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26769523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25>제11대 동천왕(2) - 광인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24>제11대 동천왕(1)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1212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25>제11대 동천왕(2)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1213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 대해 이율곡은 '창업'ㆍ'수성'ㆍ'경장'의 세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른바 사회경장론.(윤리 시간에 배웠다.) 영토를 얻는다는 것도 이와 같다. 적어도 전쟁이 곧 역사였던 고대 사회에 국한해서 본다면 말이다. 전쟁을 일으켜 영토를 빼앗는 것이 곧 '창업'이다. 오랫동안 그 땅을 지배해온 옛 것을 '쓸어버리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 땅을 다시 찾으려고 달려드는 것들로부터, 얻은 것을 지키는 것은 '수성'이다. 이룬 것을 '지키는' 것이니까. 그렇게 수성이 모두 끝나면, 마지막으로 '경장'의 시대. 그 이룬 것을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바로, 예전 자신이 얻기 전과는 다른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는 과정. 다들 이 중에서 마지막 '경장' 단계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경장'보다는 '수성'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경장'이 '수성'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좀더 힘들겠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수성'을 잘 견뎌내지 못하면 얻은 것조차 지키지 못하고, 심지어는 자신마저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毋丘儉, 將萬人, 出玄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20년(246) 가을 8월에 위가 유주자사(幽州刺史) 무구검(毋丘儉)을 보내 1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에서 침범해왔다. 왕은 보기(步騎)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 가에서 맞아 싸워서 이기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또 군사를 이끌고 다시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서 또 이기고, 3천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고구려가 서안평을 빼앗은 것을 보복하기 위한 위의 침공. 그리고 그것을 막아내는 고구려의 과정들은, 나라를 세우기 위한 '수성'의 과정이었다. 실로 고구려의 역사는 그런 '창업'과 '수성'의 과정들이 번복되는 치열한 싸움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毋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原.]

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위의 대병이 우리의 소병만 못하다. 무구검이란 놈은 위의 명장이지만 오늘 목숨이 내 손아귀에 있도다.”

그리고는 철기(鐵騎)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검은 방진(方陣)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웠다. 아군이 궤멸되었다. 죽은 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왕은 1천여 기(騎)를 데리고 압록원(鴨原)으로 달아났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0년(246)

 

고구려를 공격한 유주자사의 이름은 관구검이 아니라 무구검이라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일본 학자가 주장한 것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2297405

 

단재 선생이 《삼국사》기록의 오류를 제시한 것 중에, 고구려군과 위군의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비류수에서 위군 3천 명을 목베고, 양맥곡에서 또 위의 군사 3천여 명의 위병이 이미 6천여를 목베었다고 했으니, 처음 왔던 1만 명 가운데 이미 6천여 명이 전사해서다시 군대를 이룰 수 없었을 텐데도 왕이 철기 5천으로 추격하다 크게 패했다고 적은 점을 지적한 바가 있다. 무구검열전에도 논공행상(論功行賞)을 받은 사람이 100여 명 남짓이었다고 했으니 꽤나 고구려군에게 유리한 싸움이 아니었던가 싶기도 하지만, 단재 선생은 군사학에는 다소 어두우셨던 듯. 그도 그럴 것이 무구검이 친 '방진'은 소수가 다수를 대적하기 위한 진으로서, '방진'의 존재 자체가 처음부터 무구검쪽이 '숫자'로 불리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방진은 서양에서는 '팰런스(Phalanx)', 혹은 '파이크 스퀘얼(Pike Square)'이라 해서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늘어놓은 병사의 수가 똑같도록 사각형 모양으로 치는 진을 말하는데, 바깥쪽으로 창칼을 빽빽하게 겨누고 고슴도치 가시처럼 적의 접근을 막는다. 그 유명한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의 3백 결사대도 테르모필레에서 이 방진을 치고 페르시아 백만 대군과 맞선 바 있다. 후대의 일이긴 하지만 영국 또한 나폴레옹과 맞선 워털루 전투(1815)에서 이 방진을 써서 이겼는데, 평지에서 돌격해오는 프랑스 갑주기병(Cuirassier)에 맞서 총검으로 방진을 치고서 진 안에서 대포를 쏘아 프랑스군을 와해시킨 뒤, 기병으로 습격해 이겼다는 것이다.

