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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26>제12대 중천왕

열국시대의 역사는 그야말로 역사 콘텐츠의 종합세트다.

고대의 국사를 읽을 때마다 '어쩌면 이런 일이 있을수도 있다냐'싶은 생각에,

절로 고개가 갸우뚱해지고, 입이 쩍 벌어진다.

동명왕과 유리왕, 대무신왕 3대의 에피소드만 하더라도,

작가 김진 님에 의해 <바람의 나라>라는 대작으로 탈바꿈하여 다시 태어났고,

고려(고구려) 말년 연개소문에 얽힌 대륙의 '규염객 전설'이,

작가 박성우 님의 <천랑열전>의 모티브가 된 것을 차치하고 보더라도,

고대의 역사 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비밀들이 많이 숨어있다.

잘만 다듬으면 위의 작품들처럼 희대의 걸작으로서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고,

또 우리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될수도 있으리라고.

개인적인 생각은 그러하다.

 

[中川王<或云中壤>, 諱然弗, 東川王之子. 儀表俊爽, 有智略. 東川十七年, 立爲王太子, 二十二年, 秋九月, 王薨, 太子卽位.]

중천왕(中川王)<혹은 중양(中壤)이라고도 했다.>은 이름이 연불(然弗)이고 동천왕의 아들이다. 자태와 용모가 뛰어나고 지략이 있었다. 동천왕이 17년에 왕태자로 삼았고, 22년 가을 9월에 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중천왕

 

동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중천왕.

다른 왕들이 그렇듯(?) 자태며 용모가 출중하시고 지략 또한 상당하셨다네.

즉위하자마자 순장을 금지하시고, 1달 뒤에는 연씨를 왕비로 맞이하셨다고.

 

[冬十月, 立椽氏爲王后.]

겨울 10월에 연씨(椽氏)를 왕후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중천왕 원년(249)

 

이 연씨는 고구려 연나부(椽那部), 즉 남부(후부) 출신으로,

이곳은 대대로 고구려 왕실의 왕비를 배출한 집안이기도 하단다.

 

[十一月, 王弟預物·奢句等謀叛, 伏誅.]

11월에 왕의 동생 예물(預物)과 사구(奢句) 등이 모반하였다가 처형되었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중천왕 원년(249)

 

그런데 즉위한지 1년도 못되어, 아우들의 반란이 터진걸보면

형제관계가 그리 좋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또 모종의 정치적인 연관이 있는 건가?)

 

[三年 春二月 王命國相明臨於漱 兼知內外兵馬事]

3년(250) 봄 2월에 왕은 국상(國相) 명림어수(明臨於漱)에게 명령하여 서울과 지방의 군대의 일을 겸해서 맡아보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중천왕

 

재상이었던 명림어수에게 다시 서울과 지방의 군대의 일을 겸해서 맡게 한다.

명림어수라는 이름에서, 옛날 신대왕 때에 차대왕을 죽이고 신왕을 즉위시킨 

연나조의 명림답부와 연관이 있을테니,

이 명림어수란 사람은 명림답부의 손자이거나 아니면 증손자이거나 할텐데,

역시 같은 연나부(남부) 출신으로서 국상을 맡고 있던 터였다.

 

그런 그에게 왕권을 대행하는 임무,

그것도 고대 사회에서 '권력' 그 자체였던 '군사'의 일을 맡아보게 한 것을 보면,

훗날 고구려의 관직이었던 대대로ㅡ즉 '막리지'라고도 불리는,

오늘날로 치면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급 포스에 버금가는 벼슬의 유래가

이 시기에 이미 태동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고 해석할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일단 중천왕 무렵에는 이 남부의 세력이 꽤나 막강했었던 것 같다.

왕비부터, 서울과 지방의 군사권까지 모두 틀어쥔 국상까지.

 

[四年, 夏四月, 王以貫那夫人置革囊, 投之西海.]

4년(251) 여름 4월에 왕은 관나부인(貫那夫人)을 가죽주머니에 넣어 서해에 던져버렸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중천왕

 

조금은 엽기스러운 이 역사의 한 장은, 모두 한 사람의 여자로부터 시작되었다.

