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001_0010

단군 이야기와 고조선 건국 

魏書云, 乃往二千載有壇君王倹立都阿斯逹【經云無葉山, 亦云白岳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髙同時.

古記云, 昔有桓因1)【謂帝釋也】庻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即太伯, 今妙香山】, 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願化爲人. 時神遺霊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㛰之, 孕生子號曰壇君王倹. 以唐髙即位五十年庚寅【唐堯即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亰】,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逹,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旀逹,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即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亰, 後還隠於阿斯逹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歳.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真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三國遺事』卷1, 「紀異」1 古朝鮮 王儉朝鮮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있어 아사달(阿斯達)【『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고도 하고, 또한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니 백주(白州) 땅에 있다. 혹은 개성의 동쪽에 있다고 하니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 이것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불렀으니 중국의 요(堯) 임금(삼황오제(三皇五帝) 중 하나로 임금 이름은 고(高))과 같은 때이다”라고 하였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桓因)【제석(帝釋)을 이른다】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천하(天下)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탐하여 구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白)을 내려다보니 인간(人間)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여,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도록 하였다. 환웅은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정상【즉, 태백(太伯)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다】의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왔으니, 이곳을 일러 신시(神市)라 하고 그를 일러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하였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을 맡아 관장하고,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면서 세상에 머물며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령스러운 환웅에게 변하여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때 신(환웅)이 영험한 쑥 한줌과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형체를 얻을 수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받아먹고 금기한 지 21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금기하지 못해서 사람의 몸이 되지 못하였다. 여자가 된 곰[熊女]은 같이 혼인할 사람이 없었는데 매번 단수(檀樹)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였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단군왕검은 중국의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庚寅)년【요임금이 즉위한 원년은 무진(戊辰)년인즉, 50년은 정사(丁巳)년이지 경인년은 아니다. 경인년이라고 한 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에 평양성(平壤城)【지금의 서경(西京)】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또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逹)로 옮겼는데, 그곳을 또는 궁(弓)【방(方)으로도 쓴다】홀산(忽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불렀는데, 이곳에서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호왕(虎王, 무왕(武王)을 가리킴)이 즉위한 기묘(己卯)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긴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라고 하였다.

당(唐)나라의 「배구전(裵矩傳)」에 이르기를, “고려(高麗)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지금의 해주(海州)】으로 주(周)나라가 기자를 봉해 조선이라고 하였다. 한(漢)나라 때 나누어 3군(郡)을 두었으니, 현도(玄菟)·낙랑(樂浪)·대방(帶方)【북대방(北帶方)】이라 이른다”라고 하였다. 『통전(通典)』에는 또한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한서(漢書)』에는 곧 진번[眞]·임둔[臨]·낙랑[樂]·현도[玄]의 4군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3군이라 하고 이름 또한 같지 않으니 어찌된 것인가?】.

『삼국유사』권1, 「기이」1 고조선 왕검조선


해설

이 사료는 고려 후기의 승려인 일연(一然, 1206~1289)이 1281년(고려 충렬왕 7년)에 편찬한 『삼국유사(三國遺事)』 중에서 단군조선(檀君朝鮮)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다. 고조선의 건국 신화인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외에도 1287년(고려 충렬왕 13년)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 권람(權擥, 1416~1465)이 지은 『응제시주(應制詩註)』,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에 실려 있다. 그 가운데 일연의 『삼국유사』가 다른 기록에 비해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내용을 수록한 것으로 여겨 단군과 고조선을 연구하는 데 일급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사료에도 나와 있듯이 일연은 『위서(魏書)』와 『고기(古記)』 등을 자료로 하여 단군 신화를 서술하였다.

