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qoekfghs.com.ne.kr/Dojeon/3-68-4.pdf

거북선,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일등공신



해군사관학교 앞바다에 있는 복원 거북선.

임진왜란 당시 일본수군을 격퇴하고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한 조선측 수군은 전라좌∙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이었다. 특히 그 주력은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군이었다.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전술이나 지휘능력, 또한 거북선의 위력은 전승(戰勝)의 대행진이었으며 그리고 일선 해상에서 직접 실전을 수행한 수많은 수군장졸들의 역전의 공과 희생, 그리고 전쟁을 뒷받침하는 데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던 좌수영 관내 연해 지역민의 활동상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많은 승리의 요인 중에 특히 거북선의 과학성을 빠뜨릴 수 없다.
 

5원 이야기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은 무엇보다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공로에 있다 하겠다. 이런 그의 지대한 공로에서 일등공신이 왜군과의 해전에서 우수성을 발휘한 거북선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한때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자 잠수함이라는 전설까지도 돌았던 거북선이란 과연 어떤 배였는지알아 보기로 하자.

정말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의 발명인가 

문헌상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 13년(1413)에“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귀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해전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라는 구절이 있고, 15년에는“귀선의 전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가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는 뜻을 탁신이 상소하고 있다. 

이 두 기록으로 보아 거북선은 이미 고려 말 또는 조선 초부터 제조되었으나, 1592년(선조 25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이순신에 의하여 비로소 철갑선인 거북선이 실용화되었다고 하겠다. 즉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축적된 기술에 의해 발전을 거듭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직전 선조 24년(1591년) 이순신은 전라좌수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조선기술을 가진나대용을 만나 거북선을 만들 것을 결심하였고, 선소(현 여수시 시전동 708번지 일대)에서 거북선 제작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1592년 3월 27일 시전리 앞바다에서 시운전(진수식)을 하였다.

거북선은 정말 철갑선이었나 

원래의 거북선은 철갑선이었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으며 해군사관학교에서 제작한 실물 크기의 거북선에도 철갑 개판이 씌워져 있다. 

그러나 이순신의 조카이며 정유재란 때에는 숙부인 이순신 밑에서 사무를 보았던 이분( 芬)이 쓴 이순신의 행록(전기)에서 “전선(戰船)을 만들었다. 크기는 판옥선(板屋船)과 같으며 상부는 목판으로 덮었는데 판상에는 십자형 세로가 있어 사람이 위에서 걸어다닐 수 있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칼과 송곳을 꽂았다.”고 기록하고 있어 철갑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덮개로는 목판이 더욱 실용적이고 편리하다. 철판은 목판에 비해 무겁고 녹슬기 쉽다. 거기다 비싸고 쇠송곳을 꽂기에도 힘이 든다. 비중 하나만 생각해 보더라도 4mm 두께의 철판으로 배의 윗부분을 전부 덮을 경우 그 무게는 10톤 가량 된다.

만약에 철판을 덮는다 해도 그 밑에는 또 그것을 다시 받쳐주는 목판이 있어야 되므로 배의 속도는 그만큼 떨어지게 된다. 『충무공전서』의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에는 6각형으로 된 거북등 모양의 덮개가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적에게 겁을 주기 위하여 원래의 거북선에도 이와 같이 하여 철선처럼 위장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한산도해전에서 패한 왜장의 기록에는 거북선을 철갑선이라 말한 내용이 있으며 또 우리 나라 기록에도‘인갑( 甲)’또는‘구배갑(龜背甲)’등의 표현이 있으므로 혹시 그것이 철갑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아마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왜장이 거북선에 그려진 까만 색의 거북등 모양의 덮개를 보고서 철갑이라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충무공전서』에서는 ‘거북등’또는‘물고기 비늘’등으로 말하고는 있으나 문맥으로 보아 그것이 목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충무공전서」중의 전라좌수영의 귀선.

한때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잠수함이라고 알려진 때가 있었다. 잠수함이라면 물론 철선(鐵船)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잠수함설은 사라지고 철갑전설만 남아 있다. 