 

[貫那夫人, 顔色佳麗, 髮長九尺. 王愛之, 將立以爲小后. 王后椽氏恐其專寵, 乃言於王曰 "妾聞西魏求長髮, 購以千金. 昔我先王, 不致禮於中國, 被兵出奔, 殆喪社稷. 今王順其所欲, 遣一介行李, 以進長髮美人, 則彼必欣納, 無復侵伐之事." 王知其意, 默不答.]

관나부인은 얼굴이 곱고 머리카락의 길이가 아홉 자나 되었다. 왕이 총애하여 장차 소후(小后)로 삼으려 하였다. 왕후 연씨는 그녀가 사랑을 독차지할 것을 염려하여 왕에게 말하였다.

“제가 듣건대 서위(西魏)에서 긴 머리카락을 구하여 천금을 주고 사려고 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우리 선왕께서 중국에 예물을 보내지 않아서 침입을 받고 달아나 사직을 거의 잃을 뻔했습니다. 지금 왕께서 그들이 바라는 대로 일개 심부름꾼을 보내 장발미인을 바치면, 그들이 반드시 흔쾌히 받고 다시 침략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왕은 그 뜻을 알고 묵묵히 대답하지 았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중천왕 4년(251)

 

안정복 영감은 '관나'가 곧 부(部)의 이름이며, 부인은 바로 관나부(貫那部) 사람이기에

관나부인이라고 부른 것이라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맞는말 같다.

글쎄, 머리카락이 엄청 길었단다.

아홉 자래 아홉 자. 2m는 족히 되는 장발이라는 거지.

(개인적으로 여자의 아름다움이란 얼굴만큼이나 머리카락에 비중이 있다고 믿는 1人)

그래갖고 그 장발 미인을 자신의 소후, 즉 후궁으로 삼으려고 했었는데,

그 무렵 왕비가 되어있던 연씨가 그걸 엄청나게 질투를 했고,

왕에게 차마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돌려서 말한다는 것이

다른 나라에서 긴 머리 미인을 구한다는데 우리가 보내줄까요ㅡ? 하고,

(대놓지는 않았어도 왕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뭐)

왕은 그걸 듣고도 그냥 묵묵하게 넘긴다.

자기만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으면 알아서 잠잠해지겠거니 하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중中천왕이라는 왕이 이래서 중천왕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문제는 뜻밖에, 엉뚱한데서 다시 터졌다.

 

[夫人聞之, 恐其加害. 反讒后於王曰 "王后常罵妾曰 '田舍之女, 安得在此? 若不自歸, 必有後悔.' 意者后欲伺大王之出, 以害於妾. 如之何?" 後, 王獵于箕丘而還, 夫人將革囊迎. 哭曰 "后欲以妾盛此, 投諸海. 幸大王賜妾微命, 以返於家. 何敢更望侍左右乎?" 王問知其詐, 怒謂夫人曰 "汝要入海乎?" 使人投之.]

부인이 그 말을 듣고 왕후가 자기에게 해를 가할 것을 염려하였다. 거꾸로 왕에게 왕후를 참소하였다.

“왕후께서 항상 저더러 ‘촌년[田舍之女] 주제에 여기 왜 있는 거냐? 스스로 안 돌아가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걸.’하고 꾸짖으셨어요. 제 생각에, 왕후께서 대왕께서 나가신 틈에 제게 해를 가하려는 거예요. 어쩌면 좋죠?”

훗날 왕이 기구(箕丘)로 사냥나갔다가 돌아오니, 부인이 가죽주머니를 들고 맞이하였다. 울면서 말하였다.

“왕후께서 절 여기 담아서 바다에 던지려 하셨어요. 대왕께서는 저의 작은 목숨을 살려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어찌 감히 다시 곁에서 모실 것을 바라겠어요?”

왕은 물어보고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노하였다. 부인에게

“네가 꼭 바닷속으로 들어가야겠느냐?”

고 말하고는 사람을 시켜 던져버렸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중천왕 4년(251)

 

이것이 이번 '후궁 익사 살인 사건'의 전말이다.

소사소사 맙소사. 

ㅡ라는 건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한다.

단순히, 연나부와 관나부라는 두 유력 부(部)의 싸움이라는 정치적 상황을 걷고 보자면,

(왕비가 부인에게 '농사 짓는 집 여자'어쩌고 한 것을 보면

그녀가 속한 관나부가 그 무렵에는 그다지 세력이 강하지 못했던 것을 짐작할수 있다)

왕비가 좀 질투한 것도 있긴 하지만, 그 부인도 올바른 처사는 못 되었다.

