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001_0060

고조선의 8조 범금

樂浪朝鮮民犯禁八條, ……(中略)……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中略)……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漢書』卷28下, 「地理志」8下 燕郡

낙랑 조선민의 범금 8조는, 남을 죽이면 즉시 죽음으로 갚고, 남을 상해하면 곡식으로 배상하며, 남의 물건을 훔친 자가 남자이면 그 집의 노(奴)로 삼으며 여자이면 비(婢)로 삼는데, 자신의 죄를 용서받으려는 자는 1인에 50만(전)이었다. 그러나 비록 죄를 사면받아 민(民)이 된다 할지라도 풍속에서는 오히려 이를 꺼려 결혼하려고 할 때 짝하려는 자가 없었다. 이 때문에 그 민들은 끝내 도둑질하지 않아 집의 문을 닫아 놓지 않았다.
『한서』권28하, 「지리지」8하 연군

해설

『한서(漢書)』 「지리지』에서는 낙랑군(樂浪郡)과 관련한 고조선의 문화와 풍속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 일부로 8조 범금(犯禁)이 전하고 있다. 이 사료 앞에 “은(殷)나라의 도가 쇠퇴하자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에게 예의(禮義)·전잠(田蠶)·직작(織作)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두고 8조 범금을 기자의 가르침이라 보기도 하지만 두 사료가 직접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이른바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실체가 의심될 뿐 아니라 위의 사료는 낙랑군 설치 이후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두 기사가 이어져 있는 것은 고조선 지역의 법과 풍속이 기자로부터 유래되었다는 한대(漢代)의 인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고조선에 8조 범금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 사료에는 3개의 조항만 전하고 있어 그 전부를 알 수는 없으나, 이는 고조선 후기의 사회경제를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고조선의 8조 범금에서 가장 큰 관심을 모은 것은 노비의 존재로서, 이를 통해 고조선이 고대 노예제 사회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노비가 존재하였다고 하여 바로 노예제 사회라고 이해할 수는 없다. 노예제 사회란 노예가 사회 생산력의 중심이어야 하지만, 이 사료를 통해서는 이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비의 존재는 사회 분화의 일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철기 수용 이후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변화였다고 이해된다.

살인죄와 상해죄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두 조항은 생명 존중의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러한 조항이 만들어진 현실적인 이유는 농업 사회의 발전으로 노동력이 중시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절도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조항은 사유 재산의 보호를 의미하거니와, 사유 재산은 생산력의 발달과 그로 인한 사회 분화의 결과였다고 이해된다. 한편 절도죄의 사면을 위해 50만 전을 배상한다는 조목은 고조선 사회의 화폐 유통을 생각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고조선의 독자적인 화폐 생산과 유통을 알려 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한(漢)나라의 명도전(明刀錢)과 같은 화폐를 수용해 사용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흔히 고조선의 8조 범금은 부여의 4조 법률과 비교한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살인죄·절도죄 조항이 유사하며, 함무라비법전(Code of Hammurabi)처럼 동해보복형의 원리가 적용된다는 점이 공통된다. 두 나라 모두 고대 사회의 단순하고 엄격한 법률적 특징이 확인되는 것이다. 고대인은 이러한 법률을 사회 질서 유지의 최소 규범으로 보고, 그 준수 여부를 선악으로 이해하였다고 한다. 고조선 사회 역시 그러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금전 배상으로 면죄를 받더라도 결혼을 꺼릴 만큼 천시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따라서 선악의 판별이 우선시되었고, 범죄의 경중은 세분해 보지 않았으므로 법률이 엄격하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법률의 위반은 신(神)의 뜻을 거역한 행위로 여겨졌고, 종교적 의례에 따라 신판(神判)으로 처벌되었다고 짐작된다.


참고문헌

송호정,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푸른역사, 2003.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이종욱, 『고조선사연구』, 일조각, 1993.
전해종, 『동이전의 문헌적 연구』, 일조각, 1980.
조법종, 『고조선·고구려사 연구』, 신서원, 2006.
천관우, 『고조선사·삼한사연구』, 일조각, 1989.
노태돈 편저, 『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 2000.
이기백 외, 『한국사 시민강좌』2, 일조각, 1989.
이형구 편저, 『단군과 고조선』, 살림터, 1999.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ko_020_0220_0030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