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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22>제10대 산상왕(1)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22>제10대 산상왕(1)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1173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23>제10대 산상왕(2)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1174

[山上王, 諱延優<一名位宮>, 故國川王之弟也.] 

산상왕(山上王)은 이름이 연우(延優)<또는 위궁(位宮)이라고도 이름하였다.>이고 고국천왕의 아우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즉위전기

 

고국천왕의 아우 산상왕. 이분께서는 《삼국유사》 왕력에 이름이 안 나온다.

즉위 기록은 있는데 휘가 안 적혀 있다는 것이니 오해 없으시길.

위궁이란 사실 산상왕이 아닌 그 아들 동천왕인데 《삼국사》가 실수했다.

내력은 밑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기록 그대로, "고국천왕에게 아들이 없어

연우가 뒤를 이었다[故國川王無子, 故延優嗣立]."는데,

즉위과정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뭐 피 튀기는 싸움 뚫고 즉위했다는 말은 아니다.

 

[初故國川王之薨也. 王后于氏, 秘不發喪, 夜往王弟發歧宅, 曰 “王無後, 子宜嗣之.” 發歧不知王薨, 對曰 “天之曆數有所歸, 不可輕議. 婦人而夜行, 豈禮云乎?” 后慙, 便往延優之宅.]

이보다 앞서 고국천왕이 죽었을 때였다. 왕후 우씨는 발상(發喪)도 하지 않고 비밀에 부친 뒤, 밤에 왕제 발기(發)의 집에 가서 말했다.

“왕에게 후사가 없으니 당신이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합니다.”

발기는 왕이 죽은 것도 모르고 대답하였다.

“하늘의 운수[曆數]는 돌아가는 데가 있으니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 하물며 부인이 밤에 돌아다니는 것을 어찌 예(禮)라 할 수 있겠는가?”

왕후는 부끄러워하고 곧 우의 집으로 갔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즉위전기

 

정말 몰랐던 걸까, 미심쩍었던 걸까? 밤중의 제수의 방문을 받은 발기는,

왕이 죽은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을 찾아온 그녀를 결국 돌려보내고야 만다.

남편 있는 여자가 밤늦게 돌아다니는게 부끄럽지도 않냐고.

 

[優起衣冠, 迎門入座宴飮. 王后曰 “大王薨, 無子, 發歧作長當嗣, 而謂妾有異心, 暴慢無禮, 是以見叔.” 於是, 延優加禮, 親自操刀割肉, 誤傷其指. 后解裙帶, 裹其傷指. 將歸, 謂延優曰 “夜深恐有不虞, 子其送我至宮.” 延優從之, 王后執手入宮. 至翌日質明, 矯先王命, 令臣立延優爲王.]

우는 일어나서 의관을 갖추고, 문에서 맞이해 들여 앉히고 잔치를 베풀어 마셨다. 왕후가 말했다.

“대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발기가 큰동생으로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겠으나, 첩에게 딴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난폭하고 무례하므로 당신을 보러 온 것입니다.”

그러자 연우는 예의를 더하고 친히 칼을 잡고 고기를 베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다쳤다. 왕후가 치마끈을 풀어 다친 손가락을 싸주었다. 돌아가려 할때 연우에게 말했다.

“밤이 깊어서 예기치 못한 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그대가 나를 궁까지 전송해 주시오.”

연우는 그 말에 따르니 왕후가 손을 잡고 궁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에 선왕의 명이라 사칭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연우를 왕으로 세웠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즉위전기

 

연우는 무슨 생각으로 뜻밖에 집안에 들인다.

아랫사람한테 술상 봐오래서 같이 마주놓고 한잔 마시고.

 

그리고 이 밤중에 여길 다 오시고 궁에서 무슨 안 좋은일 있으셨냐 여쭤봤겠지 넌지시.

형수님 또 형님하고 한바탕 싸우셨습니까. 인생 뭐 그렇죠 뭐. 

부부싸움 원래 칼로 물베기 안 그럽니까.

아무리 남자가 성질 더러워도 여자 없으면 다 헛거거든요.

그냥 더러워서 참는다고 생각하시고, 봐준다 생각하시라구요.

여기서 그냥 한잔 쭉 하시고, 안 좋은 일 있던거 다 잊어버리십쇼.

아마 이랬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느닷없이 왕이 돌아가셨단다.

이게 무슨 온돌방에서 자다가 데서 깜짝 놀라 일어나는 소리냐.

