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t1.daumcdn.net/cfile/blog/1117604F4EA39B0109 (문서파일), http://bit.ly/1kpMk9v
* "가리포진:
전라 우수영" 글에서 "5. 가리포진 명장 배출" 중 "1) 백전노장, 그림자 장군 정걸(丁傑)"만 퍼왔습니다.

백전노장, 그림자 장군 정걸(丁傑)

정걸(丁傑, 1514년 12월 2일 ~ 1597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영중, 호는 송정, 본관은 영광이다. 

임진왜란 최고의 영웅은 전투 중에 순직한 이순신이다. 그의 충직한 참모는 좌(左) 정운, 우(右) 송희립 등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많은 공적을 육전과 수전에서 발휘한 장수가 있다.

육전과 수전을 통 털어 양 전쟁사에서 육전에 권율, 수전에 이순신 다음으로 육, 수전 정걸을 들 수 있다.

정걸이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없다.
 
정걸에 관한 실록 기록
 
1. 명종 10년(1555) 5월 16일)
 
전라도 관찰사 김주가 달량포에 왜선 70여 척이 침략해왔다고 치계하다
전라도 관찰사 김주(金澍)가 치계(馳啓)하기를 ‘5월 11일에 왜선(倭船) 70여 척이 달량(達梁) (포구 이름) 밖에 와서 정박했다가 이진포(梨津浦)와 달량포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육지로 상륙하여 성저(城底)의 민가를 불태워 버리고 드디어 성을 포위했다.’ 하였다.

2. 명종 18권, 10년(1555 을묘 / 명 가정(嘉靖) 34년) 5월 18일
전라도 도순찰사 이준경이 배사(拜辭)하고, 이어 아뢰기를,
“그전에는 변방의 환란이 있을 적에 진장(鎭將)이 살해된 적은 있었지만 주장(主將)이 죽은 일은 없었습니다. 신이 나주(羅州)로 먼저 가서 군마(軍馬)를 점검하고 싶지마는 혹시 늦어질까 염려됩니다. 군관(軍官) 김세명(金世鳴)과 정걸(丁傑) 두 사람을, 숙배(肅拜)를 생략하고 먼저 내려보내 깊은 지역의 각 고을들로 하여금 미리 군마를 정돈하여 대기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정걸(丁傑 1514-1597) 장군. 그는 팔순에 가까운 나이에 해상에선 이순신을 도왔고 육지에선 권율을 도와 왜군을 물리친 최고의 전술전략가 이면서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꼭 필요한 전투에선 반드시 앞장서서 승전을 거둬내면서도 명예나 이익을 탐내지 않았다. 그림자 장군으로 불리는 정걸은 긴급 출동한 달량진 전투에서 공훈을 세우고 두 번의 가리포진 첨사를 거치면서 수군장수로서의 이력을 키워간다. 
 
이는 1555년 5월에 달량진(달도)에 왜구 선박 70여척이 나타나 해남지역으로 진출하여 약탈한 사건이다. 임진전쟁 37년 전이다. 

조정에서는 5월 16일 보고를 받고 18일 정걸을 추천하여 가리포진으로 내려 보낸다. 실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때 정걸은 가리포진 25대 첨사 명령을 받고 급히 내려와 왜구를 물리친다. 정걸은 가리포 첨사를 25대. 36대 두 번 역임한 장군이다.

전남 고흥군 포두면 출생으로 1544년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봉사를 거쳐 선전관을 지냈다. 1553년 서북면 병마만호로 있던 시절 현 완도, 달도에 왜구가 침탈하여 많은 인명피해와 약탈을 당하고 있었다. 조정에서 대비책을 논의한다.

조정에서는 정걸을 추천하여 달량성으로 내려 보내면서 사태가 급박한 사항이라 임금에 배향의 절차도 생략하고 바로 내려가 왜구를 섬멸토록 명령한다. 정걸은 달량성(달도)에 내려와 왜구를 섬멸한다. 

역사는 이것을 『을묘왜변』이라 한다. 정걸은 이때 가리포진 첨사로 내려와 왜구와의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정걸은 1555년 가리포진 첨사에서 1556년 부안 현감으로 자리를 옮기고 1561년 온성 도호부사가 된다. 1568년 종성 부사로 있으면서 여진족 정벌과 국경 수비에도 공을 세운다.

을묘왜변을 수습한 공로가 인정되어 1572년 장군의 나이 58세 경상우수사 거쳐 1577년 전라좌수사, 1578년 경상우수사, 1581년 절충장군, 1583년 전라도병마절도사, 1584년 창원 부사, 1587년 전라우수사 등을 두루 지냈다. 경상우수사를 두 번 거치고 전라 좌, 우수사를 역임한 조선 수군의 핵심인물이였다.

1591년 장군 나이 77세에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있을 때이다.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판단이 선다. 이순신이 권유한다. 그리고 스스로 결정한다. 전선에 투입되어 이순신을 도울 것을 결정하고 전라좌수영 조방장으로 이때부터 이순신과 같이 행동한다.

충신은 관직이 필요 없다. 오직 나라는 구함이 장군께서 가지고 있던 신념이다. 조선의 전 해역에 수사를 하신분이 이순신의 조방장을 맡아 77세 현역으로 종사하신 것은 정걸장군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나이가 들어 늙은 몸을 유지하기도 어려운데 전쟁터에서 그것도 선상에서 종사 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순신의 지시에 의해 조선 수군의 전력선인 판옥선을 개조 건조하고 화전과 철령전 등 여러 무기도 만들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가 정걸장군의 나이 78세이고 이순신은 47살이다. 이순신보다 31세의 노옹(老翁)이면서 수군 전쟁의 전략가이다. 특히 옥포해전과 한산도대첩, 부산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해전이 소강상태에 들면서 1593년 2월 충청수사로 명령을 받는다. 이때는 행주대첩의 큰 전투가 있던 때이다.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한산도에 버티고 있기 때문에 충청도 해안에서는 왜군의 군선을 한 척도 꼴을 볼 수 없다.

장군은 군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한다. 군졸들에 명령하여 화살을 제작 비축하였다.

권율이 한양 입성을 위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때 장군은 지원 병력으로 한강을 거슬러 한양으로 들어간다. 권율의 병력은 화살이 떨어진다. 이때 정결장군이 도착하여 화살을 공급하여 주었던 것이 권율장군이 한양을 탈환하는 결정적 개기가 되었다.

여기서 또 한 번 “그림자 장군” 이라는 명칭이 조선에 알려 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권율장군이 행주대첩의 결과로 한양을 탈환하였다는 역사적 기록은 있지만 “정걸장군이 화살을 공급하여 이겼다” 라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사록이나 문집에는 정걸장군이 화살을 공급하여 한양 탈환전투에 승리하는 개기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1594년 전라도 방어사로 임명을 받고 근무하던 정걸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의 개인적인 요청에 의해 한산도로 모셔와 한산도 방어의 자문을 하였다. 이순신의 요청으로 한산도에서 왜군을 방어하였다. 

마지막 관직이 전라도 방어사이다. 1595년 사직하고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여름 83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임진전쟁의 승리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정걸 장군은 사후 포두면의 안동사에 배향되었다. “명장은 늙지 않는다. 단지사라질 뿐이다.” 정걸 장군을 두고 하는 말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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