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12484.html

1917년 대동단결 선언, 민족운동 새 ‘물꼬’
등록 : 2010.03.26 16:14수정 : 2012.11.06 15:42 

한일합병과 함께 일본은 경복궁 근정전에 일장기를 내걸고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민족 시원, 만주] 시대와 함께 한 조선의 청년(1)
대한제국 계승, 주권재민의 민주공화정 깃발
3·1운동 투옥 농민이 60%, 새 사회세력 등장
 
1910년 조선의 심장부 근정전에 일장기가 꽂혀 있었다. 근정전은 어떤 곳인가? 조선의 수도는 한양이었고, 한양의 최고 중심은 경복궁이었다. 그 경복궁의 중심 공간이 근정전이다. 거기에 일장기가 꽂힌 것은 ‘이제 우리가 너희를 지배한다’는 상징적인 표시였다. 근정전 일장기 사진에는 이런 역사적 아픔이 담겨 있다.
 
오늘 강의에서는 근정전에 일장기가 내걸린 그 굴욕의 시대부터 1910년대 3·1운동시기, 대중운동과 독립운동이 본격화한 1920년대를 거쳐 1931년도 만주사변 이후 조선의 모습, 1940년대 아시아 태평양전쟁 뒤 민족운동의 흐름에 대해 시대별로 핵심 내용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조선의 심장’ 근정전에 내걸린 일장기의 의미

먼저,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을 당시 국제 정세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한 특징 등을 살펴보자. 독립운동사 하면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해 어떻게 잘 싸웠는지에만 관심이 많은데, 조선의 청년들이 상대한 일본 제국주의가 어떤 나라였는지도 중요하게 살펴야 독립운동의 성격을 더 명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국제적으로 매우 유리한 조건에 있었다. 세계 최대 강국이라는 미국과 영국이 일본의 편이었다. 심지어 1904년부터 일본과 5년 전쟁을 벌였던 러시아도 1910년에 접어들자 협상을 통해 일본과 같은 편이 되어 버린다. 국제사회에서 조선을 도와줄 적극적인 원군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부터 전쟁이 마무리되고 베르사유 강화조약이 체결되는 1919년까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은 공업 생산의 비중이 전체 산업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2차, 3차 산업이 급속하게 팽창한다. 인구분포로 여전히 농민이 다수이지만, 이 기간 동안 일본은 농업중심 국가에서 공업중심 국가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순간 일본은 세계 3위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는 대국이 되어 버린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국제적 파워는 실로 막강했다.
 
조선총독은 일본 수상과 동급

첫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케. 한겨레 자료사진
 
일본은 조선을 어떤 식으로 통치하려고 했을까?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역대 조선총독은 모두 9대에 거쳐 8명이다. 이 가운데 3명이 후에 일본 총리가 되었다. 조선총독은 대부분 군 출신인데, 1명을 빼고 모두 육군 출신이다. 지역으로 보면 1대 총독 데라우치와 2대 총독 하세가와가 모두 야마구치현 출신이다. 이토 히로부미도 야마구치 출신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통치한 독특한 특징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즉 일본의 특정 지역, 즉 야마구치현 출신 군벌의 이해관계 속에서 조선이 지배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이 1차 대전 후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총독부를 둔 곳이 대만과 조선이다. 그런데 조선총독과 달리 대만총독은 반 이상이 민간인 출신이고, 대부분 문관이거나 해군 출신이었다. 지역으로 보면 가고시마현 출신이 많았다. 당시 조선총독은 일본의 수상과 정치적 위상으로 보면 동급이었다. 조선총독이 일본제국의회에 나가 정무보고를 한 것은 1910년과 1920년 두 번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만총독은 수상이 운영하는 내각에 소속돼 있었다. 조선총독과 대만총독은 정치적 무게가 확연히 달랐다. 이를 통해 보면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 전략상 조선은 군사력, 군대를 앞세운 지배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10년대 민족운동, 저항의 근거지 찾아 만주로
 
1910년대 조선의 민족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저항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1910년 이전에 전개된 애국계몽운동 조직은 의병전쟁 과정에서 모두 와해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운동 세력들이 국내에서 조직을 재건하고 저항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미국이나 일본이었겠지만, 당시엔 만주와 조선족 자치지역인 연변,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일대가 후보지였다. 모두 조선과 인접해 있어 접근성이 좋았고,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독립운동 단체의 중요한 특징은 이름에서 드러난다. 대표적인 것이 석주 이상룡 선생 등이 주축이 돼 만든 ‘신흥학교’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한국이라는 의미의 ‘신한’, 새롭게 흥한다는 의미의 ‘신흥’ 등이 1910년대 조직의 명칭에 주요하게 등장한다. 새롭게 뭔가를 모색하고 새로운 준비를 해야 한다는 민족운동의 시대정신이 반영된 결과다. 이 시대 민족운동은 군사력을 키우고, 학교를 세우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으로 이어져
 