무적함대 거북선의 과학성 

임진왜란 당시 일본수군을 격퇴하고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한 조선측 수군은 전라좌∙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이었다. 특히 그 주력은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군이었다.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전술이나 지휘능력, 또한 거북선의 위력은 전승(戰勝)의 대행진이었으며 그리고 일선 해상에서 직접 실전을 수행한 수많은 수군장졸들의 역전의 공과 희생, 그리고 전쟁을 뒷받침하는 데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던 좌수영 관내 연해 지역민의 활동상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많은 승리의 요인 중에 특히 거북선의 과학성을 빠뜨릴 수 없다.

군선으로서의 거북선은 어떠한 장점이 있는 것일까? 우선 접근전을 위한 돌격선으로 대단히 유용한 군선(軍船)이라 말할 수 있다. 거북선은 판옥선(板屋船)에 다만 개판(改版) 하나를 더 씌웠을 뿐임에도 판옥선으로서는 수행하기 어려운 접근전에 의한 공격과 교란 임무를 수행케 하여 마침내 빛나는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니, 이순신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

화력을 볼 때 거북선은 파괴력이 크고 사정거리가 긴 천(天), 지(地), 현(玄), 황포(黃砲) 등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천자포(天字砲)는 직경 11.7cm의 둥근 철환(鐵丸)을 발사하는 대포였는데, 이 포의 사정거리는 1300보(步)로써 500m가 넘는 장거리이며 지자포는 천자포보다 약간 작은 포탄을 쏘았는데, 사정거리는 350m가 넘는 장거리이다. 그래서 거북선은 상대방의 사정거리 밖에서 천자포와 지자포를 이용하여 마음놓고 포탄 공격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장군전, 화전 등을 쏘았던 현자포(玄字砲), 황자포(黃字砲)의 사정거리는 약 300m이며 승자포(勝字砲)는 가까운 거리에서 접전을 할 때 쓰는 화약이 달린 화살로 무게가 가벼워 이동이 자유로우며 사정거리 200m가 넘는 장거리를 자랑한다. 천, 지, 현, 황포 등으로 공격을 받은 배는 대파되거나 불길에 휩싸여 침몰되었다. 천, 지, 현, 황포 등으로 공격을 받은 적의 배는 대파되거나 불길에 휩싸여 침몰되었다.

기동성 면에서도 거북선의 노는 선체 안쪽으로 배치되어 있어 충돌시에도 동요되지 않고 저을 수 있다. 선체 밖으로 노가나와 있는 상대방의 배는 충돌시 노가 부러져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거북선의 노는 양쪽에 8개씩 도합 16척이 있었으며 80명의 노군( 軍)이 담당하였고, 각 노에는 1명의 조장과 4명의 노군이 배속되어 있었다. 평상시에는 노 하나에 노군 2명씩 교대로 노를 저었으며, 전투시에는 노 양쪽에 2명씩 4명 전원이 전력을 다하여 노를 저었다. 조장은 전투상황에 따라 전후좌우로 노 젓는 방법을 수시로 바꿀 수 있었고 격렬한 전투 중에도 전∙후진, 선회와 정지, 가속과 감속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있어 기동성이 더욱 뛰어났다. 

거북선은 바닥이 낮고, 평평한데다 앞쪽이 깊게 물에 잠기지 않는 구조여서 해안 가까이까지 접근이 가능했고, 속도가 매우 빠르고, 선회능력 또한 뛰어났다. 또 현판 위의 측면이 옆으로 넓게 나와 있어서 노와 현판을 보호해주는 반면, 적들이 배에 기어오르기에는 불편하였다. 본체의 폭이 좁은 반면 상장의 폭이 넓어서 활동 공간 또한 넓었다. 

이처럼 뛰어난 거북선의 과학성을 절묘하게 이용한 이가 400여 년 뒤에 있었으니 그는 바로 얼마 전 고인이 된 현대의 정주영 회장이다. 조선소도 짓지 않은 상태에서 선박 수주를 따낸 그가 외국인들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내보인 것이 바로 당시 500원 지폐의 거북선이었다. 정 회장의 재치도 재치려니와 거북선의 우수성이 국제적으로 공인받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 장군은 우리 나라 조선산업 발전의 숨은 공로자라 아니할 수 없다. 
 

철화로 거북선이 그려진 백자항아리. 