그런데 북제(北齊)의 천보(天保) 연간(550~559)에 위수(魏收, ?~?)가 편찬한 『위서』에는 이 사료와 관련한 내용이 실려 있지 않기 때문에, 이마니시 류[今西龍]를 비롯한 일본 학자들은 단군 신화가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위서』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그 중에는 현전(現傳)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 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고기』도 현전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나, 『세종실록지리지』의 평양(平壤)조에 보이는 『단군고기(檀君古記)』와 동일한 책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연은 단군 신화를 저술하면서 우리나라 측의 기록으로 짐작되는 『고기』보다 중국 측의 기록으로 짐작되는 『위서』를 먼저 인용하였다. 여기에는 고조선의 역사적 사실을 전체적으로 이해시켜 주고자 하는 목적이 담겨 있다. 이러한 의도 아래 저술된 단군 신화 속에는 다양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우선 환인(桓因)은 제석(帝釋)을 이른다고 하는데, 제석은 하느님을 뜻하는 불교식 용어이다. 따라서 환인의 손자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은 하느님의 후손인 동시에, 나아가 하늘에 있는 태양신(太陽神)의 손자라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단군의 부계가 하늘과 관련되어 있는 것과 달리 모계는 웅녀(熊女)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고조선은 곰을 토템(totem)으로 숭상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은 결국 단군왕검의 비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가 위엄과 권력을 지닌 정치적 지배자였음을 의미한다.

단군왕검의 아버지인 환웅(桓雄)은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과 생명, 형벌 등을 관장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사회가 농경과 관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유 재산의 형성이나 계급의 분화도 어느 정도 이루어졌음을 알려 준다. 또한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의 신단수(神檀樹)로 내려왔다는 것은 외래 집단의 이주 또는 정착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환웅으로 대표되는 이들과 달리 곰과 호랑이로 상징되는 집단은 환웅의 무리가 이주해 오기 전부터 그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이처럼 이주 집단과 토착 집단을 각각 대표하는 환웅과 웅녀가 혼인을 하고 그 사이에서 단군왕검이 태어났다는 점은 그가 두 집단을 아우르는 대표성을 지녔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고조선이 이주 집단과 토착 집단의 결합 속에서 건국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서』와 『고기』에 의하면 조선의 지배자를 단군왕검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학계에서는 ‘단군’은 무당 내지 하늘을 뜻하는 몽골어인 ‘텡그리(tengri)’와 서로 통하며 ‘왕검(王儉)’은 정치적 군왕(君王)을 뜻하는 ‘임금’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단군왕검은 제사장과 군왕을 겸하고 있었으며, 그가 지배하던 고조선은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다고 본다.

한편 『고기』에는 단군왕검이 평양성에 도읍하였다가 이후 아사달(阿斯逹)로 옮겼다고 하는데, 고조선의 중심지 문제는 고조선의 영역 문제와 결부되어 많은 논란이 있는 부분이다. 당초에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라는 점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채호(申采浩)에 의해 고조선의 중심이 지금의 랴오허 강[遼河] 유역의 랴오닝[遼寧] 일대라는 설이 제기된 이래,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식 토기의 분포 범위 등이 근거로 제시되면서 이 주장 역시 무시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처음에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랴오닝 일대였지만 이후 평양으로 옮겨 갔다고 하는 절충적인 설이 지지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 외에도 이 사료의 곳곳에서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중국의 전설상에 등장하는 요(堯) 임금과 같은 때라고 한 구절이 눈에 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문화가 중국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았으며 중국과 동등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일연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단군의 나이가 1908세였다는 비정상적인 내용이 실리게 된 배경 역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렇듯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이 사료를 통해 고조선의 건국 과정과 주체 세력의 성격은 물론이고,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파악이 가능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사료에는 일연이 단군 신화를 저술한 목적도 담겨 있다. 그러므로 『삼국유사』의 고조선조는 단군과 고조선의 역사를 비롯해, 그것이 후대에 어떻게 인식되고 계승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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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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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토리 쿠라키치 외 지음·신종원 외 옮김, 『일본인들의 단군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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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sy_001_0020_0020_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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