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12105

왕의 영정 들고 뛴 남자의 기막힌 인생역전
[참모열전 18회: 이이첨 1부] 연산군과 함께 몰락한 가문, 그 속에서 피어난 인물
14.07.13 21:39 l 최종 업데이트 14.07.13 21:52 l 김종성(qqqkim2000)

▲  <광해 왕이 된 남자> 포스터. ⓒ 리얼라이즈 픽처스

개혁파 정권인 광해군 정권은 여타의 개혁파 정권과 비교할 때 색다른 면모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정권 핵심부가 비주류의 집합소라는 사실이다. 

정권 제1인자인 광해군은 서자 출신이었다. 2인자인 김개시(김개똥·김가희)는 여성이며 공노비 출신이며 궁녀였다. 3인자인 이이첨(1560~1623년)도 그랬다. 이이첨 역시 많은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 정권은 '콤플렉스 집합소'였다. 

혹자는 "김개시가 아니라 이이첨이 광해군 정권 2인자가 아니었나?"라고 질문할 수도 있다. 인조 1년 9월 14일자(양력 1623년 10월 7일자) <인조실록>에는 '이이첨이 김개시에게 빌붙었다'라든가 '이이첨이 김개시와의 협의를 거쳐 인사권을 행사했다'는 식의 표현들이 나온다. 이런 점을 근거로 김개시가 2인자, 이이첨이 3인자라고 말한 것이다. 

이이첨의 콤플렉스는 조상 때 생긴 것이었다. 이 가문이 잘나가던 연산군 때가 그 시작이다. 이이첨의 5대조인 이극돈은 연산군 정권의 거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훈구파라 불린 보수세력의 거물이었다. 그는 개혁파 소장 그룹인 사림파를 탄압했다. 그가 일으킨 정치 탄압을 '무오사화'라 부른다. 선비들에게 화를 입힌 무오년 사건이라는 뜻이다. 

신진세력을 탄압할 정도로 막강한 가문이었지만, 연산군 정권이 1506년에 쿠데타로 붕괴하면서 이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극돈 이후로는 과거시험 급제자도 나오지 않았다. 1567년에 선조의 등극과 함께 사림파가 집권하면서부터 이 집안은 한층 더 암울해졌다. 약간의 과장을 섞어 비유하자면, 고려시대 최충헌 가문은 4대 60년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였던 데 반해, 이극돈 이후 이 가문은 4대 60년간 기는 새도 못 잡을 정도였다. 

사림파를 탄압한 이극돈의 후손이니, 1567년 이후의 사림파 세상에서 살기 힘든 것은 당연했다. 사림파 정권 탄생 7년 전인 1560년에 출생한 이이첨은 그래서 극도의 가난에 허덕여야 했다. 어찌나 가난했던지, 벽의 흙을 갉아 먹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개천에 용 난다는 말이 있다. 주변 사람들은 이이첨을 보고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이첨은 총명하고 유능했다. 또 의지도 대단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거시험에 도전했다. 도전은 결실을 맺었다. 23세 때인 1582년에 그는 과거시험 소과(小科)에 급제했다. 

소과는 생원시와 진사시로 구성된다. 생원시는 경전 이해능력이 우수한 사람에게 생원이라는 타이틀을 주는 시험이고, 진사시는 시 쓰는 능력이 우수한 사람에게 진사라는 타이틀을 주는 시험이었다. 둘 중 하나만 붙으면, 다음 단계인 대과(大科)에 응시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이첨은 1582년 한 해에 생원시와 진사시를 모두 통과했다. 집안환경을 고려하면 이것은 경이적인 일이었다.  

이 정도 실력이었으면 몇 년 내에 대과에도 급제했을 것 같은데, 그는 오래도록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극돈의 후손이라는 점이 족쇄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대과 급제자는 단번에 중간 간부직에서 출발할 수도 있지만, 소과 급제자는 말단직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소과 급제자의 승진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때문에 소과 급제자는 하급 관직을 받기보다는 어떻게든 대과에 급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이첨은 자기 처지로는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서였는지 아니면 먹고 사는 게 급해서였는지 종9품 말단직인 광릉참봉직을 받아들인다. 광릉참봉은 세조(수양대군)의 무덤인 광릉을 관리하는 공무원이다. 이때는 1582년 이후의 어느 시점이다. 