왕한테 아들도 없는데 골로 가버렸다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그러니까 여기 온거 아니냐 내가. 발기 녀석한테 갔더니 그녀석 멍청해서

내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날 이리 쫓아보냈어. 

넌 이렇게 날 받아주니 얼마나 고맙니.

형수가 너한테 뭐 상이라도 줘야 될텐데..... 하다가.

뭐 그렇게 얘기가 되었다.

 

그런데 고기를 칼로 직접 썰어 주다니, 그게 무슨 소린지 참...

그 시대에 돈까스나 스테이크가 있었던 것도 아닐테고.

다친 손가락 싸매주면서 둘 사이에 feel이라도 오갔는지.

시동생보고 무서우니 데려다 달라면서 은근슬쩍 수작 부려

궁으로 데려가서, 그대로 왕 자리에 앉혀버린다.

산상왕은 그렇게 즉위했다.

 

[發聞之大怒, 以兵圍王宮, 呼曰 “兄死弟及禮也. 汝越次簒奪大罪也. 宜速出. 不然則誅及妻孥.” 延優閉門三日. 國人又無從發者. 發知難, 以妻子奔遼東, 見太守公孫度, 告曰 “某高句麗王男武之母弟也. 男武死無子, 某之弟延優與嫂于氏謀卽位, 以廢天倫之義. 是用憤恚, 來投上國. 伏願, 假兵三萬, 令擊之, 得以平亂.” 公孫度從之.]

발기가 듣고 크게 노하여 군사를 동원해 왕궁을 둘러싸고 소리쳐 말했다.

“형이 죽으면 아우가 잇는 것이 예다. 너는 순서를 뛰어넘어 찬탈했으니 큰 죄다. 당장 나와라. 안 그랬다간 네 처자식까지 잡아 죽이겠다.”

연우는 사흘간 문을 잠그고 있었다. 국인(國人)도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발기는 어려움을 알고 처자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도망쳐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뵙고 고하였다.

“나는 고구려왕 남무의 친아우요.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었는데, 나의 아우 연우가 형수 우씨와 왕위에 오를 것을 공모하여 천륜의 의를 그르쳤소. 이 때문에 분하여 상국에 투항해 왔습니다. 엎드려 청합니다. 병사 3만을 빌려 주시어, 그들을 쳐서 난을 평정케 하소서.”

공손도가 그 말에 따랐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원년(197)

 

여기서부터, 《삼국사》의 연대 표기와 실제 기록에 어긋나는 점이 시작한다.

왕제 발기가 요동태수 공손도의 군사를 빌렸다는 이야기는 고국천왕 사후의 일로,

고국천왕 원년(179)이 아니라 산상왕 원년(197)의 일로 18년이나 뒤의 일이다.

 

[漢獻帝建安初, 拔奇怨爲兄而不得立, 與消奴加, 各將下戶三萬餘口, 詣公孫康降, 還住沸流水上.]

한(漢) 헌제(獻帝) 건안(建安) 초에 발기가 형으로서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消奴加)와 함께 각각 하호(下戶)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公孫康)에게 가서 항복하고, 돌아와 비류수 가에 머물렀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고국천왕 원년(179)

 

단재에 따르면 공손강은 공손도의 아들인데, 공손도가 요동태수가 된 것은

후한 헌제 초평 원년(190년)이자 고국천왕 12년으로 고국천왕 원년에는 공손강은커녕

공손도도 아직 요동태수가 되지 못했다. 《삼국사》는 우리 나라 《고기》를 인용하면서

또 중국의 문헌도 잔뜩 퍼다왔는데,

발기라는 이 왕자가 고국천왕의 형이었는지,

아니면 산상왕의 형이자 고국천왕의 아우였는지는 《삼국지》의 진수가 착각해서

남무와 이이모가 동일인물인 것처럼 적어놨지만 실은 다른 인물로,

연우가 바로 이이모란 것이 단재의 설명이다.

 

부식이 영감이 중국 기록을 보고 연대표기를 엉터리로 잡아놓은 모양이다.

인과관계는 일단 일치하지만, 시간대를 너무 끌어 올려버린 것.

고국천왕즉위전기에서 "백고가 죽자, 국인(國人)은 맏아들 발기(拔奇)가

불초하였으므로 함께 이이모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伯固薨, 國人以長子拔奇不肖,

共立伊夷謨爲王]"고 한 것에서 백고와 이이모 사이에 남무(고국천왕)가

마치 이이모(산상왕)과 동일인물인 것처럼 합쳐져 기록되어 있다.