 

<통구 12호분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철기병. 오늘날 대중적으로 고구려 군사의 '힘'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철기(鐵騎), 즉 개마무사는 우리에게는 고구려 군대의 힘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사람뿐 아니라 말까지 철갑옷으로 중무장한 위압적인 모습으로 대륙을 재패하는 강한 전사의 이미지하지만 그것이 고구려군의 승리를 보장하는 보증수표였다고는 말할수 없다. 중세의 일이긴 하지만 서양에서 십자군인가, 서양의 기사단이 유럽의 극동에서 몽골군을 만난 적이 있다. 독일(당시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튜튼기사단이랬지 아마? 아시다시피 중세의 기사들은 온몸에 강철로 된 갑옷을 두르고 있고, 고구려의 갑옷에 비교하면 사실 못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좋은 갑옷을 몸에 걸치고 있던 서양의 기사단은, 철보다 몇 배나 허술한 가죽갑옷만 걸친 몽골군 경기병에게 속된 말로 '개발렸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실전에서 갑옷 따위는 몸에 몇 벌을 걸치고 있어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것(그리고 전법이 장비의 열세를 충분히 커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온몸에 갑주를 철통처럼 두른 '중장기병'이 아니어도, 기병은 보병에 비해 제압 방법이 훨씬 단순하다. 사람이 아니라 '말'을 노리면 되니까. 기수를 직접 공격할 필요 없이 그냥 말등에서 균형을 잃게 하든지 말만 쓰러뜨려도 게임 끝이다. '낙마'는 그 자체만으로도 불구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며, 설상가상으로 무거운 갑옷까지 입고 있다면 뭐... 전쟁터에서 혼자 힘으로 살기는 글렀다고 봐야지.

 

사람뿐 아니라 말에게까지 갑옷을 입힌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악화되면 악화됐지. 아무리 힘센 말도 갑옷 무게를 감당하진 못한다. 때문에 철기병은 기병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스피드'가 떨어지고, 이리저리 치고받고 온갖 복잡한 상황이 연출되는 전장에서 신속하게 움직이지 못한다. 기병에게 그건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속력을 내기 시작하면 방향 전환도 힘들다. 왕이 무구검의 군사를 공격할 때, 철기병(개마무사)에 맞서기 위해 무구검은 네모난 방진을 치고 기병의 진격을 막았을 터다.(사실 기병의 돌격을 막는 데에도 이 방진은 유용하게 쓰였던 듯 하다)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에서는 로마 군단이 마케도니아 16열 팰런스(방진)를 패배시킬 때의 전술을 언급하면서, 철기병(개마무사)은 예비로 후방에 배치하고 창병을 앞세워서 궁수들이 창병을 엄호하게 하는 식으로 전진시켜 방진을 흐트러뜨리고, 경기병을 시켜 무구검의 후방을 치게 했다면 이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여기는 로마도 마케도니아도 아닌 고구려 아니던가.

 

[冬十月, 儉攻陷丸都城. 屠之, 乃遣將軍王頎追王.]

겨울 10월에 검은 환도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성을 노략질하고, 장군 왕기(王)를 보내 왕을 쫓았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0년(246)

 

안에 있던 남자란 남자는 닥치는 대로 죽이고, 화려하던 대궐과 관사, 민가는 불타올라

시커먼 연기와 짚 타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저들끼리

재물과 여자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지려고 다투는 탐욕스러움이 가득한 적병들의 말소리.

먹지 못해 굶주린 놈들은 아무 집에나 쳐들어가서 닭장과 외양간을 부수고

닭과 소를 마구잡이로 끌어다 저들끼리 지껄대며 먹는다.

배고픈 것은 아무래도 좋으니 계집이나 좀 데려오라며 아무 데나 가서 끌고 오는 놈들도 있다.

사람의 생피가 어떤 냄새인지 그것이 불에 그을리면 또 어떤 냄새가 나는지, 

하늘이 무너진다는 것은 바로 오늘과 같은 모습이라 똑똑히 알았을 것이다.