도요토미의 임진왜란, 이이첨의 인생을 바꾸다

▲  광릉참봉 임명장. 영조 38년 6월 24일(양력 1762년 8월 13일)에 강명달을 광릉참봉에 임명한다는 영조 임금의 교지. ⓒ 김종성

이이첨이 광릉참봉이 된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제7대 주상인 세조는 당시 조선 왕실의 정통성의 근원이었다. 조(祖)라는 묘호 즉 사당 명칭을 받는 임금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임금들이었다. 당시를 기준으로 할 때, 그때까지 '조'라는 묘호를 받은 임금은 태조 이성계와 세조뿐이었다. 세조 이후로 그때까지는 누구도 '조'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A라는 임금이 '조'를 받은 뒤 B·C·D 세 임금이 연달이 종(宗)이라는 묘호를 받고 그 다음에 E라는 임금이 '조'를 받으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A·B·C·D의 정통성과 E의 정통성이 각각 별개라고 생각했다. A·B·C·D는 하나의 정통성으로 이어지고, E 이후로 새로운 정통성이 시작된다고 이해한 것이다. 물론 모든 조선 임금은 이성계로부터 시작하는 공통적인 정통성을 가졌지만, 그들은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또 다른 정통성을 저마다 겸비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모든 대한민국 대통령은 본인이 인정하든 않든 간에 이승만으로부터 이어지는 공통적인 정통성을 계승한다. 동시에, 그들은 4월 혁명에서 나온 또 다른 정통성, 5·16 쿠데타나 12·12 쿠데타에서 나온 또 다른 정통성, 6월 항쟁에서 나온 또 다른 정통성을 겸비한 사람들로 세분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조선시대 상황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처럼 '조'는 새로운 정통성의 시작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세조 이후의 역대 왕들이 모두 '종'을 받았으므로, 이이첨이 광릉참봉이 될 당시에는 세조가 조선 왕실의 정통성의 근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이첨의 입장에서는, 그처럼 대단한 왕의 묘소를 관리한다는 게 별로 신나지 않았을 것이다. 훗날의 행동패턴을 보면, 그는 정치현장에서 몸을 불태우는 게 적성에 맞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오랫동안 무덤을 지키고 살았으니, 그 심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광릉참봉 생활은 이이첨 본인은 물론이고 가문에게도 역전의 계기가 되었다. 광릉참봉 생활을 계기로 이이첨이 중앙정계에 전격적으로 진출했기 때문이다. 이이첨에게 그런 기회를 만들어준 이는 바다 건너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이이첨이 서른세 살 때인 1592년에 도요토미가 일으킨 임진왜란이 이이첨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  광릉은 조선 7대 대왕인 세조(재위 1455∼1468)와 부인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무덤이다. ⓒ 연합뉴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빛의 속도로 북상하자, 선조 임금은 도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상당수의 신하들도 임금을 버리고 자기 살 길만 도모했다. 세상이 온통 자기 한 몸 지키기도 바쁜 이때, 이이첨은 세상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이이첨은 위험을 무릅쓰고 세조의 영정을 챙겼다. 당시 관점에서 볼 때 조선 왕실 정통성의 근원이 되는 영정을 챙긴 것이다. 선조 임금도 챙기지 못한 세조의 영정을 하급 관리가 챙긴 것이다. 

이이첨이 영정을 사수하는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선조 26년 3월 16일자(1593년 4월 17일자)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이첨은 전쟁이 발발한 뒤에도 피난을 포기하고 의병들을 모아 광릉을 지켰다. 일본군이 광릉과 그 주변에 불을 지르자, 그는 불길 속에서 영정을 들고 뛰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일본군과 두 차례나 만났다. 이런 극적인 과정을 거쳐 세조의 영정을 사수한 그는 피난 중인 선조를 찾아 북상했다. 

피난 중에 찾아온 말단 관리가 세조의 영정을 바치자, 선조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 이 전쟁에서 태조와 세조를 제외한 나머지 왕들의 영정은 모두 피해를 입었다. 살아남은 두 개 중에서 하나를 이이첨이 건져낸 것이다. 태조의 영정을 건져낸 홍여율은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이첨은 사실상 자기 혼자 힘으로 공로를 세웠다. 그래서 이이첨은 이 일을 계기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선조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이이첨, '내일의 태양' 광해군과 인연을 맺다


▲  드라마 <서궁>의 선조(김성옥 분). ⓒ KBS

이때부터 이이첨의 앞길은 탄탄대로가 되었다. 전쟁 중에 출세하는 지름길은 군인이 되는 것이지만, 이이첨은 군인이 아닌데도 출세길을 달렸다. 그가 건져낸 세조 영정은 일본군 대군을 격파한 것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었다. 

선조가 좋게 봐줘서 그런지, 이이첨은 이듬해인 1594년에 열린 과거시험 대과에서 급제했다. 전쟁 중인데다가 선조의 총애까지 얻었으니, 이극돈의 후손이라는 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이이첨은 전쟁이 사실상 끝난 뒤에 기막힌 인연을 하나 더 쌓게 된다. 선조 30년 12월 17일(1598년 1월 23일)이었다. 지금의 국방부 과장인 병조좌랑(정6품) 자리에 있던 이이첨은 이 날 세자시강원 사서(정6품)로 발령받는다. 

세자시강원 사서는 세자의 학습을 돕는 자리다. 세자가 나이가 많은 경우에는 세자의 학습을 돕기보다는 세자를 보필하는 자리다. 이이첨이 보필하게 된 세자는 사실상의 임금이 되어 임진왜란을 총지휘한 광해군이었다. 이이첨이 '내일의 태양'과 인연을 맺는 순간이었다. 

이미 그 전부터 서로 상대방의 존재는 알고 있었겠지만, 이로써 이이첨과 광해군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 만남은 훗날 두 사람은 물론 조선 전체를 정치적 격랑 속에 던져 넣게 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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