남부의 힘이 강성한 이 때, 자칫하다가는 왕이 끌어내려질수도 있는 이 민감한 때에

(남부 사람이 국상으로서 서울이며 지방의 모든 병권을 틀어쥐고 있었으니)

그 남부 출신의 왕비가 하는 말을 왕이 모른척했다는 것은,

자신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어떻게든 그녀를 보호해주려는 뜻도 있었을텐데.

왜 그건 몰랐는지 참.

 

게다가 어법도 너무 직설적이야.

(개인적으로 어법 때문에 피를 봤던 경험이 많다)

왕비가 은근히 돌려서 '머리 긴 여자'라고만 하고 그 이름을 대지는 않았는데,

너무 공격적이고 직설적인 어법으로 '왕비께서', '왕비께서~~~'하니,

듣는 입장으로서도 사실 피곤할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그래도 남부와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면서도 그녀를 옆에 두고 싶은 왕인데,

계속 그런 식으로 자기 입장도 생각 안하고 들볶으면서 쑤셔대니,

정나미가 뚝뚝 떨어져 결국에는 저 멀리 삼천포로 빠져버릴 수밖에.

 

어쨌거나 물고기밥 신세되고,

왕도 왕비에게 가서 뭐라고 말한 것이 있지는 않을까하고,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녀가 잘못하기는 했지만 당신도 처음 잘못한 것이 있으니 누굴 원망할건가.

그러니 당신도 앞으로 알아서 기어라.

안 그랬다가는 저렇게 또 바닷속에 들어가게 될테니.

ㅡ라고 말이다.

(왕비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부 세력에 대한 항의지 뭐)

 

[七年 夏四月 國相明臨於漱卒 以沸流沛者陰友爲國相 秋七月 地震]

7년(254) 여름 4월에 국상 명림어수가 죽자, 비류(沸流) 패자(沛者) 음우(陰友)를 국상(國相)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중천왕

 

비대해진 남부를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남부 출신으로서 군사권을 모두 틀어쥐고 있던 국상 명림어수가 사망하자,

그 후임을 남부에서 뽑는 대신 곧바로 남부가 아닌 서부(비류나부)에서 뽑아버린다.

다른 정당에 소속된 사람을 요직에 앉힘으로서 일당독재화를 견제하고 정치 밸런스를 잡는 것은

오늘날 정치에서도 흔히 볼수 있는 일이다. 

어찌보면 그게 가장 공정하고, 효과적인 정치수단일테니.

 

[八年, 立王子藥盧爲王太子, 赦國內.]

8년(255)에 왕자 약로(藥盧)를 왕태자로 세우고, 나라 안에 사면하였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중천왕

 

이때 태자가 된 고약로가 바로 중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는 서천왕이다. 

장남은 아니고 차남인데, 장남은 어려서 죽었거나 아니면 무슨 이유가 있어서 태자 자리를 얻지 못한 것 같다.

 

[九年, 冬十一月, 以椽那明臨笏覩, 尙公主, 爲駙馬都尉. 十二月, 無雪, 大疫.]

9년(256) 겨울 11월에 연나(椽那) 명림홀도(明臨笏覩)를 공주에게 장가들여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삼았다. 12월에 눈이 내리지 않고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중천왕

 

명림홀도라는 사람은 명림어수와 무슨 혈연이 있을까? 

아들? 아니면 동생? 그냥 친척인가?

이 사람이 중천왕 9년에 공주에게 시집가서 부마도위가 되었다는 것.

남부 출신이라는 점에서, 서부 사람을 대신 국상으로 내세운 것에 대한

중천왕 나름의 회유책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남부 사람이 맡고 있던 국상의 자리를 낼름 서부 패자에게 주어버렸으니,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아도 남부 소속 사람들의 불만이 꽤나 엄청났을터.

그런 인사결정을 내린지 불과 2년만에 벌어진 국혼(國婚)이라는 것도,

빈축이라면 빈축이지.

 

[十二年, 冬十二月, 王于杜訥之谷. 魏將<名犯長陵諱>將兵來伐. 王簡精騎五千, 戰於梁貊之谷, 敗之, 斬首八千餘級.]

