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jC0b1e

비왕 장

위만조선의 관직과, 그 관직에 있던 인물의 이름
생몰년 : 미상

비왕(裨王)은 위만조선의 관직으로, 왕의 측근이 임명된 부왕(副王)이나 국왕에 시종하는 무관직으로 생각된다. 장(長)은 비왕의 관직에 있던 인물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전문정보

비왕(裨王)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한서(漢書)』 조선전을 인용하여 조선과 한 사이의 갈등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위만조선의 관직명이다. 비왕(裨王)에 대해서는 왕의 측근이 임명된 부왕(副王)으로 보는 주장이 있었고(리지린, 1963), 직명으로서 특히 국왕에 시종하는 무관직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이병도, 1976)

기원전 109년 조선과 한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자, 한은 섭하(涉何)를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조선왕의 입조(入朝)를 강요하는 외교적인 압력을 가하였는데, 조선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섭하가 돌아오면서 국경에 이르러 그를 호송해주던 조선의 “비왕장(裨王長)”을 찔러 죽이고 요동으로 도망쳐 돌아간 뒤, 한의 조정에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니, 한의 무제가 그를 요동 동부도위로 임명하였다. “비왕장”에 대하여 『한서(漢書)』 주(注)에서 안사고(顔師古)는 “장(長)”을 비왕의 이름으로 보았다. 한편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는 “비왕내장사장(裨王乃將士長)”이라 하여 비왕을 장졸의 우두머리로 풀이하였으니, 곧 “비왕장”의 “장”은 지위를 나타내는 말로서, “비왕”과 “비왕장”은 같은 뜻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사기』 흉노전에서도 비왕이 나오므로, “장”은 비왕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대하여 만약 장(長)이 비왕(裨王)의 이름이었다면, 섭하가 천자에게 조선(朝鮮)의 비왕(裨王) 또는 장(長)을 죽였다고 보고했어야 옳을 것인데, 섭하는 조선(朝鮮)의 장(將)을 죽였다고 보고했으니, 비왕(裨王)과 장(長)을 나누어 보아야 하며, 장(長)을 조선(朝鮮)의 장(將)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국사편찬위원회, 1987)

『사기』 흉노전에 의하면, 당시 흉노에서는 선우(單于) 아래에 좌우현왕(左右賢王) 등 24명의 왕(王)과 장(將)이 있어 각지에서 분지(分地)를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 또한, 흉노의 선우에 복속되었지만 세력이 큰 집단은 그 장이 왕이라 칭하였고, 휘하에 “비왕(裨王)”이나 “상(相)” 등을 두었다. “비왕(裨王)”의 “비(裨)”는 “보(補)” 또는 “소(小)”의 뜻을 지녔으니, “비소왕(裨小王)”과 “비왕(裨王)”은 같은 실체이다. 비왕은 그 휘하에 자신의 집단을 거느리고 있는 존재로 볼 수 있으니, 흉노 우현왕의 휘하에는 적어도 10인 이상의 “비소왕”이 있었고, 이들을 한 무제의 조서에서 “흉노왕”이라 하였음을 볼 때, 비왕은 우현왕의 분봉지 내에서 거주하고 있던 자치체의 장과 같은 성격의 존재로 여겨진다. 조선의 경우도 왕의 통제 하에서 “상(相)”과 같은 수장들이 자치체를 영위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비왕은 “상”의 일정한 통제를 받으면서 자신이 속한 읍락을 자치적으로 이끌어 나가던 존재로 생각된다. 비왕은 전시에는 휘하 읍락 출신의 이들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실제 당시 한인들은 비왕을 비장(裨將)의 의미로 쓰기도 했으니,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도 “비왕은 소왕이고 비장과 같다고 여겨진다.(裨王 小王也 若裨將然)”고 하였다.(노태돈, 2000)
 
참고문헌
 
리지린, 1963, 『고조선 연구』, 과학원출판사.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국사편찬위원회, 1987, 『中國正史朝鮮傳 譯註 1』.
노태돈, 2000, 「衛滿朝鮮의 정치구조」『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위만조선)
 