 

[王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 唯東部密友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遯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間行脫而去, 依山谷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왕은 남옥저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다. 군사는 흩어져 거의 다 없어졌다. 오직 동부(東部)의 밀우(密友)만이 곁에 있다가 왕에게

“지금 뒤쫓는 병사들이 바짝 다가와 있어 형세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신이 죽을 각오로 막겠습니다. 왕께서는 달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라 하고, 결사대[死士]를 모아 함께 적진으로 가서 힘껏 싸웠다. 왕은 몰래 빠져나가서 산골짜기에서 흩어진 군졸을 모아 스스로 호위하면서 말하였다.

“밀우를 찾아 오는 자에게는 후하게 상을 주겠다.”

하부(下部)의 유옥구(劉屋句)가 나섰다.

“신이 가보겠습니다.”

하고, 전장에서 밀우가 엎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 업고 돌아왔다. 왕은 그를 무릎에 눕혔는데, 한참만에 이윽고 깨어났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0년(246)

 

사태가 겉잡을수 없이 커져가는 가운데. 우위거왕이 남옥저를 지나 죽령에까지 이를 만큼 고구려의 패배는 너무도 심각했다. 옛날 추모왕이 부여를 탈출하던 순간처럼 왕을 추격하는 군사들이 가까이에 이르렀을때, 군사들도 거의 다 흩어져버린 상태에서, 왕의 곁을 지키던 밀우라는 사람이 결사대를 모아 위의 군대를 막기에 이른다. 패잔병의 모습으로 죽령의 산골짜기에 이르러서, 겨우 흩어진 군사들을 다시 모은 우위거왕이 가장 먼저 명한 일은, 자신이 빠져나갈수 있게 적군을 막아준 밀우를 찾아 데려오는 것이었다.하부의 유옥구라는 사람이 그 일을 자청해, 시체가 낭자한 전쟁터 속으로 들어가 정신을 잃고 엎어진 밀우를 업어서 왕의 앞으로 데려온다.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往魏軍, 因伺隙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矣." 王曰 "諾".]

왕은 몰래 이리저리 돌아서 남옥저에 이르렀으나, 위의 군사는 계속해서 추격해왔다. 왕은 계획이 서지 않고 기세는 꺾였으므로 어쩔줄 몰랐다. 동부 사람 유유(紐由)가 나서며 말하였다.

“형세가 매우 위급하나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습니다. 음식을 갖고 가서 위 군사에게 주면서 틈을 노려 그 장수를 찔러 죽이겠습니다. 신의 계책이 성공하면, 왕께서는 분연히 공격하여 승부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좋다[諾]."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0년(246)

 

밀우와 유유는 모두 같은 동부(환나부) 사람이었다는데, 동부는 동천왕과 대체 무슨 연관이 그리도 깊었던 걸까.

무슨 은혜가 그리 깊길래,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도 불사하면서 왕을 지키려는 것일까?

 

[紐由入魏軍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胷,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유유가 위군에 들어가 거짓으로 항복하며 말하였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얻어서 도망쳐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몸 둘 땅이 없습니다. 장차 진영 앞에 나와 항복을 청하고 목숨을 맡기려고, 먼저 저를 보내 변변치 못한 음식을 가지고 와서 부하들에게 먹이려 합니다.”

위의 장수가 그 말을 듣고 그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는 그릇 속에 칼을 감추고 앞으로 나아갔다. 칼을 빼서 위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함께 죽으니, 위군이 마침내 어지러워졌다. 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습격하였다. 위의 군대는 소란해져서 군진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樂浪)에서부터 물러갔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0년(246)

 