1910년대 민족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이 1917년 대동단결 선언(1917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 14명이 발기해 작성한 선언문 -편집자)이다. 대동단결선언은 항일 민족운동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핵심 내용은 이렇다. ‘황제가 삼보를 포기한 8월29일은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8월29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삼보는 정치, 토지, 인민이다. 다시 말하자면 대한제국의 계승권은 일본 제국주의가 아니라 민족운동가인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선언한 셈이다. 조선의 계승성을 명쾌하게 언급하고 있다.
 
또 다른 부분에서는 ‘우리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이니 그 제권, 즉 황제권이 소멸한 때가 민권 발생의 때’라고 주장하고 있다. 앞으로 민족 운동가들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주권재민’이라는 선언이다. ‘우리가 대한제국의 권리를 계승했는데, 그 대한제국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단체는 주권재민의 원리를 추구하는 단체’라고 주장한 셈이다. 계승성뿐 아니라 민족운동단체의 방향성도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대동단결)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한 뒤 고종 황제를 모시고 양반중심의 국가체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권재민의 민주 공화정을 세우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는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으로 이어진다. 상해임시정부는 헌법의 첫 번째 조항을 민주 공화정으로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군주제와 공화정의 전쟁
 
유럽식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은 조선의 민족운동 세력들이 어떻게 민주 공화정을 그렇게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당시 국제 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1년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이 일어난다. 신해혁명은 한족이, 만주족이 지배한 청나라를 무너뜨린 사건이다. 신해혁명에서 청을 무너뜨린 세력이 내걸었던 것이 민주 공화정이었다.
 
두 번째, 1914년 벌어진 1차 세계대전의 성격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국가와 입헌군주제를 추구하는 국가 간의 싸움이었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 대항했던 영국, 미국, 프랑스는 의회민주주의 나라였다. 결과는 근데 의회민주주의 국가의 승리였다.
 
1917년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러시아 혁명에서 권력을 장악한다. 사회주의 이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노동자와 농민의 힘으로 절대군주, 황제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국내의 민족운동가들에게도 새로운 세상이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청사진과 같았다. 이런 나라 안팎의 흐름이 민주 공화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 대중 민주주의 출발점

제90주년 3.1절 기념행사가 열린 2009년 3월1일 경기 화성시 발안읍 제암리기념관에서 시민들이 1919년 당시 일본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펼쳤던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화성/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1910년대 민족운동사는 3·1운동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워낙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3·1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진부하다. 대신 3·1운동 투옥자 통계를 통해 이 운동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다. 3·1운동으로 투옥된 사람은 모두 8500명인데, 이 가운데 농민이 약 60%이고, 지식인, 학생, 청년이 20% 정도다. 상공업자들은 14%를 차지한다. 농민과 상공업자는 조선시대에 전혀 대접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지식인, 학생들도 서구식 근대교육체계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이다.
 
3·1운동 투옥자 통계는 당시 조선사회에서 이전 사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회세력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렇게 형성된 새로운 사회세력은 1920년대 농민조합, 노동조합, 청년단체 등을 결성해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는 주요한 동력이었다. 또 이들은 자신들의 계급적인 요구를 일상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1920년대를 한국 대중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20년대 일어난 노동자들의 파업과 소작쟁의 등을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민족주의 운동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교과서에 청산리 전투에 홍범도 왜 빠졌나

1919년 상하이의 임시정부 수립에 고무된 만주의 항일독립군은 이듬해 사상 최대의 승전보를 울렸다. 청산리 대첩의 김좌진 장군(왼쪽)과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 장군(오른쪽)이 그 주역들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3·1운동은 조선 청년들의 애국열에 불을 지폈다. 많은 조선 청년들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에 가담한다. 무장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사건이 1920년 벌어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다.
 
