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13990.html

독립운동가들의 또하나의 논리는 ‘정치’
등록 : 2010.04.02 18:21수정 : 2012.11.12 15:37 

중국 타이항산에 주둔한 조선의용군들이 ‘한국인과 중국인이 연합해 일본을 타도하자’라는 내용이 담긴 구호를 담벼락에 쓰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민족 시원, 만주] 시대와 함께 한 조선의 청년(2)
김구-김원봉, 엎치락 뒤치락 주도권 경쟁
아지노모토와 교복이 상징하는 일제잔재
 
지난 시간에 이어 1930년대 만주로 다시 돌아가 보자. 1930년대에 항일 무장투쟁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운동단체가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이다. 흔히 사람들은 ‘조선’, ‘혁명’ 등의 단어가 들어가면 사회주의 계열로 분류하기 쉬운데, (명칭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당시 만주의 민족주의 운동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한국독립군은 북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일본군과 모두 5차례 싸우는 것으로 근현대교과서는 묘사하고 있다.
 
반면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한 조선혁명군은 2차례 전투를 벌여 상대적으로 활동을 덜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역사해석이다. 조선혁명군이 조직원의 규율이나 전투력 면에서 월등했다. 활동 기간도 한국독립군은 1933년 끝나지만, 조선혁명군은 36년까지 활동을 이어간다. 따라서 1930년대 만주의 민족주의 무장투쟁은 조선혁명군을 중심으로 설명해야 한다.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왜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나
 
사회주의자들은 1930년대에 중국 공산당 유격대 소속으로 활동했다. 민족주의자들도 중국인들과 연합해서 싸웠지만 중국인들이 지휘하는 부대에 소속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철저히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 게릴라 대원으로 일했다. 투쟁방식이 달랐다.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어느 것이 그 시대에 더 효율적인 운동방식이었을까?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 철저하게 연합하는 방식이 더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1934년 만주지역의 인구 통계를 보면(일본 제국주의 집계) 중국인이 3천4백만 명이었는데, 조선인은 겨우 70만 명이었다. 비교가 안 된다. 만주는 한반도보다 최소 6배나 넓은 땅인데, 70만 인구라는 것은 인구분포상 점 하나에 불과하다. 그래서 민족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중국인들과 연합한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운동방식이었다고 본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중국의 혁명을 위해 운동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는 문제로 남는다. 그들은 돌아가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만주의 일본 제국주의나 조선의 일본 제국주의가 모두 같은데, 만주의 일본인을 물리치는 것이 한반도의 일본인을 물리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조선의 독립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과 활동을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돕는 것이라고 봤다.
 
만주사변의 발발과 중국의 반조선인 감정 녹인 윤봉길 의거 

윤봉길 의사가 거사 사흘 전 한인애국단 선서식에서 찍은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1931년 만주사변은 만주지역과 조선은 물론 중국 내부에도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만주사변 뒤 독립 운동가들은 민족주의자건 사회주의자건 상관없이 먹고 자고 일어나면 총 들고 싸우는 것이 일이었다. 일상적인 무장투쟁이 운동의 주요한 방법과 수단이었다. 그러나 만주사변에 대한 중국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조선인이 만주에 왔기 때문에 일본이 우리를 침략한 것 아니냐”는 반 조선인 감정이 확산되었다. 실제로 일본은 만주에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식민보호’를 중요한 명분으로 내세웠다. 즉 조선인 보호를 위해 만주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주사변 뒤 중국인 마적들이 조선인을 습격한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런 사건은 조선의 신문에 보도가 되면서 조선인들도 역으로 중국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에 감정이 악화되면 누가 이익을 보나? 일본 제국주의다. 따라서 누군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가야 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이런 측면에서 획기적인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윤봉길 의거는 중국인의 반한 감정을 녹여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치안 안정 자부’한 일제 뒤통수를 친 보천보 전투