구권 500원 화폐. 거북선과 이순신 장군의 초상이 함께 들어 있었다.
 

거북선을 둘러싼 송구봉과의 전설 같은 이야기 둘 

거북선과 관련하여 이순신 장군을 둘러싸고 전해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이순신 장군에게는 송구봉이라는 스승이 있었다. 그는 비록 서출이었지만 학식과 인품이 높아 많은 이들이 따랐다고 한다. 그와 얽힌 일화를 살펴보자.

이야기 하나

이순신이 십이삼세 때 친구들과 돌을 모아놓고 진법연습을 하고 있었다. 송구봉
이 그걸 보고 있다가 집에 다녀가라고 했다. 그런데 밤에 송구봉의 집에 갔는데 방에 누워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송구봉의 방에서 구선도(龜船圖)를 보고 집에 왔다. 송구봉이 묵언으로 교지한 것이다.

이순신은 여수 수사로 와서 여수 둔덕재의 솔을 가지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배를 만들었는데 여덟 개의 구멍 중 한 개의 용도를 몰라 송구봉에게 다시 가서 물었더니 그 구멍이 사청목(巳聽目)이라 했다. 뱀은 눈으로 소리를 듣기 때문에 바깥의 말을 듣기 위해 한 구멍을 놔둬야 했다. 어떻게 보면 구봉(龜峰)이란 호의 거북 구(龜)자가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든다.

이야기 둘:

이순신 장군이 병법을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송구봉은 직접 이순신을 찾아가 다음
과 같은 시구를 일러주고는 잘 기억하고 있으라고 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월흑안비고 선우야둔도(月黑雁飛高 單于夜遁逃)
“어두운 밤에 달은 밝고, 기러기 높이 나니
선우(오랑캐)는 야밤에 도망을 치는구나.”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 다시 찾아와서는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시를 한 수 던져 주었다.

독룡잠처수편청(毒龍潛處水便靑)
“독룡이 잠적해 있는 곳의 물은 아주 푸르다.”

이순신은 이 시를 잘 기억했다가 해전에서 왜군을 크게 격파하는 수훈을 세웠다. 송구봉은 그때 일어날 일을 미리 정확히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월흑안비고 선우야둔도(月黑雁飛高 單于夜遁逃)’와‘독룡잠처수편청(毒龍潛處水便靑)’이란 시를 어떻게 병법에 활용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장군의 점괘가 결정적으로 해답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이순신 장군은 진중에서 점을 자주 쳤다고 한다. 서애 유성룡의『징비록』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견내량에 있을 때,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마침 하늘엔 기러기떼가 높이 떠서 날고 있었다. 장군은 다른 때와 다르게 날아가는 기러기떼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필시 무슨 징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장군은 주역을 보고 점괘를 뽑았다. 주역의 64괘 중 가장 먼저 나오는 첫 번째 중천건괘(重天乾卦)가 나왔고 동효(動爻)는 초구(初九)이다. 중천건괘의 내용은‘건(乾)은 원형리정(元亨 貞)이니라’초구는‘잠룡(潛龍)은 물룡(勿龍)이니라’라고 되어 있었다. ‘잠룡(潛龍)은 물룡(勿龍)이라’장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장군은 모든 장군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장수들은 오늘밤에 자지 말고 소리를 내지 말며 뱃전을 칼로 치면서 순찰하도록 하여 경계태세에 만전을 기하라.”모든 군사들은 배의 돛을 내리고 아무도 자지 않고 뱃전을 칼로 치면서 돌았다. 

날이 샌 다음에 보니 뱃전에 손가락들이 수북이 떨어져 있었다. ‘잠룡(潛龍)은 물룡(勿龍)이니라’(잠수한 용은 진짜 용이 아니다)에서 이순신 장군은 월흑안비고 선우야둔도(月黑雁飛高 單于夜遁逃)와 독룡잠처수편청(毒龍潛處水便靑)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적군은 물밑으로 침투했다가 뱃전을 잡는 순간에 손가락이 잘려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왜군의 게릴라식 잠수작전을 이순신 장군은 충분히 간파하고 병법에 적용한 것이다.

─ 남우진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대형군선인 아다께 형 일본선.
 

이 충무공 함대의 주전투함인 판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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