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am.co.kr/read.php3?aid=1393858800435909141

선조, 명량대첩을 폄하하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37
사소한 왜적 잡은 것은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
입력시간 : 2014. 03.04. 00:00

영광 내산서원 - 강항을 모신 서원이다.
  
명나라 경리 양호 만난 자리서 은단 상 주고 표창에 불안 피력
왜군에 붙잡힌 영광 선비 강항, 성리학 전파 '주자학의 아버지'로 4년 포로생활 귀국 '간양록' 남겨
패전한 일본수군 물러나지 않고 해남·무안·함평·영광 일대 쑥대밭 

명량대첩을 거둔 9월16일 밤에 이순신은 당사도(무안군 암태도)에 머물렀다. 조선전함은 한 척도 부서지지 않았지만 왜군과 더 싸우기는 어려웠다. 무기도 부족하였고 군사들도 지쳐있었다. 

17일에 조선 함대는 어외도(신안군 지도읍 지도)에 이르렀다.

이때 300여척의 피난선이 먼저 와 있었다. 나주진사 임선, 임환, 임업 등이 방문하여 승첩을 축하하고 식량을 많이 가지고 와서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주의 임환(1561-1608)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의 종사관으로 활동한 선비였다. 백호 임제(1549-1587)가 그의 큰 형이었다. 임제는 명나라에 매달려 스스로 칭제를 포기한 조선을 한탄하여 곡 哭을 하지 말라고 유언한 무인이자 선비이고, 송도 기생 황진이 묘에 가서 제 지낸 조선의 풍류객이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홍안을 어디에 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잔 잡아 권할 일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어외도에서 하루를 더 머무른 조선함대는 19일에 영광 땅 칠산도 바다를 건너 저녁에 법성포에 이르렀다. 이때 흉악한 왜적이 육지로 들어와 마을의 집과 창고 곳곳에 불을 질렀다. 이순신은 홍농 앞바다에 배를 정박시키고 하룻밤을 묵었다.

명량대첩비 - 해남군 문내면 소재

20일에 이순신은 다시 서해로 북상하여 위도(전북 부안군 위도면)에 이르렀다. 여기에도 피난선이 많이 정박하고 있었다. 전라도 연안 백성들이 목숨 부지를 위하여 이순신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21일에 이순신은 서해로 올라가 고군산도로 이동하였다. 고군산도는 전북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 등 6개 섬으로 새만금 간척지 근처이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10월2일까지 12일간 머물렀다. 

이순신은 고군산도에 머물면서 9월23일에 명량승첩 장계를 수정하였다. 9월27일에는 송한 등 3명에게 장계를 올려 보냈다. 

그런데 명량승첩 장계를 받은 선조는 이순신의 공로에 매우 인색했다. 장계를 가장 먼저 본 사람은 선조였을 것인데 선조실록에는 명량승첩 사실이 아예 언급되지 않고 있다가, 10월20일에 선조가 명나라 경리 양호를 만난 자리에서 비로소 선조가 명량해전 이야기를 양호에게 꺼냈다. 먼저 10월20일의 선조실록을 읽어보자.

상이 경리 양호를 접견하였다. (중략)

상이 말하기를, “통제사 이순신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인이 은단(銀段)으로 상주고 표창하여 가상히 여기시니 과인은 마음이 불안합니다.”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이순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다 흩어진 뒤에 전선을 수습하여 패배한 후에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그 때문에 약간의 은단을 베풀어서 나의 기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대인에 있어서는 그렇지만 과인에 있어서는 참으로 미안합니다.” 하였다. (후략) 

이 날의 실록을 읽어보면, 명나라 경리 양호가 이순신에게 명량승첩 축하선물을 보내자, 선조는 마지못하여 명량승첩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이런 선조의 리더십은 하수(下手) 중 하수이다. 명나라 경리 앞에서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이고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이순신을 애써 폄하하는 선조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하기야 이순신을 하옥시키고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후에도 수군을 폐지하려 한 선조이다. 10월20일의 실록은 이러한 선조의 내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한편 이순신이 조정에 보고한 명량승첩 장계 원본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11월 10일 선조실록의 ‘제독 총병부에 적군의 동태와 대비책, 우리 장수의 전과를 알리는 보고서’에 승첩내용 일부가 실려 있을 따름이다.

