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am.co.kr/read.php3?aid=1392044400434322141

이순신, 기적을 노래하다. 명량대첩
戰船 수 13대 133…세계 해전사 유례없는 승전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34 
입력시간 : 2014. 02.11. 00:00

해남 우수영공원에서 바라본 울돌목
 
백성들이 끌고 온 100여척 피난선을 위장용으로 배치
여러 장수들 도망칠 꾀만, "동요 말고 적을 쏘라" 지시, 기 세우고 군령 내리고 호령
적장 토막내자 기세 크게 꺾여
조류 바뀌자 조선수군 총공격, 왜선 31척 격파 통쾌한 승리

서울시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지하에 있는 ‘충무공이야기’ 전시관을 다시 찾았다. ‘4D 영화 명량대첩’을 보았다. 이번이 네 번째이다. 영화를 보면서 호남인의 자긍심을 느낀다.

이제 1597년 9월16일의 명량대첩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해전장소인 명량(鳴梁)에 대하여 알아본다. 명량해협은 해남과 진도 사이를 잇는 진도대교 바로 아래를 흐르는 수로이다. 길이는 1.3km, 입구 쪽의 폭은 약 650미터이며 가장 좁은 폭은 295미터이다. 그나마 양쪽에 큰 암초가 있어서 실질적인 폭은 120미터에 불과하다. 이 암초에 조류가 부딪치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린다고 하여 ‘울돌목’이라 하였다. 명량은 하루에 네 번 물살이 바뀌는 급류이고 수심도 얕고 협수로 狹水路여서 많은 배들이 침몰하였고 지금도 보물선 탐사가 계속되고 있다. 

다음은 조선과 일본 수군의 전력 戰力이다. 한마디로 전선 13대 133, 10배의 차이였다. 조선수군은 일본 수군에 비하여 절대적 열세였다. 판옥선 13척 뿐이었다. 초탐선 32척이 있다고 하나 정찰용이었다. 이순신은 백성들이 끌고 온 100여척의 피난선을 전함 뒤에 배치하였지만 이 또한 위장용이었다. 

반면에 일본수군은 도도 다카토라가 총대장을 맡고 와키사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야키, 구루지마 미치후사 등 일본 수군 장수들이 모두 모였으며 전함은 300척이 넘었다. 다행히도 명량의 좁은 해협 때문에 소형군선(세키부네) 133척이 실제 전투를 하였고, 대형군선(아다케부네)은 해협 밖에서 대기하였다. 

명량대첩을 기록한 글들은 난중일기, 이충무공행록, 선조수정실록, 난중잡록, 연려실기술, 재조번방지 등 여러 곳이다. 이 중에서 가장 자세한 것은 세계기록유산 ‘난중일기’이다. 

그러면 9월16일 자 난중일기를 읽어 보자. 

이른 아침에 특별정찰부대가 와서 보고하기를 “수효를 셀 수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으로부터 곧바로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옵니다” 하였다. 

곧 모든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30여척이 우리 배들을 둘러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모두 도망칠 꾀만 내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2마장(4-6KM) 밖에 나가 있었다. 

전투가 시작된 시간은 오전 11시경으로 추정된다. 이때는 조류가 왜군에게 유리하였다. 그래서 일본 수군은 조류가 바뀌기 전에 조선수군을 전멸시키고자 속전속결을 꾀했다.

왜선 130여척은 곧바로 조선 배 13척을 포위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겁을 먹고 주춤거렸다. 이순신이 필사즉생 필생즉사를 그렇게 외쳤어도 조선 수군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나는 노를 빨리 저어 앞으로 나아가며 지자(地字), 현자(玄字)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았다. 탄환이 폭풍우같이 날아갔다. 군관들도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빗발처럼 화살을 쏘아댔다. 

그러자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쳐들어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그러나 우리 배가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어, 배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하였다.

이순신은 앞장서서 홀로 분전하여 총포를 쏘고 싸웠다. 많은 왜선들이 이순신의 배를 공격하자 수군들이 하얗게 질렸다. 이순신은 조용히 타이르며 동요를 막고 용기를 북돋았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보니 이미 1마장 정도 물러났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하였다.

배를 돌려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다가 내걸고 싶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가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들이 더 덤벼들 것 같아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명랑해전 추상도, 해남 명량대첩 기념관

누구보다도 이순신을 지켜줘야 할 직할부대장 김응함의 배 조차 나서지 않았다. 화가 났지만 이순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기를 세워 군령을 내리도록 하고 또 초요기(招搖旗)를 세웠더니, 중군장인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하였다.

이순신이 기를 세워 군령을 내리고 호령을 치니 그때서야 안위와 김응함의 배가 움직였고, 이들은 전투에 가세하였다. 

그리하여 두 배가 적진을 향해 앞서 나가는데,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3척에 지시하자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하였다. 안위의 격군 7∼8명이 물에 뛰어 들어 헤엄을 치니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몽둥이를 들거나 긴 창을 잡거나 또는 돌멩이를 가지고 마구 후려쳤다. 

배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쫒아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세 척이 거의 뒤집혔을 때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 와서 서로 힘을 합쳐서 왜적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하게 하였다. 

안위의 함선이 왜선 3척과 백병전을 하여 크게 위험에 처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 함대는 안위의 배를 구하였고 왜선 3척을 격침시켰다.

왜인 준사는 이전에 안골포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인데, 내 배위에 있다가 바다에 빠져 있는 적을 굽어보더니, “그림 무늬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장 마다시입니다”하고 말했다.

내가 물 긷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올렸더니, 준사가 펄쩍 뛰면서 “정말 마다시입니다”하고 말하였다. 곧바로 명령을 내려 토막토막 잘랐더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토막 난 적장 마다시는 당항포 해전에서 죽은 구루지마 후시모토의 동생 구루지마 미치후사였다. 왜구 출신인 그는 형의 복수를 하고자 선봉장으로 나섰다. 

우리 배들이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울려 함성을 지르면서 쫓아 들어갔다. 지자, 현자 대포를 쏘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았다.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도망가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오후 1시경이 되자 조류가 바뀌었다. 왜선은 역류로 되밀리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조선수군은 총 공격을 하였다. 그리하여 왜선 31척을 격파시켰다. 통쾌한 승리였다. 

싸움 하던 바다에 그대로 정박할까 싶었다. 그러나 물결도 몹시 험하고 바람도 거꾸로 불어서 우리 편의 형세가 외롭고도 위태로운 듯 하여 당사도로 옮겨가서 밤을 지냈다. 

참으로 천행(天幸)이었다.

‘난중일기’는 마치 한편의 전쟁 드라마 대본 같다. 불굴의 이순신, 그는 10대 1의 절대 열세 속에서도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기적을 노래하였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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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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