1937년 6월 보천보 전투를 대서특필한 동아일보의 호외. 한겨레 자료사진

30년대 전개된 사회주의 항일운동의 또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는 김일성이다. 김일성이라는 존재는 만주지역 민족운동사를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북한을 이해하는데도 필요하다. 북한은 1929년 ‘타도 제국주의’ 정신으로부터 내려온 항일투쟁과 만주사변 이후 15년간의 무장투쟁의 과정에서 주체사상이 형성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1937년 6월 호외로 보천보 전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는 김일성이라는 인물이 국내 대중들에게 알려진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김일성은 만주의 여러 빨치산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유달리 부각이 된 것은 보천보 전투와 무관하지 않다. 1930년대 정세 속에서 보천보 전투는 어떤 의미였나? 일본은 1936년과 37년에 가면 ‘조선의 치안이 안정되었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거기에 뒤통수를 때린 사건이 보천보 전투였다. 일본은 이 사건 뒤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벌여, 우리 역사상 단일 조직사건으로 가장 많은 사형자와 검거자를 기록한 이른바 ‘재만한인조국광복회’ 사건과 혜산사건 등이 터진다. 그만큼 보천보 전투는 일본 제국주의의 간담을 써늘하게 한 사건이었다.
 
처음 우세하던 김원봉, 결국 김구의 임시정부에 기울어
 
1930년대 중국의 본토인 북경과 상해 등에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의 통합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통합운동의 핵심 지도자는 김구와 김원봉이다. 두 사람은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통합운동 과정에서 1932년~39년까지는 김원봉의 영향력이 우위에 있었다. 김구는 굉장히 위축돼 있었고, 이는 임시정부의 위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37년 김구의 세력이 점차 만회하기 시작한다. 계기는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의용대의 북상이었다. 김원봉이 만든 민족혁명당은 무장부대로 38년 조선의용대를 조직한다. 그런데 조선의용대의 젊은 대원들 사이에 “전선에서 떨어진 곳에서 편하게 훈련만 받고, 정보수집만 할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있는 곳에 가서 싸우면서 항일운동을 하자”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래서 1939년과 40년 사이에 일부 대원들이 타이항산으로 올라가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꿔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간다. 조선의용대의 북상은 김원봉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계기였다.

30년대 중국 본토의 통합운동의 두 지도자. 김구(왼쪽)와 김원봉(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김구와 김원봉은 결과적으로 서로 통합을 못 한다. 그러나 영향력이 축소된 김원봉이 1941년 임시정부에 합류한다. 김원봉의 선택은 자기가 지휘하는 부대가 북상한 것이 컸지만, 당시의 국제 정세와 무관하지 않았다. 1939년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반파시즘 세력들로 구성된 연합군 세력이 급속히 확대된다. 나치가 소련을 공격하자 소련도 연합군에 가담한다. 이때 미국과 영국은 영국으로 망명한 유럽 여러 나라의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정책을 편다. 그래서 연합군이 승리하면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김원봉은 이런 국제 정세에 변화에 따라 임시정부가 국제적인 승인을 얻게 되면 자신이 철저하게 고립될 것을 걱정했다. 김원봉의 가세로 임시정부는 중국 안에서 실질적인 독립운동 지도기관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 정세와 관련해 운동가들의 선택과 행동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가들이 항일을 위해 그냥 싸웠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민족이라는 거대 담론에 의해 움직인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정치 논리가 있었다. 김구와 김원봉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민족주의 운동도 본격적인 분화

1928년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은 큰 전환점에 선다. 조선공산당의 해산이 그것이다. 1930년대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은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재건 운동의 중심 세력과 구호는 확연히 달랐다. 1920년대 조선공산당은 지식인 중심의 정당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노동자와 농민 중심의 조선공산당을 만들자’는 재건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 탄압을 계속 받는 과정에서 조선노동당을 재건하지 못했다.
 
이 시기 국내 민족주의 운동도 본격적인 분화가 시작된다.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소되는 것이 계기가 된다. 신간회 해소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사실상 운동의 조직적 기반을 잃었다. 이들은 이후 우리 문화와 국어 보존 등 조선학 운동으로 노선을 전환한다. 이전처럼 투쟁적인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타협적 민족주의자 다수는 친일로 간다. 이것이 30년대 국내 민족운동의 흐름이다.
 
김구-김두봉-여운형-김일성의 건국 연합활동 실패

1940년대 민족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이다. 많은 민족 운동가들은 이 전쟁에서 일본이 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건국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진다. 광복을 앞두고 일어난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는 크게 4개다. 김구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김두봉의 화북조선독립동맹, 여운형의 건국동맹, 김일성 김채규, 최홍근이 이끈 조선공작단위원회가 그것이다. 1940년대 조선 독립운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건국에 대비한 운동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건국을 위해 활발한 연합활동이 펼쳐진다. 임시정부의 김구가 자신의 가장 믿을 만한 조직원을 화북조선독립동맹에 보내 연결을 시도하고, 건국동맹은 김일성에게 조직원을 파견하는 식이다.
 