魏滿朝鮮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 <嘗>略得眞番朝鮮[師古曰 戰國時 (燕)<國>始略得此地也] 爲置吏築障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 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 燕人魏滿亡命 聚黨千餘人 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儉[李曰 地名 臣<瓚>曰 王儉城 在樂浪郡浿水之東] 以兵滅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師古曰 孫名右渠]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 雍閼不通[師古曰 辰謂辰韓也] 元封二年 漢使涉何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 臨浿水 使<馳>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師古曰 送何者名也] 卽渡水 <馳>入塞 遂歸報 天子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襲功殺何 天子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 左將軍荀彘 出遼討右渠 右渠發兵距嶮 樓船將軍將齊七千人 先到王儉 右渠城守 規知樓船軍小 卽出擊樓船 樓船敗走 僕失衆遁山中獲免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 因兵威往諭右渠 右渠請降 遣太子獻馬 人衆萬餘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 宜<毋>持兵 太子亦疑使者詐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報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迺前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堅守 數月未能下 天子以久不能決 使故濟南太守公孫遂往正之 有便宜將以從事 遂至 縛樓舡將軍 幷其軍 與左將軍 急擊朝鮮 朝鮮相路人 相韓陶 尼谿相參 將軍王唊[師古曰 尼谿 地名 四人也] 相與謀欲降 王不肯之 陶, 唊, 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使人殺王右渠來降 王儉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左將軍使右渠子長 路人子最 告諭其民 謀殺成己 故遂定朝鮮 爲眞番 臨屯 樂浪 玄菟 四郡
 
위만조선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르기를, “처음 연(燕)나라 때로부터 일찍이 진번(眞蕃)·조선(朝鮮)을 침략해서 얻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 때에 연(燕)이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 관리를 두어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하였다. 한(漢)이 일어났을 때에는 멀리 있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여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를 삼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했다],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에 들어가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魏滿)은 망명하였는데, 무리 1천여 인을 모아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빈 땅에 있던 위 아래의 장새에 살았다. 점차 진번(眞蕃)·조선(朝鮮)의 만이(蠻夷)와 옛 연(燕)과 제(齊)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이(李)는 지명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왕검성(王儉城)이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하였다. 병사의 위력으로 그 변방 소읍을 침략하여 복속시켰고,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니 사방이 수천 리였다.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손자의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진번(眞番), 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막아서 통하지 못하였다[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진(辰)은 진한(辰韓)을 이른다고 했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에 한나라는 섭하(涉何)로 하여금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지만, 끝내 천자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섭하가 가서 경계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르자 마부를 시켜 자신을 호송하는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섭하(涉何)를 호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이게 하였다. 곧 패수를 건너 요새로 달려 들어가 마침내 보고하였다. 천자가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遼東)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습격하여 섭하를 살해하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 제(齊)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가게 하였는데, 병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을 나와서 우거(右渠)를 치니, 우거가 병사를 내어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막았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이 제(齊)의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儉)에 이르렀다.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속으로 도망하여 사로잡힘을 면했다. 좌장군(左將軍)은 조선의 패수(浿水) 서쪽 군대를 습격하였는데, 깨뜨리지 못하였다. 천자는 두 장군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병(兵)의 위력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다. 우거는 항복을 청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무리 만여 인이 무기를 쥐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와 좌장군은 무슨 변고가 있을까하여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무장을 풀라고 하였다. 태자 역시 사자가 속일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이끌고 돌아갔다. 천자에게 보고하니 천자가 위산을 목 베었다. 좌장군(左將軍)이 패수(浿水)의 상군(上軍)을 깨뜨리고 곧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웨워싸고 누선도 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견고하게 지켜서 여러 달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천자는 (전쟁이) 오래 결말을 보지 못하자, 옛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치게 하되, 편의를 따라 처사(處事)하게 하였다. 공손도가 와서 누선장군을 잡아가두고 그 군사를 합쳐,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상로인(朝鮮相路人), 상한도(相韓陶), 니계상참(尼谿相參), 장군왕협(將軍王唊)[안사고가 이르길, 니계(尼谿)는 지명(地名)이고, 네 사람이라 하였다]이 서로 모의하고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도(陶)와 협()과 노인(路人)은 모두 도망가 한 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기원전 112) 여름에 니계상참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으나 왕검성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 배반하였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의 백성들을 타일러 성기를 모살하게 하였으므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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