두 전투의 전개 과정은 역시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다만 일반적인 역사해석과 다른 문제를 짚어보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두 전투의 상징적인 존재를 봉오동은 홍범도, 청산리는 김좌진 이런 식으로 역사 교과서에서 배웠다. 이게 틀렸다는 것이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봉오동은 홍범도, 청산리는 김좌진, 홍범도 이렇게 가르쳐야 한다.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연합부대가 일본군과 싸운 전투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의 단독 싸움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청산리 전투 전에 두 부대는 한 번도 연합 작전을 한 적이 없었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인데, 1920년대 북간도 지역 무장 독립운동단체를 통일하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 두 부대였다. 두 부대는 결국 통합을 못 하고 일본의 독립군 대토벌 작전에 밀리다가 백두산으로 숨어 들어가려다 청산리에서 함께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 것이다. 엄격히 보면 계획된 연합작전이 아니었다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
 
그런데도 우리의 역사 교과서는 김좌진 장군의 성과만 부각시킨다. 그 이유는 청산리 전투를 회고했던 일부 인사들의 뻥튀기 회고록과 동시에 홍범도라는 인물을 배제한 회고록 탓이라고 본다. 홍범도는 나중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뒤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청산리 전투 이후 홍범도의 행적이 명확하지 않은데다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사회주의 경력으로 그를 부각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상당수 독립군이 소련에서 만주로 돌아오면서 활기
 
만주지역에서 무장 독립군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자 일본은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작전을 벌인다. 만주 독립군의 활동은 만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치안불안, 통치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릴라 작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 정규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피하려고 조직적인 퇴각을 벌인다. 청산리 전투도 그런 과정에서 벌어졌다. 애초에는 백두산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결국 소련 국경지대인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옮겼다.
 
1920년대 민족운동은 상당수 독립군이 소련에서 만주로 돌아오면서 활기를 찾는다. 그리고 이때부터 항일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뉜다. 민족주의 계열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라는 3부를 중심으로 한 자치운동을 벌인다. 3부는 싸움만 하려고 만든 독립운동단체가 아니고, 만주의 조선인들의 교육, 경제적 실력 양성까지 생각하는 독립운동을 하려는 취지였다. 교과서에도 소개된 이른바 ‘자치운동’인데, 당시 이주 조선인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중국 당국에 세금을 내고 무장 독립군의 운영 자금을 대는 이중의 부담에 불만이 있었다. 민족주의 계열의 무장 독립운동 노선에 비판적인 사회주의 계열이 등장한 배경이기도 하다. 사회주의자들은 ‘너희는 싸움만 하느냐, 동포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등의 생활의 이익을 위해 도와주지 않느냐’는 식으로 민족주의자들을 비판했다.
 
사회주의 계열은 어떻게 독립운동사에 등장하나
 
그렇다면, 사회주의 계열은 어떤 식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등장하게 되느냐? 1919년 임시정부가 세워진 이후 민족주의자 내부에서 점차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싹트기 시작한다. 20년대 초반까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 유일했지만, 1922년부터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히 확산하더니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당되기에 이른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조선공산당 창당 당원 가운데 3·1운동 투옥자가 상당수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민족 문제를 생각하면서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민족운동이 사회주의 운동의 출발점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민족운동 내부의 사상적 분화과정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1920년 ‘김윤식 사회장’ 논란이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김윤식은 온건개화파에 속하는데, 조선 병합 당시 작위도 받고, 천황의 은사금도 받은 사람이었다. 그가 죽은 뒤 장례식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한쪽에서는 ‘명색이 국가의 외무대신을 지낸 높은 분인데, 당연히 사회장을 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무슨 소리냐? 그 사람의 과거 경력을 보라. 그 사람이 사회장을 지낼 만한 자격이 있느냐’는 반발이 있었다. 조선의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너와 나는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의 차이가 있구나’라고 확인한 사건의 하나였다.
 
타협적 민족주의자-비타협적 민족주의자-사회주의자

춘원 이광수. 한겨레 자료사진
 
비슷한 시기 춘원 이광수는 <개벽>에 ‘민족개조론’이라는 글을 싣는다. 춘원의 민족개조론은 우리 민족에 대한 열등감, 비하를 전제로 하는데, ‘저런 사람도 있구나. 민족을 비하하는 지식인도 있구나’라는 것이 알려진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 다음 1923년 벌어진 물산장려운동이나 민립대학설립운동의 과정에서 사상적 분화는 더욱 가속도가 붙는다. 물산장려운동은 조선인이 조선인이 만든 상품을 사고 팔자는 것인데, 애국심에 호소해 밀려오는 일본의 자본과 경쟁을 해보자는 실천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저건 기업가들, 자본가들을 위한 운동이다. 민중을 위한 운동이 아니다’고 비판한 사람들이 있었다. 민립대학설립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화 교육정책의 뼈대는 조선인에게 고등교육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민립대학 설립은 지극히 정당한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도 또 다른 비판이 제기된다. ‘대학을 설립할 돈이 있으면 야학을 키우고, 보통학교를 더 세우는 등 조선 전체의 문맹률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교육의 방향을 놓고 생각이 달랐다. 이는 사회주의자들과 그렇지 않는 사람과의 생각의 차이이기도 했다.
 