 

계보를 정리하면 발기가 남무의 형인데 두 번이나 즉위를 놓친 것이 아니라,

남무가 맏형이고 발기가 그 다음이며, 연우와 계수는 그 다음이다. 맏형 고국천왕에게

후사가 없다면 당연히 고국천왕의 손아래 아우인 발기가 뒤를 잇는 것이 당연하다.

인데 계승서열 1위인 발기를 제치고 2위인 연우가 즉위한 것은 발기 입장에서는

'찬탈'로 비쳐질 수 있겠다(사실 굴러들어온 복을 차버린 건 본인 실수였지만)

뒤늦게야 달려와보니 Game set. 이미 왕궁은 아우 연우의 손에 넘어간 상태.

형의 독기어린 눈과 창칼로 무장한 사병들이 왕궁을 에워싼 와중에도,

연우는 왕궁에서 사흘 동안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고 있었다.

 

발기라는 녀석이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지지받을 턱이 없지.

양녕대군과는 달리 숫제 자기가 못나서 동생한테 왕 자리 두 번이나 뺏긴 주제에,

그걸 되찾는답시고 하필 또 남의 나라 군대를 끌어들일 생각을 하다니.

누구 말처럼 미운 시누이 하나 잡자고 집안에 호랑이 불러들이는 꼴도 아니고.

단재 선생께서 보셨으면 정말 경을 치고 목소리 높여 욕하셨을 노릇이다.

 

[延優遣弟罽須, 將兵禦之, 漢兵大敗.]

연우는 동생 계수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니, 한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원년(197)

 
그래놓고, 이기지도 못하고 또 졌다. 상대는 자신의 또다른 동생이자, 왕의 아우이기도 한 계수.

 

[罽須自爲先鋒追北, 發告罽須曰 “汝今忍害老兄乎?” 罽須不能無情於兄弟, 不敢害之. 曰 “延優不以國讓, 雖非義也. 爾以一時之憤, 欲滅宗國. 是何意耶? 身沒之後, 何面目以見先人乎?” 發聞之, 不勝慙悔, 奔至裴川, 自刎死. 罽須哀哭, 收其屍, 草葬訖而還.]

계수는 스스로 선봉이 되어 패잔병을 추격하니, 발기가 계수에게 말하였다.

“네가 지금 차마 늙은 형을 해치려 하느냐?”

계수는 형제에 대해 무정하게 대할 수 없었다. 감히 해치지는 못하고 말했다.

“연우가 나라를 양보하지 않은 것은 의(義)가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께선 한때의 분노만으로 조종(祖宗)의 나라[宗國]를 멸하려 하셨습니다. 이건 무슨 뜻입니까? 돌아가신 뒤에 무슨 낯으로 조상[先人]을 뵈려 하십니까?”

발기가 그 말을 듣고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배천(裴川)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계수는 슬퍼 통곡하며 그 시체를 거두어 짚으로 가매장하고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원년(197)

 

부조리극같은 것을 보더라도, 아무리 불합리한 전개가 계속되는 와중에도,

꼭 한명씩은 '정상적인' 사람이 이렇게 있다. 아주 드문 일이긴 해도 꼭.

뭔가 되게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와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볼때마다,

사람들은 어쩐지 찡해지는 기분을 느낀다. 왕을 몰아내려던 발기의 시신을 거두어

짚으로 덮어주는 장면에서, 난 그릇되고 부당한 부왕의 법령을 당당히 거부한

안티고네의 모습을 보았다.(너무 비약인가. 이러면)

  

어차피 발기는 어디로 가든 목숨 부지하기는 힘들 것이었다.

(고구려 형법에 반역자는 제가회의를 통해 즉결처분으로 처형당했음)

지금 여기서 스스로 죽든 압송되어 왕 앞에서 죽든 죽기는 매일반이라지만,

조상의 나라를 치려고 한 그는 이제 조상의 땅에 묻힐수도 없다.

백성들 모두 그를 두고, 나라 말아먹으려 든 반역자라 손가락질하고,

저승에서는 선대왕들의 영령들에게도 욕먹고 내쫓길텐데,

육신은 언젠가 썩어 문드러져 이 흙 속에 섞인다고 해도,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못할 그 영혼은 대체 어디로 가서 머무를까.

