(管仲)이나 자산(子産)같이 어질고 재주 있는 자로서도 만약 그 후계자를 추천하지 않았다면 끝내 국위를 떨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진 자를 추천하면 상등의 상을 받는다.”

하였으니, 한 초기에 인재를 얻은 것이 참으로 이 점에서 훌륭했다 하겠다.

 

고구려 고국천왕 때 4부(部)에 명하여 어진 인재로서 아래 있는 사람을 추천하라 하였다. 모두 동부에 사는 안류를 추천했는데 안류는 또 을파소를 추천하므로, 왕은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卑辭重禮]로 그를 맞아들인 결과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왕은 안류에게

“만약 자네의 말이 없었다면 내가 을파소와 함께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여러 업적이 이루어진 것은 자네의 공이다.”

하고 그를 대사자로 삼았으니, 왕 또한 다스리는 요령을 알았다 할 수 있다.

 

처음 을파소를 우태 벼슬에 등용했으나 파소는 그런 벼슬로는 정사를 해낼 수 없다는 의견에

“신은 명령을 감당할 수 없으니, 어진 자를 뽑아 높은 벼슬을 주어 큰 사업을 성취케 하소서.”

하였다. 왕도 그의 뜻이 보통이 아님을 알고 곧 국상으로 임명해 정사를 맡겼으니, 이게 바로

어진 자에게 맡기되 의심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후세에 와서도 혹 어진 이를 추천하여 뽑기는 하나 비미(卑微)한 관직에 앉혀 놓고는 재능이 없다고 하니, 이것이 천리마에게 쥐를 잡게 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고국천왕 같은 이는 지혜도 밝다 할 만하고, 과단성도 뛰어났다 할 만하다.

 

고국천왕의 목적이 정말 민생 안정에 있었는지 왕권강화에 있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이 일을 맡겨도 될만한 적격의 사람을 알아보고서,

그의 지위나 부(部)가 어디에 속하느냐를 따지지 않고 파격적인 대우를 한것이며

(사실 을파소의 선대가 유리왕의 조정에서 벼슬한 적이 있으니 신분이나 혈통상 하자는 없었다)

그를 추천한 사람에게도 포상을 한 것. 인재를 추천하고서 그 공로를 인정받는 것을 보게 된 이들이,

포상을 위해서든 뭘 위해서든, 앞다투어 자신이 '최고'라 여기는 사람을 소개할 것이고,

그렇게 추천되어 왕의 앞에 이름이 올려진 사람들이

모두 하나같이 완벽한 인재나 선비라고 100% 장담할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하나의 세력이 오래도록 권력을 잡고 독주하며 부패하는 것만은 막을수 있겠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사람이 늘어나고 또 다양한 생각들이 쌓여가니까. 앞날을 점칠수는 없지만.

 

[十六年, 秋七月, 墮霜殺穀, 民饑. 開倉賑給.]

16년(194)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쳐서 백성들이 굶주렸다.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난데없는 서리가 고구려 땅을 휩쓸었다.

곡식이 얼어죽는 바람에 백성들은 나라의 관곡을 얻어먹고 살아야 할 정도로 극빈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冬十月, 王于質陽, 路見坐而哭者, 問 “何以哭爲?”對曰“臣貧窮, 常以傭力養母, 今歲不登, 無所傭作. 不能得升斗之食, 是以哭耳.” 王曰“嗟乎! 孤爲民父母, 使民至於此極. 孤之罪也.” 給衣食以存撫之. 仍命內外所司, 博問鰥寡孤獨老病貧乏不能自存者, 救恤之, 命有司, 每年自春三月至秋七月, 出官穀, 以百姓家口多少, 賑貸有差, 至冬十月還納, 以爲恒式. 內外大悅.]

겨울 10월에 왕은 질양(質陽)으로 사냥나갔다가 길에서 앉아 우는 자를 보고 물었다.

왜 울고 있느냐?”

“저는 빈궁해서 항상 품팔이로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올해는 흉년이 들어 품팔이할 곳도 없습니다. 한 되, 한 말의 곡식도 얻지 못하여 울고 있습니다.”

“아! 과인이 백성의 어버이로서 백성을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했구나. 이건 과인의 죄다.”

그리고는 옷과 음식을 주어 안심시키고 위로하였다. 이에 서울과 지방의 담당 관청에 명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늙은이, 늙어 병들고 가난하여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들을 널리 찾아 구휼하게 하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에 이를 때까지, 관의 곡식을 내어 백성의 가구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등있게 진휼 대여하게 하고, 겨울 10월에 이르러 갚게 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게 했다. 서울과 지방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16년(194)

 

이름하야 진대법. 봄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의 추수기에 갚게 하는.

기록상 우리나라 최초의 춘대추납(春貸秋納)의 민생복지제도.

국사책이며 웬만한 국사시험에 질리도록 등장하는 이 진대법은,

훗날 고려의 흑창이나 조선의 환곡과 사창제도로 이어져 천년 동안

우리날 복지정책의 근간으로 자리잡게 된다.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계층적 대립을 완화시켜 전근대적 체제를 유지할수 있게 했다ㅡ

라고 하는 어려운 말은 차치하고서라도.

