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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룡

식성군 이운룡 비석

이운룡(李雲龍) 1562~1610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경현(景見), 호는 동계(東溪)
이순신이 가장 아꼈던 군관.

1562년 경상북도 청도에서 남해현령 몽상의 아들로 태어났다.1585년 선조 18년 무과에 올라 1587년 선전관에 임명되었고 녹둔도전투이후 이순신과 백의종군 하게 된다[1][2], 훗날 복직하여 1589년 옥포만호로 부임하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포기하고 도망가려던 원균에게 "나라의 중책을 맡은 장관으로서 강토를 사수할 것이며, 더욱이 이지역은 남방의 주요 방어선으로서 최대의 관문입니다. 전라수군과 힘을 합쳐 왜적을 쳐부수어야지 도망은 직분과 국가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라고 항언하였다.[3]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선봉장으로 앞서서 적선 50여척을 격침시키는데 일조하였고 이후 사천, 진해, 한산도 대첩[4],안골포,부산해전등에 참가하였다.

1596년엔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좌수사로 승진하게 되지만 이듬해 칠천량 해전 당시 좌천되어 육지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유지,장수들이 수장되는 가운데 살아남아 영천, 창암등지의 육전에 참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605년 내직으로는 비변사당상관을 지내고 외직으로 제7대 수군통제사 자리에 오른다.[5]

이후 선무공신으로 식성군에 해졌고 사후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타협을 하지 않는 강인한자세와 곧은 성품이 이순신과 닮아 탄핵을 여러번 당한다[6]

저서로는 병영일기인 <거영일기>와 <식성군 실기> 2권이 있다.


주석

[1] 당시 북병사 이일은 니탕개의 난을 소탕한 이순신을 탐탁치않게 생각하였고 이에 녹둔도 전투이후 이순신과 그의 부하들을 모함, 패장의 책임을 물어 서울로 압송을 보낸다. 이억기의 만류로 백의종군의 선에서 마치지만.
 
[2] 이일이 니탕개의 난을 소탕한 이순신을 탐탁치 않게 여긴 이유는 자기가 저지른 죄가 들통날까봐였다. 이순신이 니탕개의 난을 소탕할 당시 이일은 도망갔다. 이순신을 모함한 수법 역시 이를 거꾸로 해서 장계를 올린 것이다. 즉 실제로 싸운 이순신이 도망가고 실제로 도망간 자신이 싸웠다고 날조.
 
[3] 원균이 겁먹을 만한것이 바로 옆동네의 경상좌수사 박홍은 적에게 뺏길것을 염려하여 무기와 배를 수장시키고 부하들을 데리고 내륙지방으로 이동하였고, 경상우수영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져 벌어져서 우후(수사 바로 아래 직급)가 자체 판단하여 무기와 배를 버리고 원균에게 가 수군마저 해체하며 가까운 성으로 달려가 그곳에 합류하라고 말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되엇기 때문. 뒤늦게 이 상황을 알게 된 경상우수사 원균은 자포자기했으나 ,이운룡은 그를 설득하고 경상도앞바다를 포기하면 안된다는 그의 계략에 따라 율포만호 이영남을 전라좌수영으로 보내 이순신을 설득, 출전시킨다.
 
[4] 통영에 가본사람은 알겠지만 거제도로 들어가는 입구인 견내량은 판옥선이 드나들기엔 어려운 편. 한산섬 앞바다까지 유인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는데 이 유인작전을 세우고 수행하기엔 전라좌수영의 수군들이 물길도 상황도 알기 어려웠던것. 이운룡은 이 유인계를 직접 이순신에게 제출하고, 거제도에 있는 옥포만호였던 그가 물길을 잘 알기에 유인작전에 투입되어 적을 유인할 배에 탑승한다.결과는 아시다시피 유인작전에 걸려든 왜군들이 한산섬앞에 펼쳐진 '학익진'에 참패 한산도 대첩으로 일본군의 서진을 저지한다.
 
[5] 여담으로 이순신은 이운룡을 두고 나를 이을 자는 오직 이운룡이다.라고 언급을 한 적이 있다.
 
[6] 1602년 모친상으로 진을 비워 탄핵 받은적도 있고 비변사 유사당상에 올랏으나 탄핵으로 은퇴한적도 있다.그러다 1607년 오랑캐의 침입으로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이를 진압하고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되었으나 1610년 또다시 탄핵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건뭐...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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