 

반역자의 운명이란 다 그런 것. 살아서는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된 삶을 영유하기 힘들고, 죽어서도 안식을 얻지 못한다.

이미 죽어 시체가 묻힌 무덤을,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이러겠지.

저게 누구누구의 무덤이야. 나쁜 놈이 묻힌 곳이지. 더러운 놈.

오가면서 욕하고, 비석에 침 뱉고 소변을 보며, 토악질을 하고,

봉분을 발로 차고, 위에 올라가 장난치고 논다. 그 후손들도,

평생 반역자의 후손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가야만 한다.

아들, 손자, 증손자, 고손자, 현손자, 그리고 계속해서 쭈욱.

 

그러한 반역자의 낙인은 지워져서도 안되는 것이지만 지워질수도 없다.

그런 반역자의 길을 어쩔수 없이 걸은 것도 아니고 스스로 걸으면서도,

자신은 단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 그때 할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간 것 뿐이라고 변명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자기 자신의 오만에 불과할 뿐이다.

 

후손들까지, 자신이 뒤집어쓸 더러운 이름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결코, 그같은 선택을 하지 않는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의 후손이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욕먹고 평생 죄인 자식이라는 소리 듣고

살기 바라는 사람 아무도 없을 테니. 그냥 발기라는 사람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떠오른 잡생각이다.

 

[王悲喜. 引罽須內中宴, 見以家人之禮, 且曰 “發請兵異國, 以侵國家, 罪莫大焉. 今子克之, 縱而不殺足矣, 及其自死, 哭甚哀, 反謂寡人無道乎?” 罽須愀然銜淚而對曰 “臣今請一言而死.” 王曰 “何也?” 罽須曰 “王后雖以先王遺命立大王, 大王不以禮讓之, 曾無兄弟友恭之義. 臣欲成大王之美, 故收屍殯之. 豈圖緣此逢大王之怒乎? 大王若以仁忘惡, 以兄喪禮葬之, 孰謂大王不義乎? 臣旣以言之, 雖死猶生. 請出受誅有司.” 王聞其言, 前席而坐, 溫顔慰諭曰 “寡人不肖, 不能無惑. 今聞子之言, 誠知過矣. 願子無責.” 王子拜之, 王亦拜之, 盡歡而罷.]

왕은 슬프고도 기뻤다. 계수를 궁중으로 끌어들여 잔치를 베풀어 가인(家人)의 예로 대접하고 또 말하였다.

“발기가 다른 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우리 나라[國家]를 침범하여 죄가 막대하다. 지금 그대가 그에게 이기고도 놓아주고 죽이지 않은 것은 족한 일이나, 그가 스스로 죽자 심히 슬프게 통곡한 것은 거꾸로 과인이 무도하다고 하는 것이냐?”

계수가 슬픈 얼굴로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였다.

“신이 지금 한마디 아뢰고 죽기를 청합니다.”

“무엇이냐?”

계수가 대답하였다.

“왕후께서 비록 선왕의 유명으로 태왕을 세우셨더라도, 태왕께서 예로써 사양하지 않으신 것은 일찍이 형제의 우애와 공경의 의(義)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태왕의 미덕을 이루어드리고자, 시신을 거두어 안치해둔 것입니다. 어찌 이 일로 태왕의 노여움을 당할 것을 헤아렸겠습니까? 태왕께서 만약 인자함으로써 악을 잊고, 형의 상사(喪事)에 맞는 예로써 장사지내더라도, 누가 태왕을 의롭지 않다 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다 아뢰었으니, 죽더라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관부[有司]에 나아가 죽임을 당하겠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앞으로 나아가 앉으면서, 따뜻한 얼굴로 위로하며 말하였다.

“과인이 불초하여 의혹이 없지 않았다. 지금 그대의 말을 들으니 참으로 잘못을 알겠구나. 그대는 자책하지 마라.”

왕자(계수)가 절하니 왕도 역시 절하였으며, 즐거움을 마음껏하고 파하였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원년(197)

 

계수는 발기나 연우보다도 더 왕의 자질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발기의 반란을 직접 진압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연우 편을 들지도 않는다.

아무리 선왕의 명이라고 해도 당신이 왕위를 사양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고.

(이건 "그러는 너는 얼마나 왕의 자격이 있느냐"하고 물어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형님께서 거절하지 않으신 이유를 계수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그저 형에 대한 우애와 공경이 없었기 때문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의 형을 그렇게, 우애가 없는 사람이라고 보이게 할수 없기에,

형님이나 국인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의심하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반역자로 죽은 형 발기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준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제 형님께서도 그만, 그분을 용서하시라고.