유유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자객'이다. 사마천이 《사기》 자객열전에서 증언한 형가나 섭정ㆍ고점리처럼, 대의를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던진 자들. 그가 목숨을 건 '의(義)'란 우위거왕에 대한 충의였다. 그리고 유유가 자신의 몸을 불태워 열어준 길을 우위거왕은 거침없이 뚫고 지나갔다. 그때 유유가 죽인 위의 장수에 대해 흔히 위 군대의 총사령관이었던 무구검이나 그의 부장 왕기였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한때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무구검은 이 전투 뒤에도 살아남아 본국에서 좌장군직까지 올랐고 254년까지 생존했으며(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죽었다고 《삼국지》열전에 나온다), 왕기 역시 뒤에 현도태수에서 대방태수로 전임되었다고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오니, 둘다 이때 유유에게 살해당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어쩌면 이랬던 것이 아닐까. 무구검으로부터 분명 고구려 왕을 쫓아가서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자기 자신도 자칫 고구려군에게 기습을 당해 죽지나 않을까, 하고 겁을 먹고서 자신의 부하 장수를 시켜 대신 추격하게 하고 보냈는데, 하필 여기서 그런 테러(!)가 일어나 우려하던 것이 사실이 된 것을 보고, 더이상 고구려군을 쫓아갔다가는 자신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겁을 먹었을지 모른다. 사실 위에 대항해서 싸웠던 고구려군은 초반 두 차례의 전투에서 위의 군사를 무려 6천명이나 죽여 목베었고, 그러던 것이 무리하게 선제공격을 하려다가 반격을 당해서 저렇게 된 것이지, 저들이 만약 다시 주변의 여러 부족과 나라들을 규합해서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공격해온다면 그때는 정말 어떻게 될지 알수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자신들의 왕을 추격하는 군사들에게는 그렇게까지 거리낌없는 테러를 자행해버리는 고구려군에게, 애시당초 겁을 집어먹고 있다가 그만 그 소식을 듣고 질릴 수밖에.

 

결국 위는 고구려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낙랑의 길을 거쳐 퇴각해야만 했고, 고구려는 가까스로 멸망의 위기를 면하고 국체를 보전한다. 처절한 전투의 종말이었다.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杜訥河原, 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왕이 나라를 회복하고서 공을 논함에 밀우와 유유를 으뜸으로 삼았다. 밀우에게는 거곡(巨谷)과 청목곡(靑木谷)을 주고, 옥구에게는 압록원과 두눌하원(杜訥河原)을 식읍으로 주었다. 유유에게 구사자(九使者) 벼슬을 추증하고, 그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0년(246)

 

나라를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했던 자들을 왕은 잊지 않았다. 살아있는 자는 살아서, 죽은 자는 죽어서 그들의 집안을 빛내고 자랑스러운 이름을 그 후손에게까지 전했다. 밀우가 목숨 걸고 위의 추격군을 막지 않았던들, 유유가 자신의 몸을 내던져 적장을 칼로 찔러 죽이지 않았던들, 태왕은 살아날 수도 없었고, 고구려라는 나라가 5백년을 더 이어나갈 수도 없었다. 만약 부식이 영감이 《삼국사》에 '순사(殉)' 열전이라고 해서,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열전으로 엮었다면, 분명 저 두 사람이 가장 먼저 첫머리에 올랐을 것이다.(밀우는 살고 유유는 죽었지만) 그 나라가 건강하냐 그렇지 못하냐의 여부를 알고 싶다면,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나라와 백성들이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면 된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네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나라와 백성이 모두 앞다투어 추앙하는 것으로,

그 나라는 주변에서 아무리 무너뜨리려고 해도 그렇게 할 방법이 없다.

나라와 백성이 모두 한몸이 되어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면 저마다 앞다투어서 죽으려 나서기 때문이다.

 

둘은 나라는 추앙하는데 백성이 추앙하지 않는 것으로,

보통 독재국가에서 나라에 대한 충성을 백성들에게 강요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을 심하게 미화하는 경우이다.

그 나라는 망하지는 않겠지만 백성과 나라가 서로를 믿지 못하니 자칫하다가는 영락해서 쇠퇴할지도 모른다.

 

셋은 나라는 추앙하지 않아도 백성이 추모하는 것으로,

그 나라는 비록 정부가 무너져도 몇번이고 거듭거듭 살아날 나라다.

적국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한다면 아마, 정부를 무너뜨리는 것보단

그 나라 백성을 모두 죽이는 것이 더 빠른 방법일 것이다.

도덕적인 비판이나 양심의 가책도 모두 잊고서라도 말이다.

다만 지역에 따라 나라가 쫙쫙 갈라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니,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최고라고 추앙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넷은 내가 여간해서는 보고 싶지 않은 최악의 경우이다.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워도 정치하는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백성들도 그들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그런 나라에서는 혹여, 어떤 나라처럼 국경을 넘어온 적선과 교전해 끝까지 맞서 싸우다

배 위에서 죽은 장병이 있어도 정치인들이 결코 장례식에 직접 찾아가 추모하는 수고를 하지 않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기억해주지도 않으며, 조상이 독립운동을 하느라 거지로 전락해

뿔뿔이 흩어진 후손들에 대한 예우나 생활 안배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아마 냉동창고에서 유독가스에 질식하고 불에 타서 죽어도,

그것에 대해 그 나라 정치인들은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한때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의 자손들이 정부 요인에 앉아 있어도

백성들이 그런 것을 부당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봐야 한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던지, 아니면 백성들 모두가 자진해서 죽어야 된다.