흉년에 백성들이 떠돌 필요는 없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한가지는, 진대법을 처음 제창한 을파소나 고국천왕도 몰랐을 것이다.

좋은 의미로 시작한 법이 흑창을 거쳐 환곡으로 넘어가면서,

온갖 부정과 부패, 비리의 온상으로서 소위 '삼정'의 문란을 초래하고,

그것이 조선조 말기의 사회혼란을 초래한 원인이 되고 말 것을.

 

[十九年, 中國大亂, 漢人避亂來投者甚多. 是漢獻帝建安二年也.]

19년(197)에 중국이 크게 어지러워 한인(漢人)들이 난리를 피해 투항해 오는 자가 매우 많았다. 이는 한 헌제 건안(建安) 2년이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이때 중국에서 일어났다는 난리라는 것은, 생각건대 황건적의 난이 아닐까 싶다.

저 유명한 나관중이라는 작자의 《삼국지통속연의》의 배경이 되는 후한 말기.

후한 영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세워 정권을 좌지우지하던 동탁과,

태평도를 창시한 장각을 중심으로 황천(黃天)의 시대를 외치며 각지에서 일어나는 황건적의 반란.

그리고 유비나 관우, 장비 같은 유명한 세 의형제와 조조라는 걸출한 영웅(!)

손권과 손견, 주유같은 전설적인 인물들이 활보하던 시대. 그 혼란시대를 고구려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을 터이다.

 

원호문(元好問)이 지은 왕황화묘비(王黃華墓碑)에 말하였다.

"공의 휘는 정균(庭筠)이고, 자는 자단(子端)이며, 성은 왕(王)씨다. 왕씨의 가첩(家牒)에32대조인 왕렬(王烈)은 태원(太原)의 기(祁) 사람으로 한(漢) 말의 난리를 피해 요동으로 옮겨 가서 살았다. 그 뒤에 요동에도 난리가 나자 자손들이 동이(東夷)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17대조 왕문림(王文林)은 고구려에서 벼슬해서 서부장(西部將)이 되었다가 나랏일을 위해 죽었다. 또 8대조의 이름은 왕낙덕(王樂德)으로 발해에서 살았는데, 효성이 지극하다고 소문이 났었다. 요(遼)의 태조(太祖)가 그의 아들을 동단왕(東丹王)으로 책봉했는데, 요양(遼陽)에 도읍하였다.』라고 실려 있다."

《해동역사》

 

《해동역사》에서 한치윤이 《유산집(遺山集)》이라는 중국문헌을 참조해서 기록한 것으로,

왕황화라는 사람의 선조가 고구려에서 벼슬을 했던 이야기를 적은 내용이다.

왕황화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정보를 못 찾았지만, 그 조상이 적어도 남무왕 시대의 사람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다. 태원의 '기'라는 땅 사람이었고 후한 말년의 대란, 황건적의 난을 피해

고구려로 도망쳐온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는 얘기.

어쩌면 우리나라에 왕씨가 있게 된 것은 저때부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고구려는 귀화인들에게 그닥 배타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들 자체가 부여에서부터 내려온 이주민 왕조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적으로 한창 대립하던 후한 왕조의 귀화인들에게도 벼슬을 주고 대우해주었다. 

처음 황건적의 난을 피해서 고구려에 귀화한 왕렬의 후손 왕문림이 고구려 서부(西部)에서

장군직을 맡아 살다가 나라를 위해서 순국했으며, 그 후손 왕낙덕은 또 발해에서 살다가

그 아들이 거란족의 요 왕조에서 또 벼슬을 했으니 귀화인으로서 집안을 이어온 것이 이렇고,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사신 중에도 왕효렴이라는 왕씨 성 가진 사람이 있었으니,

고구려에서 뿌리내린 귀화인들의 출세가 어느 정도까지 이어졌는지 알수 있을 뿐더러

고구려 사람들이 주변 이민족에 대해서 얼마나 개방적이었던가를 새삼 엿볼수 있다.

 

[夏五月, 王薨. 葬于故國川原, 號爲故國川王.]

여름 5월에 왕이 승하하였다. 고국천원(故國川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고국천왕이라고 하였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19년(197)

 

고국천왕의 재위기간과 죽어서 묻힌 장지의 이름, 왕의 묘호에 대해 《삼국사》에서는 19년,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20년간 다스렸다고 해서 1년의 차이가 있고,

죽어서 묻힌 곳의 이름 역시 《삼국사》는 고국천원(故國川原),

삼국유사》는 국양(國壤)이라고도 불리는 국천(國川)이라고 하여 조금씩 틀리기는 하지만

그의 시호, 즉 묘호가 그의 무덤 위치의 이름을 따서 '고국천왕(故國川王)'이라고

붙여졌다는 것만은 공통적으로 말하는 사실이다.

 

이 고국천이라는 지명은 앞으로 한번 더 다시 소개할 일이 있을테니.

고국천왕의 이야기는 일단 여기서 줄이기로 해야겠다.

이미 본격적인 고구려 역사의 본궤도로 접어들기는 했지만,

산상왕 때로 가면 좀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기대하셔도 좋을 것이다. 큭.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