나라를 망친 역적으로서가 아니라, 피를 나눈 형제로서, 그분 마지막 가시는 길을 보내달라고.

계수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따져보면 발기도, 연우도 모두 이 나라의 왕자이고

자신의 소중한 형님이니까.)그만큼 계수의 생각은 올바르고, 의롭다.

하지만 조선 유학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깐깐한 보수꼴통유학자 안정복 영감이 이 대목에서 비판한 글에 보면,

 

천하사(天下事)는 의로움(義)과 이로움(利)의 양단에 불과한데, 의로움으로 행동한다면 실패하더라도 영광되고, 이로움을 위해 행동한다면 성공하더라도 욕되니, 이는 대개 한때의 득실은 가벼우나, 만세의 시비가 무겁기 때문이다. 더구나 의로움을 행하면 따르는 무리를 얻고, 의로움을 등지면 친한 이가 없어지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발기는 음탕한 왕후가 이(利)로서 꾀었을 때에 능히 의로써 억제하였으니 족히 칭찬할 만하나, 연우가 왕지(王旨)를 핑계삼았을 적에 만약 능히 의로써 성토해서 그 간음(奸淫)하고 교무(矯誣)한 죄를 폭로하고 추호도 왕위를 다투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 의로운 명성은 족히 사람들을 감동시켰을 것인데, 이제 그가 성토한 말은 ‘차서를 넘어 찬탈했다.’는 데에 지나지 않으니, 이는 이미 분하여 다투는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에 나라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게 당연하다. 계수로서는 연우가 왕이 될 때에 홀연히 멀리 떠나서 그 몸을 스스로 깨끗하게 갖는 것이 옳았고, 만일 부득이하다면 또한 군사를 돌이켜 그의 죄를 성토하고 발기를 옹립하여 나라 사람들을 안정시키는 것이 옳았다. 그가 종국(宗國)을 호위한다는 일은 간악함을 조장하는 데에 지나지 않았으니 애석하다!

 

결국 뭐,

"발기나 연우나 계수나 다 똑같은 것들이야!"

라는 거지 뭐. 이 꼴통 영감의 말에 따르면.

(의로움도 좋긴 하지만, 때때로는 이로움도 추구해야 되는 겁니다. 영감님.)

뭐 안정복 영감이야 그랬지만, 난 고구려 조정에서 그나마 깨끗한 성품에

멀쩡한 식견을 가진 인간은 계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연우나 발기보다도, 그가 더 왕이 되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엔 그렇다.

 

[秋九月, 命有司, 奉迎發歧之喪, 以王禮葬於裴嶺.]

가을 9월에 담당 관청[有司]에 명하여 발기의 관을 받들어 모셔오게 하여, 왕의 예로써 배령(裴嶺)에 장사지냈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원년(197)

 

계수의 충언을 받아들인 왕은, 드디어 즉위년 가을 9월.

배천에 가매장된 형 발기의 시신을 모셔와서 왕의 예로 배령에 장사지냈다.

(그 대신 수도 국내성으로 들어오는 것만은 금지되었다)

그토록 왕이 되지 못해 안달하며 살더니, 죽어서야 왕의 예우로 대접을 받았다.

자신이 죽이려 했던 동생으로부터.

 

한의 군대를 끌어들이면서까지 한번이라도 해보고 싶었던 왕이었건만,

그것이 참 부질없고 허망한 짓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역시 나 혼자뿐인가.

죽어서나마 왕의 이름을 얻었다고는 해도, 그 자신이 얻은 반역자라는 이름은,

높고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왕의 무덤보다도 족히 천년은 더 오래 지속될 악(惡)인데.

"선은 아무리 많이 모아도 모자라고, 악은 아무리 적게 모아도 오히려 남는다."

내가 보기엔 발기의 인생에 대한 평가로서 가장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싶다.

 

발기가 죽은 뒤에도 그의 아들, 후손은 고구려에서 귀척 대우를 받았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의 증언에 따르면 발기는 요동으로 가면서 아들을 고구려에 남겨두었는데,

진수가 《삼국지》를 편찬하던 당시에는 고구려에서 고추가(古雛加)라는 작위를 받아

지내고 있었고 이름은 교위거(驕位居)였다고 한다.