전세계의 독립영웅과 호국영령들 보기 부끄러운 행태가 벌어지는 나라는

더 살아봤자 비참하고 구차한 목숨만 끈질기게 이어가는 바퀴벌레나 잡초만도 못한 것들이니까.

 

기억하라. 우리가 왜 지금 이곳에 있을수 있는지를.

먼 옛날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사는 땅을 위해서, 싸우다 죽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며

하늘이 내린 임무라 믿고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밀우나 유유, 유옥구같은 사람들은 바로 그런 시대에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서 충실하게 이행했던,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영웅이었다.

 

[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初, 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毋丘儉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이 전쟁 때였다. 위의 장군은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그 공을 새겼으며, 또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에 공을 새기고 돌아갔다. 이전에 신하 득래(得來)가 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여러 차례 간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득래가 한탄하여 말했다.

“이 땅에 장차 쑥대가 나는 것을 보게 되리라.”

결국 먹지 않고 죽었다. 무구검이 모든 군사들에게 명하여 그 묘를 무너뜨리지 말고 그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 처자를 포로로 잡았으나 모두 놓아 보내 주었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0년(246)

 



무구검이 숙신의 남쪽 경계와 환도산의 불내성에 새겼다는 공적비. 
그것이 오늘날 전하는 이른바 '무구검기공비'이다. 현존 비면의 크기는 세로 6.6cm, 가로 26.3cm, 글자 크기는 2.7cm이고, 서체는 예서체다. 청(淸) 광서 10년(1906)에 집안현 소판차령(小板岔嶺)의 도로공사 중 어떤 농민이 발견해 보고했고, 당시의 지현(知縣: 우리나라로 치면 현감쯤?)이었던 오광국(吳光國)이 소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집안이라면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이 있는 곳인데, 보나마나 환도성이 수복된 뒤 고구려인들의 손에 파묻혀 없어져버렸을 것이다. 묻을때 깨서 묻었는지 비면의 아래와 왼쪽 부분이 떨어져 나가, 7행만 남아있을 뿐이고 그 전체 내용이 어땠었는지는 알수 없다. 아마도 현재 남아있는 비면의 아래에 1~2자가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행도 2~3행은 더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正始三年, 高句驪反, 督七牙門, 討句驪.]

정시(正始) 3년(242년)에 고구려(高句驪)가 반(反)하니, 일곱 장군을 거느리고 구려(句驪)를 토벌했다.

 

저들이 말하는 정시 3년ㅡ서기 242년이면, 우위거왕이 요동의 서안평을 쳐서 빼앗은 그 해다. 고구려에게 요동을 빼앗긴 분풀이로 위에서 군대를 보내 고구려를 쳤다고,하는 그런 내막을 알수 있다.

 

사실 서안평은 고구려로서는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중요한 전진기지였다. 태조왕 때에 여길 쳤던 이래로, 우위거왕이 여기를 다시 석권했었고, 실제로 미천왕 때에 이르러 요동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이 서안평을 거쳐 낙랑과 대방, 현도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중국 대륙 서쪽 옛 조선 영토에 대한 공략을 완수했다. 낙랑과 현도의 옛 조선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지나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엄청난 희생과 전쟁을 감수하면서도 고구려가 어떻게든 얻으려고 했던 것인지도. 그리고 고구려가 서안평을 얻는다는 것은 곧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일이기에 어떻게든 그 땅을 지키려고 한 것이라고. 뭐 어디까지나 내 잡소리지만.

 

[括地志云 『不耐城卽國內城也. 城累石爲之.』 此卽丸都山與國內城相接.]

《괄지지(括地志)》에 이렇게 쓰여 있다.