춘원 이광수는 1924년 1월2일자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우리 민족의 경륜을 향상시키고 독립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이냐’는 것인데, 뼈대는 ‘법률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정치적 수양 조직과 단체를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법률이 허락한’이라는 것은 결국 일본 제국주의의 법률을 말하는 것이고 자치론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자치란 결국 상층의 권력에 비례한 하층의 권력 구조를 만들자는 의미이고, 결국 ‘상층의 권력으로서 일본 제국주의 지배를 받아들이자’는 논리를 구성한다. 상해 임시정부의 사회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20년대 4차례의 논쟁 과정에서 3·1 운동 당시 모두 같은 편인 줄 알았던 민족운동 세력 내부에서 크게 세 갈래의 큰 흐름이 형성된다. 타협적 민족주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가 그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다시 조선공산당으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는 민흥회, 신간회로 간다. 타협적 민족주의자의 일부는 나중에 자치론이나 친일론으로 변질한다. 전문적인 연구자들이 보면 ‘아니다’라고 할 수 있지만, 거칠게 20년대 이후 민족운동을 정리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민족협동전선 운동체로서 신간회와 민족유일당 등장

1928년 진주 촉석루(남장대) 앞에서 신간회 진주지회 회원들과 기념촬영한 신간회 간부들. 한겨레 자료사진
 
이렇게 독립운동 내부에 사상적 분화가 일어나면서 1927년 2월 국내에서 등장한 것이 신간회다. 신간회는 민족협동전선 운동체로서 민족주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가 결합해 최대의 항일운동단체를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결성하였다. 그래서 아주 짧은 기간 100여 개의 지부를 결성할 정도로 호응이 높았던 운동이었다.
 
이 시기에 만주와 상해, 북경지역을 중심으로 한 해외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운동이 벌어진다. 그런데 신간회 대신 ‘민족유일당’이라는 명칭을 쓴다. 민족유일당을 결성하기 위한 준비운동이 1927년과 28년 사이에 대대적으로 벌어진다.
왜 같은 시기에 같은 취지의 운동이 국내와 해외에서 다른 이름으로 다른 방법으로 추진된 것일까? 이는 국내와 해외의 조건의 차이로 설명될 수 있다. 당시 국내에는 민족주의 단체와 사회주의 단체가 합법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고 있어서 민족유일당과 같은 비밀결사조직을 만드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신간회 같은 합법적인 조직이 탄생했다. 실제 신간회를 만들었던 사람들 중에는 ‘민족단일당’을 만들자는 구상을 하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1926년 벌어진 6·10 만세 운동을 보면 민족단일당 구성을 촉구하는 구호나 유인물이 많았다. 그러나 실제 만드는 과정에서 지하 정당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합법 조직을 만드는 것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반면 일본의 직접적인 지배를 벗어나 있는 해외에서는 비밀결사적인 성격의 민족유일당을 만들어 항일운동을 종합적으로 지도해 보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래도 국내와 해외의 두 운동이 언젠가는 서로 만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식의 운동이 1920년 후반 독립운동의 큰 흐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주에 1930년대 이후 독립운동사 강의가 이어집니다.)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정리=박종찬 기자 pjc@hani.co.kr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 신주백=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사단법인 역사문제연구소 운영위원·연구원. 성균관대 박사, 일본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경도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외국인 연구원, 대만중앙연구원 대만사연구소 외국인 연구원, 교육과학기술부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 주요 연구분야는 일본 강점기 민족운동사, 일본군 역사(1872~1945), 동아시아 역사교육과 역사교과서 등이며, 한중일 3국의 공동 역사교과서인 <미래를 여는 역사>의 기획과 집필에 참가했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등 우리 역사 바로잡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주요 저서로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 연구(1920~1945)>, <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 <1920∼30년대 중국지역 민족운동>, <한중일이 함께 만든 미래를 여는 역사>(공저) 등이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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