일본이 1945년 8월15일 항복을 한다. 그러면 우리는 독립을 하게 되었나? 일본의 패전은 동시에 38선을 경계로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는 과정이었다. 우리가 광복의 기쁨을 느끼는 그 순간이 사실은 분단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1940년대 활발했던 건국 연합활동은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고 분단의 아픔으로 이어졌다.
 
항일의 시기이자 근대 체험의 시기
 
지금까지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조선의 민족운동사, 항일운동사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식민지 시기는 항일을 해서 일본과 싸우는 시기인 동시에 우리가 근대를 살아가는 체험의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우리가 해방 뒤 미국식 자본주의를 쉽게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우리가 싸웠던 일본이 어떤 나라였는지를 처음에 설명했던 것처럼 ‘우리가 살았던 식민지 시기가 어떤 사회인가’를 설명하는 것은 민족운동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더 정확히 살필 수 있다.

한국인의 입맛을 길들인 화학조미료의 시초 아지노모토의 신문광고. 자료사진
 
일본이 발명한 화학조미료가 ‘아지노모토’다. 일본 강점기에 아지노모토를 요리에 사용할 정도면 ‘대단히 계몽된 사람, 개방적이고, 근대적이고 가족을 위하는 사람들’이었다. 아지노모토 광고에 보면 ‘이왕가명품’이라고 씌어 있다. 여기서 이왕가는 조선왕조를 뜻하고, 이왕가가 쓰는 명품이라는 의미다. 일제 강점기에 아지노모도는 그런 표상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조미료 역사에 화학조미료의 유해성 논란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이 불과 1980년대다. 그 전까지 화학조미료는 많이 치고, 잘 칠수록 가족의 행복을 위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해방 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화학조미료는 ‘미원’이다. 그 경쟁자는 ‘미풍’이다. 그러나 미풍은 미원을 절대 이기지 못했고, 이길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45년 8월에 가정주부였던 사람의 8할은 1955년 8월에도 가정주부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미원이라는 한자를 던져주면 뭐라고 읽었을까? 아지노모토라고 읽었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잠재된 기억을 끌어와서 광고의 효과, 인지도의 효과를 극대화시킨 것이 미원이라는 이야기다. 미풍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역사적 한계였다. 그만큼 ‘맛의 식민지’는 뿌리 깊었다.
 
또, 한 가지 의복의 예를 들자. 일본 강점기에 우리나라 여성들이 양장의 거부 반응을 줄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교복이었다. 교복은 남녀를 불문하고 교복 자율화를 하기 전인 1983년까지 보편적인 옷차림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도 명절이면 흔히 볼 수 있는 한복에 구두 신은 아버지의 모습. 이것은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한국 남성들의 근대적인 옷차림의 전형이다.

독립운동은 한편으로 민주주의 수호 운동

1920년대와 30년대에 형성된 문화와 가치체계는 오늘날 우리가 지극히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것과 뿌리가 닿아 있다. 그것은 근대적인 삶, 문명적인 삶의 가치체계다. 그리고 그 시대에 벌어진 독립운동의 가치체계 또한 지금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인 민주주의의 가치체계와 한 뿌리다. 일본 제국주의가 민주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독립운동은 한편으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운동이었다. 민주주의라는 가치는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모르다가 해방 이후 60년대 4·19를 거치면서 뼈저리게 인식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은 서구적 문명질서 속에서 삶을 배웠다. 반면 정치적 삶으로써 민주주의, 일상의 도덕적 규율로써 민주주의 삶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이것이 ‘식민잔재’다.<끝>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정리=박종찬 기자 pjc@hani.co.kr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 신주백=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사단법인 역사문제연구소 운영위원·연구원. 성균관대 박사, 일본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경도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외국인 연구원, 대만중앙연구원 대만사연구소 외국인 연구원, 교육과학기술부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 주요 연구분야는 일본 강점기 민족운동사, 일본군 역사(1872~1945), 동아시아 역사교육과 역사교과서 등이며, 한중일 3국의 공동 역사교과서인 <미래를 여는 역사>의 기획과 집필에 참가했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등 우리 역사 바로잡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주요 저서로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 연구(1920~1945)>, <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 <1920∼30년대 중국지역 민족운동>, <한중일이 함께 만든 미래를 여는 역사>(공저) 등이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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