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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9] 골벌국
구전 속 삼국시대 부족국가 '영천의 뿌리'
고경면에서 추정되는 유물 발굴
3세기 중엽 신라에 스스로 합병
이름만 있고 연관된 설화도 없어
김진욱기자  2007-05-17 08:07:49

신라에 복속된 많은 소왕국이 있었던 지역에는 지명이나 전설속에 소왕국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서국이 있었던 청도에는 이서면이 있고, 조문국이 있었던 의성에는 조문리가 있는 게 그것이다. 또 소왕국때의 왕릉 등이 대대적으로 발굴돼 당시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소왕국도 있다. 경산에 있었던 압독국이 그렇다.

그러나 골벌국이 있었던 영천에서는 그런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영천의 어떤 지명에서도 골벌국의 흔적은 없고, 골벌국과 연관된 설화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골벌국의 존재를 아는 영천시민도 많지 않다고 했다. 골벌국은 영천의 향토사학자나 몇몇 영천지역 단체에 의해 이름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영천향토사연구회가 발간하는 책자의 이름이 '골벌'이고, 영천의 한 청년단체 이름이 '골벌회' 정도다.

골벌국 영역도 

골벌국의 실체

골벌국(영천)은 신라(당시는 사로국·경주)와 인접해 있었다. 골벌국 인근에 강성한 신라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골벌국은 3세기 중엽(서기 236년)에 가서야 신라에 복속됐다. 골벌국이 신라와 아주 돈독한 관계를 갖고 있었든지, 신라와 견줄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든지 둘중의 하나다. 영천의 향토사학자들은 신라와 견줄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해석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영천의 향토사학회가 골벌국이 신라와 견줄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근거는 2004년 발굴된 영천시 고경면 용전리의 유물. 

2003년 12월, 고경면 용전리에 사는 이칠용씨는 자신이 경작하던 포도밭을 일구다가 발견한 녹슨 낫 등을 자신의 집 담벼락에 쌓아 두었다. 우연히 이를 본 영천지역의 한 역사교사가 "유물같으니 신고하라"고 해 발굴이 이뤄졌다. 

국립경주박물관은 2004년 3월10일부터 4월19일까지 고경면 용전리 1297의 2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였다. 이곳은 나무 널무덤이 있었던 곳으로, 철기류와 청동꺽창, 청동노기(기계식 활의 발사 장치), 동전 등의 유물이 발굴됐다.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기계식 활의 발사장치인 노기가 발견됐다는 것은 매장자의 신분이 상당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연히 무덤의 주인이 형성한 세력도 만만찮았을 것이란 해석이 함께 나왔다. 

발굴당시 용전리 유물에 대해 골벌국의 흔적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골벌국과 연관성이 있는 지는 좀 더 연구해 봐야 한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진 상태다. 

금강산성 정상에 있는 금강산성 내력비 

골벌국의 중심지 

골벌국의 중심지역은 영천시 완산동에 있는 금강산 일원으로 본다. 향토사학자들은 골벌국이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았을 때, 금강산으로 피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금강산 앞에는 고경천이라는 하천이 흐른다. 배를 타고 건너야 할 정도의 하천 폭을 지니고 있고, 예전에는 하천 폭이 지금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보인다. 금강산이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요건을 갖고 있음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금강산 정상으로 올려가려면 '영천시 그린환경센터(쓰레기 매립장)'의 정문 앞으로 나 있는 산책로를 통해 올라갈 수 있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 골벌국때 산성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동행한 전민욱씨(경북문화관광해설사 회장)가 산성의 흔적이라고 가르쳐 줬기 때문에 산성을 축조한 흔적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산 정상에는 '금강산성 내력'이라는 작은 비석이 있다. 1995년 영천향토사연구회와 보이·걸스카우트 골벌지역대가 함께 세운 것이다. 비석에 새겨진 금강산성의 내력은 골벌국과의 연관성에서 기술한 것이 아니라, 고려 건국 무렵 영천지역을 지배했던 황보능장이 왕건을 돕기 위해 견훤을 견제했다는 무용담이 주내용이다. 

전민욱씨는 "골벌국에 대한 연구가 아직까지는 체계적이지 못하다. 골벌국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관광자원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골벌국이란

골벌국은 영천시 완산동을 주 무대로 영천시 일원에 세력을 형성했던 소왕국이다. 삼국사기에는 '조분왕 7년(서기 236년) 2월 골벌국왕 아음부가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해 왔다. 왕은 그들에게 집과 밭을 주어 편안하게 살게 하고 그 땅을 군으로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골벌국이 신라의 침략을 받아 신라에 복속된 게 아니라 스스로 항복을 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언제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골벌국때 유물이라고 단정할 만한 것이 없어, 골벌국이 언제 생겨났으며 당시의 문화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이 때문에 골벌국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 


"신라의 큰 제사 골벌서 지냈다"
영천향토사학계 주장
/김진욱기자

전민욱 경북문화관광해설사 회장이 김유신 장군이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이는 신전 입구에 세워진 돌기둥의 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영천시 완산동의 한 야산에는 두 개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김유신 장군이 제사를 지냈던 신전의 입구가 아니겠느냐는 게 사학계의 해석이다. 

삼국유사 김유신조에는 '김유신이 고구려 첩자의 꾐에 빠져 고구려로 유인돼 가다가 나림, 혈례, 골화 등 3곳의 호국신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했다'는 내용이 있다. 

골화는 골벌의 다른 표현으로, 지금의 영천이다. 이 때문에 김유신이 골벌국에서 호국신에게 제사를 지냈고, 그 신전의 입구에세워진 돌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게 영천향토사학계의 주장이다. 

골벌국이 신라에 합병됐지만 신라에 합병된 이후에도 신라는 영천에서 나라의 큰 제사를 지냈다. 정치적으로는 신라에 합병됐지만 호국의 장소라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고려 건국 무렵에는 영천지역을 지배했던 황보능장이 견훤을 견제해 고려 건국을 도왔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의 힘으로 빼앗긴 성을 가장 먼저 되찾은 곳도 영천이다. 이 때문에 영천을 호국도시라고 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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