 

[王本因于氏得位, 不復更娶, 立于氏爲后.]

왕은 본래 우씨 때문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다시 장가들지 않고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원년(197) 가을 9월

 

'다시 장가들다[更娶]'라는 말로 봐선 아무래도 발기가 왕궁을 포위하고 농성할 때

연우의 처자식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갈갈이 날뛰더니.

다시 혼인을 해야 하는데 뭐, 형수랑 재혼했다고?

이건 또 웬 소설에서나 나올 얘기다냐?

조선조 최보라는 사람이 《동국통감》에서 우씨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를 해놨다.

 

지금 우씨는 음(陰)으로서 양(陽)에 앞서고 지어미로서 지아비를 탄 것이며, 한 몸으로 두 번이나 국모가 되었으니, 완악하고 음탕하며 수치를 모르기로는 고금 천하에 이 한 명뿐이다. 연우가 왕후로 책봉할 때에, 충성스런 신하나 의로운 선비가 한 명이라도 있어서, 그 불가함을 역설하여 이를 제지하였다면, 명정언순(名正言順)하여 작으나마 대의(大義)를 펼 수 있었을 것인데,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하였다.

 

유교적인 시각에 본다면야 이분들 유학자들의 말이 충분히 일리가 있겠으되,

이분들은 도무지 한가지 중요한 점을 배제하고 계시다.

 

여긴 조선이 아니라 고구려다.

 

고구려는 남녀관계에 대한 개념이 그렇게 닫혀있지가 않단 말이다.

남자하고 여자가 같은 강물에서 목욕하고, 서로 모였다 하면

어울려 먹고 마시고 춤추고 하는데 그런 자리에서 괜히 예법 따지다

미친놈 소리 들을 일 있나. 더욱이 흉노와 같은 문화권에 들어

북방계 문화를 공유하는 우리가, 유교가 아직 사회적으로 정착되지 못했던

그 시대에 무슨 삼종지도니, 열녀열부니 하는게 존재하고 있었겠는가.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말은, 100% 유교적인 잣대만으로

고구려의 역사를 재려는 것 자체가, 애시당초 멍청한 소리라는 얘기다.

일연이라는 땡중은 우리 역사를 불교의 시각에서 보는 바람에,

환인을 제석천이라고 부르는 엄청난 망발을 일삼았지만,

이들 조선 유학자들은 유교적 잣대로 고구려 역사를 보는 바람에,

우리나라 고대 위인들을 아주 그냥 근본도 모르는 개망나니쯤으로 바꿔놨다.

 

그리고 아무리 그렇게 개방되어 보이는 사회라고 해도,

그런 사회에서도 자기네들 나름의 지키는 룰이 다 있는게다.

무슨 개족보처럼 이리저리 꼬이고 꼬여서 완전 잡탕으로 어그러진 것이 아니다.

아무리 황당하고 비상식적인 것으로 보여도 엄연한 왕실의 법도이고,

우리 나라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왕실의 법도라는 것은 이상해보여도

나름의 다 이유가 있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하지 못해도 저들에게는

그렇게 안할 수가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안 그러면 나라 유지되기 힘들지 말이다.

(여성부 폐지반대를 주창하고 다니는 페미니스트들은 아마도 우씨를 가리켜, 

소서노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사에서 다시 보기드문 여장부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그런 말도 안되는것 같아 보이는 일이 우리 역사에서 벌어졌었다.

이른바 형사취수(兄死取嫂). 형이 죽어 형수를 동생이 취했다는 것으로,

오늘날 엄격한 촌수와 가족윤리를 따지는 유교국가로 변모한 우리나라에서는

정말이지 이해받지 못할 일이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형수하고 시동생하고 사랑에 빠진다는 줄거리의 영화가 있었지.

아니, 형부하고 처제였던가?

불과 3백년 전에 조선 유학자들이 저 일에 대해 엄청난 독설을 퍼부었던 것에 비하면,

요즘은 시대가 많이 변한 거지 뭐.(원래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다)

어쩌면 그때보다도 더 솔직하게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시대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루하고 딱딱한 

유교윤리의 지배를 받던 조선조가 아닌, 사람의 진솔한 감정과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말할수 있었던 고려 때의 그것으로.

다만 그것이 미국이라는 더러운 돈놀이꾼 소굴에 의해서

굉장히 퇴폐적이고 비한국적인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 유감이긴 하지만.

아무튼 뭐, 그렇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가는데까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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