백호 임제 시 - 광주 사직공원에 있다.

그러면 명량해전에서 패전한 일본수군 동향은 어떠하였을까? 이들은 전라우수영을 초토화하고 무안, 영광 앞바다를 다니면서 정찰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민웅은 저서 ‘이순신 평전’에서 “지금까지는 명량해전에서 패배한 일본수군은 서해 진출을 포기하고 그들의 수군 진영인 경상도 안골포로 물러갔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일본수군은 곧바로 물러나지 않고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전라우수영을 점령하고 다도해를 따라 영광 앞바다 까지 진출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 일본수군은 전라도 해남·무안·함평·영광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9월22일에 일본수군은 무안에서 군자첨정 정기수를 사로잡았다. 23일에는 일본 수군대장 도도 다카토라는 영광 출신 선비 강항을 영광 앞바다 논잠포(영광군 염산면)에서 붙잡았다. 강항은 순천 왜교성, 경상도 안골포를 거쳐 대마도에 잠시 머물다가 일본 에이메현 오즈성에 끌려갔다. 이후 강항은 교토에서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나 그에게 조선 성리학을 가르쳤다.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강항은 4년의 포로생활 끝에 1600년에 귀국하여 문집 ‘간양록’을 남겼다.

9월27일에는 선비 정희득이 영광 칠산 앞 바다에서 하치스카 이에마사의 수군 부장인 모리 다다무라에게 붙잡혔다. 그는 일본 시코쿠의 도쿠시마 현에 끌려갔다. 정희득은 1599년에 귀국하여 고향 함평에 돌아왔는데 일본포로 체험일기 ‘월봉해상록’을 남겼다.

한편 이순신은 10월3일에 고군산도를 떠나 영광 법성포에 도착하여 5일간 머문다. 10월 9일에 이순신은 해남 우수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해남 우수영은 왜군들에 의해 초토화되어 있었고 왜군들은 아직도 머무르고 있었다. 

10월9일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일찍 떠나 우수영에 이르렀더니 성 안팎에 사람 사는 집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사람의 자취도 없어서 보기에 참담하였다. 저녁에 들으니 흉악한 적들이 해남에 진을 쳤다고 한다. 날이 막 어두워질 무렵에 김종려, 정조, 백진남 등이 보러왔다. 

10일 밤에는 중군장 김응함이 와서 해남에 있는 적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고 전하였다. 11일에 이순신은 정탐꾼을 해남으로 보내어 상황을 파악하였다. 해남은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고 한다. 왜적이 달아나면서 불을 지른 것이었다. 



해남출신 임진왜란 구국공신충혼비 - 해남 우수영 공원 소재

그랬다. 이들 왜군은 남원성 전투에도 참전한 바 있는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였다. 기타지마 만지의 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의하면 시마즈가 이끄는 1만 명의 왜군은 9월16일 정읍회의 이후 전라도로 남하하여 21일에는 장성을 침탈하고, 나주·영암을 거쳐 9월27일에 해남에 진주한다. 이들은 10월10일까지 해남에 머물면서 전라우수영을 초토화하고 11일에 해남을 떠난 것이다. 이후 시마즈는 10월29일에 경상도 사천에 도착하여 왜성을 쌓고 그곳에 계속 진주하였다. 

한편 10월13일에 이순신은 정탐군관 임준영으로부터 왜적의 형세를 들었다. 해남으로 들어와 웅크리고 있던 적들이 10일에 우리 수군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 다음 날 모두 도망갔다는 것이다. 

또 해남 향리 송언봉 등이 왜놈에게 달라붙어 지방 선비들을 많이 죽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순신은 분노하였다. 이순신은 16일에 송언봉의 목을 베고 23일에는 왜군 앞잡이 윤해와 김언경도 처형하였다. 

조선함대는 10월11일부터 29일까지 18일간 안편도 安便島에 머물렀다. 안편도는 ‘울돌목의 파도가 이 섬 부근에 이르면 잔잔해진다’는 뜻의 섬인데 지금의 신안군 장산도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안편도에서 슬픈 소식을 접한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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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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