12년(259) 겨울 12월에 왕은 두눌(杜訥) 골짜기로 사냥나갔다. 위의 장수<이름이 장릉(長陵)의 휘에 저촉된다>가 병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왕은 정예의 기병[精騎] 5천 명을 뽑아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서 이들을 무찌르고 8천여 명을 목베었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중천왕

 

이때 우리나라에 쳐들어왔던 장수 이름이 위지해(尉遲楷)인데,

부식이 영감이 그 이름을 안 적었다.

하필 이 책이 만들어질 당시 고려 황제였던 인종의 이름이 왕 해(王 楷)였기에,

황제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쓸수 없다는(;;;) 충성심(?)에서 그 이름을 차마 쓰지 못하고

그냥 '위의 장수'라고만 적어놓고, '장릉'이신 인종의 휘에 저촉된다고 빼놓은 것이다.

 

그래 일단은 그건 봐주기로 하고.

치사하게 왕이 사냥하는틈에 쳐들어왔다는 거지. '위지해'라는 위의 장수가.

이때 중천왕은 정예 기병 5천으로 양맥에서 이들과 붙어서,

위의 군사들을 격파하고 거둔 목이 8천여 급.

 

저들은 어찌보면 침략할 타이밍을 잘못 골랐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 왔을때, 왕은 '사냥'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도 말한바 있지만, '사냥'이란 즉 '군사훈련'이다.

동물을 쫓으면서 군사들을 어떻게 배치하고 어떻게 포위할지,

어떻게 하면 확실하게 목표로 삼은 것을 사냥할수 있는지.

말을 타고 달리면서 차가운 바람을 맞고, 사람들을 빠르게 포진시켜

목표물을 꼼짝달싹 못하게 포위한뒤 사로잡는 기술을 익히는 것.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스포츠이며 나아가 군사훈련이 아닌가.

서바이벌게임이 필요없는 생생한 실전용 군사 훈련.

그런 와중에 쳐들어왔으니 피를 볼수밖에.

정예 기병 5천 까짓거 일도 아니지.

 

[十三年, 秋九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13년(260) 가을 9월에 왕은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중천왕

 

위의 군대를 격파한 바로 이듬해, 왕은 졸본의 동명왕 사당을 다시 찾는다. 

동명왕의 사당에 참배하여 국난(위가 쳐들어온 것)을 극복했음을 알리고,

나아가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대대로 왕노릇 할수 있도록,

고구려라는 나라가 천년만년 이어지기를 바라며 제를 올렸을 것이다.

 

[高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先是, 王娶帶方王女寶菓爲夫人, 故曰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遂出師救之, 高句麗怨. 王慮其侵寇, 修阿且城 · 蛇城備之.]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정벌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했다. 앞서 왕은 대방의 왕녀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기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다.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드디어 군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그 침구(侵寇)를 걱정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쌓아 대비하였다.

《삼국사》 권제24, 백제본기2, 책계왕 원년(286)

 

아참, 또 하나 빼먹을뻔했다.

이때에, 대방이라는 곳을 사이에 놓고 고구려와 백제가 신경전을 벌였었다.

 

[十五年, 秋七月, 王獵箕丘, 獲白獐. 冬十一月, 雷, 地震.]

15년(262) 가을 7월에 왕은 기구(箕丘)로 사냥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1월에 천둥이 치고 지진이 일어났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중천왕

 

나라도 안정되었겠다 이제 다시 사냥이나 즐겨보세 하고,

기구에 나가서 사냥하다가 흰 노루를 잡았다. 

그런데 안정된 나라에서 갑자기 천둥이 치고 지진이 일어나?

그리고, 8년 동안의 기사는 어디로 갖다 빼먹은거야?!

 

[二十三年, 冬十月, 王薨. 葬於中川之原, 號曰中川王.]

23년(270)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중천의 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중천왕이라고 하였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중천왕

 

즉위 23년 겨울 10월.

왕이 돌아가셨다.

23년이라는 즉위 기간 동안, 위의 군대도 격파하시고,

긴 머리 예쁜 여자 하나 물에 빠뜨려 물고기밥 만드시고,

자기한테 반역했다고 동생 둘이나 죽이시고.

뭐 여기저기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닥 이야기할건 없지만, 중천왕 편은 관나부인 에피소드 하나만으로,

꽤나 엄청난 쇼크를 준 시기이기도 했다고 본다.

이걸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사람 보기 나름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사람이란건 정말,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건가.

왕도 별수 없는 사람인건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더랬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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