『불내성(不耐城)은 곧 국내성이다.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하고 있었음이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0년(246)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은 불이성(不而城)이라고도 불렸다. 《삼국사》 지리지에서는 국내성을 위나암성, 혹은 불이성이라고도 부른다고 적었고, 《삼국유사》 왕력편에도 마찬가지로 유리명왕의 국내성 천도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때 옮긴 국내성을 불이성이라고도 적는다고 했으며, 조선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도 불이성이라고 불렀다. 이이화 선생은 이 '불내성(不耐城)'이라는 이름은 무구검이 고구려에 대한 모욕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했다. '불내(不耐)', 즉 '견디지[耐] 못한다[不]'. '이 정도도 못 견디는 끈기없는 놈'이라고, 위군에게 격파당한 고구려를 놀린 것이라나. 우리가 말한 불이성이나, 여기서 인용된 《괄지지》에서 말하는 '불내성(不耐城)', 양자는 서로 어떤 관계일까. 두 이름은 가운뎃글자만, 우리 기록에서는 '이(而)', 저쪽에서는 '내(耐)'라고 적었으니. 발음은 서로 다른 두 글자가 부수 하나 차이로 닮았는데, 아마 둘중에 오자가 섞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불내/불이 또한, 단재 선생이 <평양패수고>에서 말했던 '펴라(平壤/沛水)'의 수많은 차음표기 가운데 하나라고 말이다.

 

고구려의 모든 수도는 '펴라'로 통한다. 원래는 강 이름에 불과했던 것이 수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고구려에서는 자리를 잡았다. 졸본하 강가에 졸본국이 있었고 사비강 강가에 사비국이 있는 것과 같은 종류라고 단재 선생은 말씀하셨는데, '강'과 '육지'는 비유하자면 눈과 눈썹의 관계로 위치상 뗄래야 뗄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모든 문명은 '강'에서 비롯되었다. 은나라는 고대 황하에서,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 강에서, 메소포타미아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에서. 우리말로 '나라[國]'라는 단어도 강가에 취락지를 세우고 문명사회를 열어나갔던 원시시대에 강변을 가리키는 '나루[津]'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평양과 평나ㆍ변나ㆍ백아ㆍ낙랑ㆍ낙량, 패수ㆍ패강ㆍ패하까지 모두 '펴라'라는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해 한자의 음을 빌린 단어들이다. 그리고 이 '펴라'는 원래 고구려의 수도 가까이 흐르는 강물을 부르는 고구려인들의 말이었다. 국내성도 다들 아시다시피 근처에 압록강이 흐르고 있다. 평양에 대동강이 흐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이야 대동강이니 압록강이니 하고 부르지만 고구려 때에는 수도 근교의 강으로서 모두 '펴라'라고 불렀다. 국내성이 고구려의 수도였던 시대에는 국내성 가까이 흐르는 압록강이 그들의 '펴라'였고, 이것을 한자로 차음표기한 것이 바로 '불이(不而)'와 '불내(不耐)'이다. 펴라라는 이름은 평양 천도(427) 이전에 이미 국내성 시대부터 그 기원이 싹트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의 전쟁 뒤에 숨겨진 이야기.

 

[正始中, 幽州刺史毋邱儉, 討句麗. 遣玄○太守王頎詣夫餘, 位居遣犬加郊迎, 供軍糧. 季父牛加有二心, 位居殺季父父子, 籍沒財物, 遣使薄歛送官. 舊夫餘俗, 水旱不調, 五穀不熟, 歸咎於王, 或言當易, 或言當殺. 麻余死, 其子依慮年六歲, 立以爲王.]

정시(正始) 중에 유주자사(幽州刺史) 무구검(毋邱儉)이 구려를 토벌하였다. 현도태수 왕기(王頎)를 파견하여 부여로 보내자, 위거가 견가(犬加)를 교외로 보내어 맞이하였으며, 군량을 대주었다. 위거의 계부(季父)인 우가(牛加)가 역모할 마음을 품자 위거가 계부의 부자를 죽이고 재산을 몰수한 다음 조사관을 파견하여 재산 목록을 장부에 기입하고 관가로 보냈다. 부여의 옛 풍속에 물이 가물어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면 그 책임을 왕에게 돌려 혹은 살려야 한다고 하고 혹은 죽여야 한다고도 했다. 마여가 죽자 그의 아들 의려(依慮)가 나이 6세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삼국지》 권제30, 동이전 부여조

 

부여가 관구검을 지원해서 군량을 대주었다는 것. 부여는 고구려가 갈라져나온 고구려의 뿌리인데도 오히려 적국인 위를 도와서 고구려를 멸하려고 군량을 대주었다는 이야기를 놓고 보면, 신라가 나중에 당을 도와 고려를 멸한 것을 두고는 뭐라고 말해야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라는 차라리 문화적인 면에서 갭이 좀 있었다고 해도, 부여는 말하는 것이나 풍속이 고구려와 거의 판박이였다잖아. 그런데도 저랬으니 할말 다 한거지 뭐. 그리고 부여의 내부사정... 그리 좋지만도 않았었다. 이 무렵 부여를 다스리던 마여왕의 선대왕 간위거의 계부(??)가 되는 우가가 역모를 꾀하다가 그 부자가 죽었다고(계부가 뭐야? 작은 아버지야?) 그리고 이 일이 있고 얼마 안 지나서 마여왕은 죽고, 마여왕의 왕자 의려가 겨우 여섯 살밖에 안 된 나이로 즉위해서 왕이 되었다는 것.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

21년(247) 봄 2월에 왕은 환도성이 난을 겪어서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이 살던 곳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위궁왕 21년에 이르러 옮긴 평양이 지금의 평양인지는 확답할 수 없다.(단재 선생은 지금의 평양이 맞다고 하셨지만) 지금의 평양으로 고구려가 수도를 옮긴 것은 장수왕 연간의 일이니까 여기서 2백년은 더 지난 뒤의 일이다.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는 저 구절은 김부식 영감의 노망짓거리 가운데 하나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연(燕)ㆍ제(齊)의 망명자를 모아다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聚燕齊亡命者, 王之都王險]."

라고 적은 조선열전 구절에서 '연과 제의 망명자를 모아서'라는 앞부분만 끊어버리고 뒷부분만 적어논 것이다. 안정복 영감이 《동사강목》에서 밝혀내지 않았으면 저 '왕지도왕험'이 정말 단군을 이야기하는 것인줄 알았을 테고(그놈의 영감태기 정말이지 《삼국사》 쓰면서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다만 여기서 부식이 영감은 꽤나 중요한 말을 한마디 던지고 있다.

"평양이란 원래 선인 왕검의 택지를 말한다[平壤者, 本仙人王儉之宅也]."

 

평양을 선인 왕검의 택지라고 한 것은 신라의 《선사(仙史)》를 인용한 것이라고 단재 선생이 설명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는 단군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많은 기록들이 있지만 대체로 13세기를 넘어가지 못하고, 그걸 넘어가는 유일한 문헌이 바로 《삼국사》의 저 기록이다. 위궁왕이 오기 전에 이곳에 살았다는 선인 왕검은 대체 누구였을까?(평양이라면 우리가 배운바 '단군'께서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셨던 수도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아직까지도 단군의 실체가 의심받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삼국유사》에서 단군의 이야기를 비교적 장황하게 싣고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정작 엉뚱한 곳에 있었다.

일연이라는 땡중이 인용한 《위서(魏書)》의 존재였다.

 

《위서》. 즉 중국 위(魏)의 역사책을 의미한다. 중국에서 위라는 나라는 부여나 고구려와도 국경을 인접한 까닭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면서 상당히 많은 정보를 얻을수 있었고, 동이열전에 수록된 고구려 관련 정보 역시, 신빙성이 상당히 높은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있다.(부식이 영감도 이 《위서》를 인용해서 동명왕 본기를 기록했었지) 일연이라는 땡중도 이 《위서》를 인용했다면서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단군왕검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아사달에 나라를 세워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乃往二千載前, 有檀君王檢, 立國阿斯達, 國號朝鮮]." 라고 《삼국유사》 단군조선조 첫머리에 밝혀놨다. 지금 남아있는 《위서》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 어쩌면 단군의 존재를 말해주는 가장 강한 증거가 될지도 몰랐을 《위서》에는,일연이 말한 것처럼 단군에 대한 기록을 싣고 있지 않다.그렇기에 일본인 학자들은 단군을 13세기 승려들의 위작으로 몰아붙였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이 《위서》에 단군의 기록이 없음을 내세웠다. 마치 『광개토태왕릉비』 신묘년조의 글자 하나 마멸된 것을 보고 임나일본부를 운운하듯이. 

 

나도 모르지. 정말 일연이라는 땡중이 뭘 보고 적었던 것인지. 만약 《위서》에 애시당초 그런 기록이 없었다면, 단군의 존재 자체는 학술에서 매장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단재 선생은 《삼국유사》의 《위서》는 왕침의 저술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매장되기에는 단군의 존재를 말하는 이야기들이, 그 흔적들이 너무 많다.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고려는 스스로를 '기자지국(箕子之國)'이라 불렀다. 은에서 망명해온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의 후예라고 하는 의미에서, 평양에 단군의 사당보다도 가장 먼저 기자의 사당인 기자사(箕子祠)ㅡ지금 평양에 남아있는 숭인전(崇仁殿)을 먼저 지을 정도였는데, 중화의 문물로 오랑캐(?)의 땅을 교화시킨 '거룩한 성인'으로서 기자는 고려와 조선 모든 유학자들의 추앙을 받았다.안정복 영감도 《동사강목》에서 단군보다 기자를 가장 먼저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니까. 김부식도 그렇게 기자를 숭배한 유학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그가 왜, 평양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기자' 대신, 어디서 보도 듣도 못한 '선인 왕검'이라는 자를 들먹였던 것일까. 내가 이런 말을 해봤자 분명 저 미친 섬나라 오랑캐들은 조선놈이 또 망상에 빠져 허덕대는구나 하고 비웃겠지.(미친 것들) 하지만 나는 정말 알고 싶다. 대체 그는 누구일까?

 

아참, 이 해에 예후(濊侯)가 중국에 조공하였다. 《삼국지》에 기록된 바,

위 제왕(齊王) 방(芳) 정시(正始) 8년(247), 간지로는 태세 정묘이다.

 

[二十二年, 春二月, 新羅遣使結和.]

22년(248)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신라가 왜 왔지? 백제와 왜가 너무 갈궈대니까 좀 도와달라고 청하러 온 건가?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시원(柴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동천왕이라 하였다. 국인이 그 은덕을 생각하며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근신(近臣) 가운데 자살하여 따라 죽으려는 자가 많았다. 새 왕[嗣王]은 예가 아니라 여기고 그것을 금했다. 장례일이 되어 묘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국인이 땔나무[柴]를 베어 그 시체를 덮었으므로, 마침내 그 땅을 시원(柴原)이라 하였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2년(248)

 

우위거왕은 신하들로부터 인간적으로도 몹시 존경받았다. 평소에 자기 몸 지키느라고 유순하고 조용조용하게 굴던 양반이. 이 무렵만 하더라도 고구려에는 부여의 유습, 즉 순장이 존재하고 있었다. 죽은 자의 무덤 속에 금은의 그릇을 넣듯, 영혼의 시중을 들어줄 사람을 함께 묻는 것, 그것이 바로 순장(殉葬)이다. 고대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순장이 있어서, 멀리로는 부여, 숙신, 서쪽으로는 고대 은에서도 순장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우리나라 남쪽으로 신라와 가야 유적지에서도 숱하게 순장의 흔적이 발견된다. 신라 지증왕 때보다 앞서 고구려 동천왕 22년, 즉 중천왕 원년에 순장을 폐지했다는 것이 《삼국사》의 설명이다.

(어쩌면 국사교과서를 수정해야 되는 것 아냐?)

 

이 동천왕이 묻힌 시원이라는 곳에 대해 안정복 영감의 《동사강목》에 보면 조선조 《동국여지승람》평양고적 조에 시원이라 해서 대해서 기록한 것과, 윤두수의 《평양지(平壤志)》에는 평양부 동쪽 30리 시록(柴麓)이라는 곳에 높이가 한 길이 넘는 묘가 있었는데(이미 오래 전에 도굴당하고 버려진 무덤이었다) 그때 돌 위에

“고구려 동천왕묘를 시원(柴原)이라 이름하였다.”

라는 두 줄 남짓의 글자가 쓰여있었다고 한다.

 

동천왕이 옮긴 평양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수 없지만, 적어도 장수왕이 옮긴 그 평양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고 하니, 아마도 조선 사람들이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동천왕은 어디에 묻혀있는 걸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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